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나도 쓸모가 있다

좁은길을 걸으며 2006. 8. 20. 18:20

 ++이 사진이 누구일까? 어여쁜...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ㅎㅎㅎ

 

 

                    나도 쓸모가 있다                   2005/08/20/주일/

                    (빌레몬서1장8-21절)



리 주변에 보면 생각보다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나 같은 것이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죠!” “나 같은 것이 이 이상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우리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은 차라리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은 빨리 죽어 없어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 어쩐지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잘못된 자아를 딛고 일어서는 것을 잘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분적으로도 종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주인 빌레몬이게 막중한 피해를 끼치고 도망을 쳤습니다.

아마 주인의 것을 상당히 많이 훔쳐 달아난 절도죄를 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는 잡히지 않았지만 또 다른 곳에 가서 죄를 저지르고 잡혀서 수감이 되어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우연치 않게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는 바울의 인격을 보았고, 또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80도 인간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0절에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을 아버지같이 생각하고 따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잘 알고 있었고 신임하고 있었던 빌레몬이 오네시모의 주인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귀가 번쩍 떠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지난 날 자기가 주인 빌레몬에게 저지른 죄를 낱낱이 이야기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편지를 한 장 썼습니다. 바로 그 편지가 우리의 성경 66권 중 당당하게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가 매우 간결한 책이긴 하지만 깊은 용서와 사랑 정신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오네시모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라의 물처럼 쓴물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쓴물도 단물(맛나는 인생)로 바꾸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빌레몬을 보아서 잘 압니다.


여러분은 어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나 자주 넘어 집니다. 오 주여, 나자주 실패 합니다. 오, 주여~!!] 그런데 그 맘을 누가 아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은 우리를 얼마든지 새롭게 빗으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또 토기장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하잘 것 없는 종이요, 범죄자로 감옥에 들어온 그에게 눈을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예정과 놀라운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빅 이벤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가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11절).

바울의 말은 100번 맞습니다.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듣기 전의 오네시모는 아마 험상궂고 고약하게 생긴 망나니를 떠올릴 수 있는 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만난 후 예수를 영접한 그는 그 얼굴빛이 천사초롱이었을 것이고 순한 양으로 변했을 상일 것 같습니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그렇다면 빌레몬은 더 이상 ‘쓸모 없는(크레스토스;무익한, 해로운)’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쓸모 있는(크레스토스;유용한,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 그 사람을 바꿔놓은 것입니까?

지난 날 같으면 서로 안 보려고 고개를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모두에게 환영받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바울은 오네시모를 바로 자기 밑에 두고 싶었으나, 도의상 그리고 절차상 빌레몬의 양해를 받아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와 교회들은 이런 도의적인 문제를 저버리는 경우를 허다히 봅니다.

전화 한 마디도 없이 다른 교인들 빼앗아가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화로 할 일이 아닙니다. 직접 찾아가서 정중히 양해를 드려야 할 일인데 그것을 지키지 않는 한국교회라고 할 때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최소한 장로들의 이동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의 복음사역에 퍽 유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마음이 정말 훌륭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당신은 우리 서광교회에서 꼭 쓸모있는 사람입니다.] [꼭 쓸모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용혜원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쳐보십시오. ‘나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라고. 여러분과 나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사랑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나눔을 주기 위하여,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새롭게 변화된다면 그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울까요?”


바로 예수님은 우리 인류를 위해서 꼭 필요한 분이 되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를 안 다음에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오네시모가 그러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메시모를 이렇게 대하기로 맘먹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16절).


옆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도 쓸모가 있죠?].

그럴 때 이렇게 대답해 보시죠. [당신이 없으면 나는 나는 못 살아~!]

“우물이 마르기까지는 우물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늘 가슴 아프게 하는 남편이라도, 날이면 날마다 속 썩이는 자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훨씬 낫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왔다가는 모든 인간을 쓸모없이 지은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죄 때문에 자괴감에 빠져서 잘못 생각했기에 더 큰 어리석음을 저지르곤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오해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마25:24,25).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의 현재의 형편에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네 달란트 더 빚을 내서 다섯 달란트로 시작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재능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거기서 성실하게 일하면 됩니다. 젊으면 젊은 대로, 늙었으면 늙은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몸이 약하면 약한 대로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받으시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고후8:12).

그런데 허다한 경우에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오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내 달란트는 이것 밖에 안 되는 걸까?”


어떤 여성이 간경화로 병원신세를 지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딸이 가만히 지켜보니까 인턴들이 수시로 와서 내시경 검사니 뭐나 하면서 어머니를 혹사시키는 겁니다.

이 때 딸이 지혜를 내서 이렇게 그 어머니를 위로해 줍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 좋은 일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파누워 있는 사람이 무슨 좋은 일을..?

어머니의 병으로 지금 좋은 학습자료를 제공하고 계시거든요.

배우는 저 의사들은 어머니 통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이렇게 고생하시지만..저 분들이 연구해서,

앞으로는 이 병으로 아픈이들이 보다 나은 진료를 받을 수 있는거거든요.

어머니는 그제야 엷은 미소로 대답하셨죠.

.....음, 이렇게 아픈 나도 쓸모가 있다는 말이구나!...

네, 어머니!”


그렇습니다. 병원 신세를 지는 절망적인 여성도 쓸모가 있다면 지금 그보다 훨씬 나은 여러분들이야말로 왜 쓸모가 없겠습니까?

...넘치도록 쓸모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입술을 열어 기도할 줄만 안다면 지금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바뀌듯이 얼마든지 여러분은 바꿔진 인생(changed life)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오늘 여러분을 만민 중에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분의 기도제목은 주님께 쓸모있는 사람이 도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어린 나귀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종려주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생! 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요나에게 박넝쿨도 소중했습니다. 하물며 망해가는 니누웨 백성도 하나님께는 소중했습니다.

하물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나도 쓸모가 있습니다!” 이런 긍지를 지니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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