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광가족들의 주일 오찬....일부 성도님들의 모습인데 매우 정겹고 아름답게 보이지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 2006/04/09/주일
(요한복음18장1-11절) 전주서광 이송로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왜 종려주일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5일 전에 예루살렘에 하실 때 그를 환호하던 사람들이 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며 외쳤기 때문입니다. 이 때 사용했던 나무가 종려나무였습니다.
오늘 본문 얘기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4일째 되던 날이고,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에 겪으셨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떡을 떼시며 나눠주시고 또한 포도주 잔을 돌리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을 할 때마다 그때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를 살펴보곤 합니다.
우리는 이 잔을 쉽고 편한 맘으로 들고 마시지만, 그 때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포도주를 마시는 예식 자체만은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 후면 닥쳐 올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행하신 뜻 깊은 잔이며, 이 잔을 마시는 자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언약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예식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하여 듣기는 들어도 온전히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유다도 끼여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느새 가룟 유다는 12제자들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예수님의 행보를 대제사장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머지 열 한 제자와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예루살렘 맞은 편 동쪽, 감람나무가 우거져 있는 감람산 중턱에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거기 무엇하러 가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가끔 같이 가셔서 기도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열 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그러고 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을 데리고 가서 매우 근심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14:34).
예수님은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동산이 쩡쩡 울리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님은 ‘이 잔’을 옮길 수만 있다면 옮겨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고뇌의 찬 기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고뇌에 찬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형벌을 하나의 ‘잔(포테리온; cup)’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하신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나 사력을 다해서 기도하셨든지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셨으며, 눈물과 통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누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그 때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3,44).
성도 여러분, 어떤 기도가 간절한 기도인지 아세요? 간이 절리도록 하는 기도가 간절한 기도입니다.
저도 처음 은혜 받고 새벽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에 저절로 힘이 생기더군요. 한 겨울에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적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사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해 보셨으면 합니다.
나는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에 서울 삼각산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소나무 몇 개씩 뽑고 내려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기도하기도 했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 한 번 소나무 뽑으러 같이 갑시다.
우리 사광교회는 복받은 교회입니다. 새벽기도회만 나오시고 다른 교회에 출석하시는 집사님, 권사님이 모두 세 분(추복업권사, 손숭월 권사, 모양순 집사)이 계십니다. 나는 그분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분 모양순 집사님은 3년 동안 새벽기도를 나오면서 늘 통곡하며 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슬픈가 하고 들어보면 자기 자기 자신이나 가정을 위해서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 특히 위정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들을 위해서 눈물로써 대성방곡을 하며 기도를 하십니다.
아마 아무 것도 모르는 그분을 시끄럽다고 싫어하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배운 것도 없고, 잘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배당 불을 켜고 나면 가장 먼저 오셔서 기도하신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님은 통곡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이렇게 예수님은 생사를 건 기도를 드리고 계셨지만, 그자기 선생님의 고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아랑곳없이 곤드레만드레 잠에 취해있었습니다.
눈을 보니까 피곤에 지쳐 있어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0,41).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반복된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서 결단이 이루졌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가쳐 올 고난이 너무나 큰 것이기에 당혹스러워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매를 맞으려고 하면 잔뜩 겁을 먹고 안 맞으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어릴 때 학교 숙제 안 하는 날은 두꺼운 옷을 세 개, 네 개 껴입고 등교를 했던 학생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결심이 이루졌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기도의 응답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다 되는 것이 응답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가 응답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성경 진리에 어긋난 일을 하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우겨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답이 아니라, 마귀에게 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고생을 피해가는 길만이 현명한 길은 결코 아닙니다.
좀 더디고, 힘들고, 고달파도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그 약속을 붙드는 신앙이 가장 복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고 나시니까, 올 것이 왔습니다. 실질적인 고통의 현장이 기다리고나 있었다는듯이 그를 체포하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미리 알고 계셨던 문제이고, 이미 각오했던 문제였기에 그들 앞에서 더 이상 바들바들 떨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가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 부하들을 데리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 손에는 횃불과 칼과 몽치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마치 폭력배를 소탕하러 온 것처럼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제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나와서 간신배의 모습을 취합니다.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입을 맞췄습니다. 가증스럽고 거짓된 입술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암호를 짰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예수)이니, 그를 잡으시오!”(마26:48).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눅22:48).
예수님이 먼저 말을 던졌습니다.
“누구를 찾느냐?”(7절).
“나사렛 예수를 찾소!”
“나다!”(6절). 따라서 합시다. “에고 에이미~!” “나는 나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자’(출3:14)를 가리킬 때 쓰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을 하실 때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뒤로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들에게 자신을 체포할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8절).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자신의 제자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끝까지 자신의 양떼를 보호하시는 목자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자 대제사장의 부하 말고가 먼저 예수님께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로 그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도로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까지 참으라!”(눅22:51)고 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꽃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정의감에 북받쳐서 오히려 감정을 앞세워 일을 처리하려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모세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민족을 구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의감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의 꿈은 참혹하리만큼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정확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물리력을 동원해서 선을 이루겠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동원하는 방법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해서 빈번히 실수하고 어리석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1:20).
아무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와도 “이것까지 참자!”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는 내 것으로 돌아올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이 고배를 마셔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인류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분명히 그것은 쉬운 잔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그 어떤 행동도 주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에는 장애물로 등장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순종하며 그 잔을 마셔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무엇인지,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류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고통의 잔을 다 마셨습니다. 이렇게 ‘순종의 잔’을 마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참 소망을 안겨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을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 드리는 것 자체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한다면 결과와는 상관없이 이미 승리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바로 거기서부터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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