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태민이네 가족이랍니다. 그런데 아빠는? 아~! 중고등부 예배 중이군요...아쉽네요 미남 중의 미남이신데....ㅋㅋㅋ
무엇이 마음을 바꾸게 하는가? 2006/04/23/주일
(누가복음24장13-35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나는 요즘 간혹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이면서도 왜 사람들의 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없을까? 여러분들은 그런 고민이 없으신지요?
단지 말의 설득력으로 하라고 한다면 더욱 힘들 것만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언변이 뛰어나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나 같은 말 재주 없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같은 훌륭한 분도 말의 재주보다는 더 깊숙한 곳에서 능력이 함께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고전11:6).
그러니까 세상에는 변호사처럼 말 잘 하는 사람이 모든 것에....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다행히도 바울 자신도 말솜씨가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 속에서 성령의 강렬한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열 두 사도의 반열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좇아다녔던 청년들이었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예수님에게 기대를 가졌던 만큼 그분이 십자가에 처형되어버리고 말자 실망이 컸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나! 아무런 희망도 없으니 조용히 초야에 묻혀서 지내자!”
그래서 이 둘은 앞으로의 젊음을 조용히 시골에 묻혀서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들의 일시적인 감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그들에게 조용히 나타나셔서 함께 동행하는 분이 계셨는데,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함께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그러자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 글로바라는 청년이 대답을 합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스스로 알지 못합니까?”(18절)
예수님께서는 다시 묻습니다. “무슨 일이데요?”
그들은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된지가 벌써 사흘째입니다!”(19-21절).
그들은 스스럼없이 대답을 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예수님은 기회를 포착하시어 그들의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26).
그리고 성경을 풀어서 복음에 관한 줄거리들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바로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현대를 감동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것은 설득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능가하여 상대방이 탄복의 감탄사를 자아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최고의 것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감동으로 다가오십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만났을 때. 왜 베드로는 예수님 발앞에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껏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에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눅5:4)고 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했더니, 자기 배 뿐만 아니라 동료의 배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탄복을 해버린 겁니다. 그는 자기가 살아 온 인생의 어떤 경험과 경력보다도 더 위대한 분을 만났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분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두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에게 설득당한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감동’이란 우리 마음을 흥분케하고 새로운 기운을 돋아나게 하는 강렬한 에너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고객서비스시대를 넘어서 고객감동시대로 진입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웬만큼 ‘재미있는 것’, ‘화려한 것’, ‘맛있는 것’, ‘성능이 좋은 것’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이나, 다른 작품, 또는 다른 제품이 따라올 수 없도록 차별화 되었을 때에 감동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잘 나가는 기업들은 새로움 제품 개발을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객 감동을 넘어 ‘고객을 졸도하게 만든다!’, 또는 ‘고객을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는 목표 아래서 줄기찬 노력을 쉬지 않고 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아니하며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자들”(눅7:32)이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정말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강박하다 못해 괴팍해졌습니다. 눈물이 말라붙고 말았으니 교회 나와서 회개하면서 우는 자들을 보기조차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은 핍박 때문에 목회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이용하서 약삭빠른 목사님들은 매우 인기 탈런트적인 설교가로 등장하여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쩌면 교회 나와서 코미디언 같은 목사님을 보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스탄트식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칫 인스탄트식 복음에 길들여지면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주일학교나 어른들 전도에 있어서도 과감하게 전략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매우 전도가 쉽지 않은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이미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는데, 아직도 아날로그 방식만 고집하면 안 되질 않습니까?
한 번 만났을 때 두 눈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지게 만들어놓든지, 아니면 그냥 ‘내 배꼽아, 내 배꼽아!’할 정도로 배꼽을 빼놓든지 해야 합니다. 그것도 두 번도 아닌 단 한 번에 완전히 KO를 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전도전략이 무엇일까를 연구해야 합니다.
이상헌씨가 지은 [마지막 하루처럼 사랑하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고객 만족의 차원을 지나 고객 감동의 시대여서 남편을 감동시키는 능력이 없다면 1등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 남자는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화를 잘 내는 남자일수록 더욱더 나약한 남자이다. 때문에 남자는 사소한 것에도 잘 감격을 한다. 남편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남편의 작은 행동에도 감동어린 표정이나 찬사의 말을 해 주는 것이다. 남편의 작은 선물에도 고마움을 표하고 남편 모르게 시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남편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남편을 감동시킬 무엇인가를 해보라. 남편의 감동은 아내 사랑으로 고스란히 돌아온다!”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감동을 받으면 마음을 연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베드로전서3:1-6에 분명히 나옵니다.
아마 아내에게 감동을 받은 남편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응, 나 오늘 내 아내에게 감동 먹었네!!!” 그리고 추가로, “나도 당신 따라서 교회 나갈꺼야!!!!”
이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과연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감동을 끼쳐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가지고 우리는 미신자들을 향해서 이것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막연하게 “교회 한 번 나와 봐! 안 다니는 것보다는 다니는 게 좋아! 아무 종교라도 하나씩 가지고 있는 데 좋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당신은 꼭 예수 믿어야 할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지금까지 날마다 기도해 왔어요! 하나님은 지금 당신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서라도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소원하셨던 아버지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당장 나오십시오!”
의심하거나 낙심된 영혼들을 만났을 때도 이것으로 결정타를 날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26).
그런데 이 책망의 말씀과 더불어 구약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에 나타난 복음을 풀어서 설명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왜 그런지 가슴이 뜨거웠네요! 그분을 볼 때, 그분 말씀에~~!!”
그런데 그것도 잠시 후 사라진 것 같았는데. 왠지 가슴이 뭉클거리는 것은 “야, 이분이 하신 말씀에 뭐가 있구나!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왜 가슴이 자꾸만 뜨거워질까?”라고 했을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예수님 앞으로, 교회로, 천국으로 돌려놓고 말아야 합니다.
“그런 능력을 나에게도 주옵소서!”하고 부르짖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그 마음에 일어난 뜨거운 감동이 그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그들은 가던 걸음을 그 즉시로 돌이켜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서 열 한 사도들과 함께 한 자들 앞에 가서 “우리도 주님을 만났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잡수시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던 것입니다(35절).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했을 때에 또한 그들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만이 뜨거운 가슴으로 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나에게도 복음의 능력을 주옵소서! 부활의 능력을 힘입혀 주옵소서! 불길 같은 성령을 부어주시옵소서!”
맹숭맹숭한 가슴으로는 나 혼자의 신앙도 감당을 못해서 쩔쩔매며 허덕이다가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이 붙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내 맘이 뜨거워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우리는 우리 착한 행실이 겸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다가갈 때 더욱 능력은 증폭된다고 믿습니다.
우리 서광교회도 그냥 서광교회가 아닙니다. 주보 맨 첫장 위에 보면 1)건전한 신앙인격, 2)성령의 아름다운 열매, 3)세상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아야 합니다. 단순히 흥미만 가지고는 현상유지밖에 못할 것입니다. 감동을 끼칠 수 있는 ‘복음적인 이벤트’를 연구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지 못한 사랑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하지 못하는 용서와 베풂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나 이 교회에 나와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참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먼저 믿는 사람들의 몫이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의 냉랭한 가슴에 불을 붙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러분을 감동의 사람으로 쓰실 줄로 믿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부부 (0) | 2006.05.21 |
---|---|
가장 큰 효도 (0) | 2006.05.14 |
예수는 살아나셨다! (0) | 2006.04.16 |
아버지께서 주신 잔 (0) | 2006.04.09 |
수모 (0) | 2006.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