이제 벼이삭이 잘 익어가고 있네요 산간 지대는 추수가 끝나간데요!
마음을 부드럽게 2006/09/24/주일
(히브리서3장12-19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과거의 어떤 일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거울, 또는 본보기로 삼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또 성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추론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때 가장 빨리 떠오르는 이미지는 ‘인자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자한 모습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아마 부드러운 마음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 마음 또한 인자한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닮지 못한 데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니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하나님 형상의 닮은꼴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죄의 유혹’에 빠져서 그 형상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본존되고 있습니다.
그 형상의 그림자는 우리 마음의 친절과 사랑, 온유와 겸손 같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작용합니다.
알고 보면 이런 것들이 다 우리의 성품과 직결되는 성령의 열매들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이 항상 이러한 마음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조금만 힘들고 어렵고 고생스러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갈대처럼 흔들리고 완악해지거나 교만해져서 죄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즉, 다툼과 시기, 싸움과 반항, 그리고 좌절과 절망 등 나쁜 정욕에 노예로 추락시켜버립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광야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언급하고 있으면서 우리로 교훈을 삼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훌륭한 지도자 모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의 명령을 따르려하지 않았습니다. 매사가 원망 불평, 그리고 대적을 일삼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땅이 입을 벌려서 고라의 자손들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하루에 2만3천명이 한꺼번에 죽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불뱀에게 물려죽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분노를 격동시켰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한 번 여러분 스스로를 점검해 보십시오. 오늘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격분하게 만들 때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화나게 해서 진노를 일으키는 일만 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영의 눈을 바르게 뜬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일어주시는 가장 훌륭한 교사이십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하지 말라”(7,8절).
성령은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지상의 모든 복음을 믿고 따라가는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요한은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계2:1)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그런데 바로 일곱교회의 사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교회의 사자는 오늘날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각 교회들은 목사의 가르침을 받을 때에 마음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송로목사가 설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성령께서 이 교회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겠는지요?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 또는 ‘순종할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자기 양심이 찔리면 “이건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하는 아니야?” 하거나, 또는 “이거 너무나 지나친 것을 명령하는 것 아니야?” 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듣고 마음 문을 닫아버립니다.
이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광야에서 모세 목사의 지도에 따르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마음을 강퍅한 언동을 했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도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먼저는, ‘내 길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교회생활 똑바로 안 하고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를....!
따라서 오늘날도 예배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 또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알고 보면 설교는 여러분이 나아갈 길,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입니다.
다음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믿음을 바르게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부드럽게 갖지 않고 강퍅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영적인 거듭남의 체험은 물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복에서도 멀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가장 두려운 것 중의 하나는 ‘영원한 안식’에서 탈락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령 여러분이 교회에서는 집사요, 장로요, 권사였지만 하늘나라에 도착해 보니 내이름이 생명책에서 누락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엄청난 일에 직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군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부드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은혜가 넘치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방황하며 떠도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목사가 복음을 잘못 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복음적인 목회가 아닌 율법주의적인 목회나, 자유주의적인 목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가 신실한 맘으로 기도하고 밀고 나가는 목회이고, 때를 따라 보다 더 좋은 꼴로 먹이려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늘 십자가 은혜를 강조하고 성령의 은혜를 붙잡는 목회를 하는 것이 뚜렷하다면 기필코 잘 따라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마음에 ‘악심’이 들왔다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겠습니까?
구약의 사울왕이 그렇게 되고 말았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나중에 엔돌의 신접한 무당까지 찾아가서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게 하는 무서운 신앙적인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악심을 품는 것을 좋아하고 그와 같은 마음에 사로잡힌 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사람이 강퍅케 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강퍅케 되고 싶어서 되느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누가 장로로, 안수 집사로, 권사로 임직을 할 때 완악하게 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이후에 얼마나 수많은 임직자들이 목사님의 목회를 힘들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들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어떤 집사님은 아예 20년 전에 장로 임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집사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지금까지 집사님으로 계시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마음을 면하기 위해서 우리의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우리는 ‘초심’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처음 믿을 때에 품었던 새로운 결심, 세례받을 때에 먹었던 결단, 직분 처음받을 때에 품었던 각오,...가 무엇이었습니까?
