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러 산에서 볼 수 있는 춘란입니다. 특히 내장산 주변에 군락을 이루고 있답니다. 화분에 심어도 잘 자라고 번식력이 좋습니다. 굵은 마사토를 이용해서 심어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2006년 03월 12일/주일
(마태복음5장43-48절) 전주서광교회이송로목사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잘 아는 것 같지만 이 한 가지를 모르면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아마 어떤 분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우리는 때론 너무나 많은 원수들을 가슴에 두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이 원수 같은 놈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원망 속에는 많은 가슴 아픈 사연들이 내포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사용했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을 썩여도 보통 썩인 게 아니었겠지요!
그렇지만 자식이 원수일 때가 있고, 남편이 원수일 때가 있고, 가까운 형제가 원수일 때가 있습니다.
따지고 흔히 가까이 있는 사람이 원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마음에 원수가 남아있지 않아야 합니다.
원수란 무엇입니까? 정의가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정의해 보았습니다.
‘원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원수라고....
내 입장에서 보면 상대방이 나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할 때에 그것을 가슴에 담고 미워하는 마음과 원망스러운 마음이 깊이 자리잡고 있는 대상이 원수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왜요? 알기는 알지만 ‘마음에서부터 풀릴지 않은 감정의 응어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풀 수 없어서 못 푸는 것이 아니라, 푸는 공식을 모르기 때문에 못 푸는 경우가 많습니다.
1946년, 지슬로 카돌로스키라는 사람이 독일의 한 농가에 물건을 약탈하러 들어갔다가 강도로 돌변해 일가족 열 명을 향하여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인 하멜만씨만 살아 남고, 일가족 아홉 명이 사살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인 카돌로스키는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고, 드디어 석방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할 가족이나 후견인이 없어 석방을 보류해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멜만씨는 자기가 그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그를 석방시켰으며,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엄청난 일에 놀라며 감탄했고 신문 기자들은 “당신 가족을 다 죽인 원수 같은 그를 어떻게 식구로 영접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내가 그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오히려 되물었다고 한다.
우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우는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손
목사님은 일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루었던 분입입니다. 해방 후에 애양원으로 돌아와 나환자를 돌보며 목회하던 중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 동인, 동신이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시 여순사건때 좌익 학생들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중 복음을 전파하다가 동인 동신 형제가
1948년10월21일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 살해범을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다음은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하나님께 드린 아홉 가지 감사
기도입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삼남 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
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당함이리요,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信愛)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2년 후 6·25동란 중에 나환자를 돌보기 위해 피난길을 포기하여 공산군에게 총살을 당한 순교자의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음에 원수를 두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라!”입니다. 기독교와 유교...가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자는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말라!”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
보다 적극적인 면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과 유교적 세계관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지(福祉) 문제는 그 뿌리가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진정한 복지 실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돌보는 정신’에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노인들을 10명 모시고 살지만.... 그분들의 영혼이 사랑스럽고 귀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기에 우리는 그분들의 대소변까지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고 다 받아내고 있습니다. 냄새가 냄새로 여겨지지 않는 마음을 예수님이 주시지 않는다면 복지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원을 넘어서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그 원수 사랑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용서정신에 근거’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했던 원수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 사랑 안에는 항상 용서가 깔려 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뉴욕의 복잡한 밤거리에 한 젊은 청년이 병들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죄와 병고에 시달려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경찰관이 살펴보니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중얼거리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그를 부축하며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당시 뉴욕의 저명한 재벌이었습니다. 경찰은 곧 그의 아버지께 전화를 해서 지금 당신의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아버지는 옛날에 그런 아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잊었다고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평생을 괴롭힌 아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다.
그러나, 경찰은 그 아버지와 아들을 전화로 연결시켜, 아들이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 말에 아버지는 “그래, 너를 용서한다. 좀 더 빨리 회개했으면 그때에 용서할 터인데 왜 이제야 회개하느냐”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들 역시 더 일찍 돌아오지 못했음을 뉘우치면서 용서를 받고나서야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용서받지 못하고는 절대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아야 할 인간입니다. 용서란 사람을 자유케 하며 소망을 주는 최대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죄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오소서!”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용서를 빌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용서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고 용서하자!”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림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위시하여 열두 제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나가다 가룟 유다를 그릴 때에는, 자기를 일생동안 괴롭힌 원수같은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마귀 같은 느낌이 들어, 가룟 유다의 얼굴은 그 친구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야겠는데 좀처럼 영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몇 달, 몇 해를 두고 고심해도 예수님의 얼굴은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수도사를 만나서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수도사는 대번에 “자네를 괴롭히는 그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을 걸세”하며 충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곧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스스로 회개했으며 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이 열려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할 때 아울러 자유와 기쁨이 샘 솟구치듯 솟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보복이나 복수할 자격은 없고 용서할 자격만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지난 주 내가 아는 선생님 한 분이 학교에서 어느 분으로부터 모함을 받고 억울해서 정말 견딜 수 없어서 심지어 죽고 싶다는 말을 해 왔을 때, 나는 오늘 준비한 설교 아웃트라인을 그분에게 계속 전해줬습니다.
그런데 한 주간 동안 계속해서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에 기쁜 소식이 왔습니다.
“이제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용서하겠습니다. 제가 이런 결심하니까 빨간색 연필이 몽당연필 되겠네요(칭찬하시느라고...).
사실 난 그 사람이 내 인격을 모함했을 때 난 형사처벌감으로 생각했고 절대로 가만 두지 않으려고 법관으로 있는 친구에게까지 찾아가서 상담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당장 소송을 걸라!’고 했어요. 하지만 목사님의 권유를 새겨듣고 최후 선택을 놓고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용서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그동안 미안합니다. 바보같은 모습을 보여드려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원수를 풀어주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두고 있는 원수를 이 시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하고 잊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적극적인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