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예수는 살아나셨다!

좁은길을 걸으며 2006. 4. 16. 08:12

내가 가꾼 꽃이랍니다. 예쁘죠? 200년 부활절에 주님을 맘껏 축하하는 모습이네요 ㅎㅎㅎ

 

               예수는 살아나셨다                 2006/04/16/부활절

                   (누가복음24장1-12절)           전주서광 이송로목사


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지난 날 “인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을 여러 번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는 말씀하시던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생명입니다.

만일 부활신앙이 무너지면 그것은 죽은 신앙이며 그야말로 헛것을 좇아가는 어리석은 미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한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장례 때 안식일이 촉박하여 미처 향품과 향유를 발라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인들은 이제라도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안식 후 첫 날,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 새벽에 미리 준비해둔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을 놀라가 한 것은 이미 무덤 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우리와 매장법이 다르기 때문에 흙무덤이 아닌 돌무덤이었는데, 돌이 벌써 굴러져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숨을 죽여 가며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왠 일입니까?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더욱 놀랐습니다. 그리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찬란하게 빛나는 흰옷을 두 천사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무서워서 그만 땅에 얼굴을 대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5,6절).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7절).

그때서 야 여인들은 ‘아!하!’하고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이 여인들은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쁨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그 즉시 열 한 사도가 모여있는 다락방으로 가서 “주님이 살아나셨어요!”하고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고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한쪽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직접 무덤에서 살아나신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후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H.R.L. Sheppard란 사람이 불가피론을 제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불가피했다. 한편 그가 부활하시는 것도 불가피했다.”

그가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더라면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를 이룰 수 없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새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불가불 살아나셔야만 했습니다.

[그 면류관도 귀하고 부활도 귀하다 저 천사 내려보내사 날 영접합소서~!]


분의 부활이 우리와 무슨 상관관계에 있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이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벗지 못하고 ‘죄의 종’, ‘마귀의 종’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살아나심으로서 우리도 살았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우리들의 축제의 날이며, 온 세계인들의 축제가 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Wallis 라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움직이는 동력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능력으로 살고 또 부활의 능력으로 삽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에 가장 위대한 종교로 부상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우크 에스틴 호데!;He is not here!)” “그러나 살아나셨느니라! (알라 에게르테!;but He has risen!)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빈무덤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그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거의 추억에만 머무르는 종교가 아닙니다. 새희망을 품고 앞으로 전진하는 종교입니다.

죽은 예수를 붙잡고 추억에 사로잡힌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살아계신 주님과 교제하며 사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빈무덤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이제 무덤을 떠나야 합니다. “가서 전해야”합니다.

뭐라고 전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크게 외치십시오.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리틀스톤길버트 웨스트는 기독교는 허구라는 주장을 펼치려다 보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장애물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를 열렬히 대적하던 사도바울의 변화였습니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연구가 끝난 후 그들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에 대한 반증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서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이 죄인임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수밖에 없다”고 격렬한 무신론자가 도저히 반증을 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 때문에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의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무덤을 떠나야 합니다. 무덤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무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십니까?

교회 건물을 지키고 교파를 지키고 과거의 종교습관을 지키고 옛날 제도만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쾌케 묵은 신앙에 매달려 있는 것은 빈무덤에 안주하려는 것과 같은 신앙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인도를 따라 세상을 밝게 하는 일에 힘쓰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마음을 쏟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십자가 죽어 무덤 속에 갇힌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무덤을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무덤을 떠나서 “오늘 부활하셔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과 사귀며 동행하는 크리스찬으로 사십시오!”

그 주님을 자랑삼고 사십시오. 그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사십시오. 믿는 형제들과 늘 기쁨을 나누며 사십시오. 나아가서 주님이 관심을 가졌던 불쌍한 이웃들을 돌아보며 사십시오.

나아가서 월드 비전을 품고 사십시오. 현실에만 안주하지 마십시오. 부활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드높은 이상을 품고 부활의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고달픈 세상 길을 가다가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결코 낙망하지 마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계시며, 부활이 있지 않지 않습니까? 그 주님만 믿고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아주 없네 사랑의 주님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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