예를 들어서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며 나누었던 비장한 결의와 결심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때의 그 마음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서광교회는 어떤 변화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반항하고 나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해서 잘 해보겠다고 도장을 찍었던 분들이 다 어디로 간지 아시지 않습니까?
목사가 무엇을 잘못해서입니까? 오늘 본문을 눈여겨보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마음이 ‘별 것도 아닌 것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알고 보면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지 아니하고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본질이 아닙니다. ‘누구는 어쩌고 누구는 어떻고....’가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아직도 본질에 매달리지 않고 비본질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향이 많습니다.
14절에 ‘확실한 것’이란 말은 ‘휘포스타세오’란 말인데 ‘근본에 숨어 있는 실체’, 곧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면 그 본질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의 은혜, 성령의 은사와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바로 그분을 잘 붙들고 나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하면 교회생활에 있어서 이런 관심에서 멀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문제들’ 지나친 관심을 갖게 되고, 또는 ‘일과 일 사이에 어떤 이슈’들에서 만족을 얻으려다가 그것이 충족이 안 되면 믿음까지도 까먹는 그런 경우를 흔히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우리는 날마다, 아니 죽을 때까지 줄기차게 본질에 매달리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가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하면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질의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변함없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속죄주가 되신 예수님을 배우고 또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 자신을 보면 한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변화되지 못하고 항상 이 모양이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맞는 적절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며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11:19-20).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께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주일학교 동화 하나가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이 지은 [강아지똥]이란 책입니다. (오늘 점심이 맛있으라고 똥 얘기 좀 하겠습니다.)
어느
날 흰둥이(개)가
담
옆에다 똥을
누었어요. 그곳에 버려진 강아지 똥은 춥고 외로웠어요. 비둘기가
먹이를 찾다가 강아지 똥이 먹인 줄 알고 쪼아 먹더니 말했어요. “맛이
뭐이래?”
“으웩!
퉤퉤퉤!”
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날아 가버렸어요. 강아지 똥은 슬펐어요.
또, 어미
닭이
지나가다가 강아지 똥을 보더니 더럽다고 피해갔어요. 병아리들도
삐악삐악 엄마 저 강아지 똥 더러워요~ 강아지 똥은 너무 슬펐어요. 모두들 더럽다고 자기를 무시하고 피해갔어요. “난
더러운 강아지 똥인데 필요한 곳이 없을까?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걸까?”
그때
민들레가
말했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저는 거름이 없으면 예쁜 꽃을 피울 수가 없어요.”
강아지
똥은 너무 기뻤어요. “뭐?!
내가 필요하다고요? 얼마든지 저를 드릴게요.”
하늘에서
3일 동안이나 비가 내렸어요. 강아지 똥은 빗물에 다 부숴 져서 거름이 되었어요.
강아지 똥
덕분에 민들레는 노랗고 예쁜 꽃을
피웠어요.
여러분! 강아지 똥은 더럽고 냄새나서 모두 피해갔지만 민들레를 만나서 변했어요.
민들레를 만난 뒤에 꼭 필요한 존재로
바뀌었어요. 민들레를 만났기 때문이어요.
여기서 우리는 ‘민들레’를 성령께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이 다 냄새난다고 싫어하고 피해다니는 사람까지도 변화시키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도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새로워질 수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우리 마음은 돌짝밭이든지, 아니면 가시밭처럼 상막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으셔서 부드럽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가 지속적으로 머물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성령충만을 사모하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얼마든지 마음을 부드럽게 기경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붙드는 복음의 능력은 그것을 가능케 하고도 남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일치한 마음을 주며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승리의 자리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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