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가 필 날도 머지 않았군요 화분에 심은 진달래가 꽃망울 맺었어요 젤 먼저 볼 것 같아요
러브 파워 2006/02/26/주일/
(고린도전서13장13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사랑은 그 자체로서 힘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나타내보이셨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진지하고 가장 길고도 짧은 이야기가 바로 ‘러브스토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얘기가 사랑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큼 힘든 것도 없고 사랑만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순간 고통은 시작된다!”는 말까지 남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노랫가락에서는 “사랑만은 않겠어요!”라고 한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사랑을 먹고 살지 않으면 역시 존재의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헨리 데이비스 소로라는 사람은, “사랑을 치유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사랑에는 파워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의 사랑은 파워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할 때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는 그 순간부터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요한 사도는 일찍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4:16-21)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랬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케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후1:22).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자칫 미움이 들어와 그 마음을 지배해 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누구나 다 잘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있을 때는 미워하고 돌아서는 마음을 갖습니다.
바로 그럴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미워하고 싶을 때, 아니 미움이 가득하고 분노로 마음이 휘감아져 있을 때 용서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꾼다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용서하고 사랑하는 바꿀 수 있는 것, 또한 우리 크리스챤들의 몫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랑이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잘 난체 하고 똑똑한 사람은 많은데, 왜 그렇게 시기와 다툼과 미움으로 가득 찼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서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까?
그것은 ‘러브’라고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날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교회가 파워 있는 교회이겠습니까?
수자가 많고, 재정이 많고,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 교회가 파워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속고 살 때가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우리 서광교회는 파워 있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연약한 교회입니까?
정말입니까? 할렐루야! 우리 서광교회는 어떤 교회도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 서광교회는 ‘사랑으로 하나 된 교회’이기에 파워 있는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런 문제 저런 문제들로 인해 어느 새 사랑이 식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병고치는 은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예언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방언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I am nothing.)...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It profits nothing) ”(2,3절) 하고 결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랑의 성격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주고 또 주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모두가 이기적인 욕심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에릭 프롬은 성숙한 사랑과 성숙하지 못한 사랑의 차이를 이렇게 나눕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정의하는 바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견디느니라!”(4-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시 거저 주는 사랑인 ‘아가페(agape)’는 그 어떤 조건도 내세울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며 단 하나 ‘인내’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현대인들이 왜 이혼을 많이 하는가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맞벌이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때문이다. 경제 파탄 때문이다. 개방주의 물결 때문이다. 법이 오히려 이혼을 부채질 한다....등등 모두 그럴싸 합니다.
그러나 더욱 더 근본 원인은 ‘인내 부족’ 때문에 있다고 봅니다.
서로에게 잘못을 발견했을 때, ‘그래, 이혼하자!’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쓴다는 것입니다.
누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혼 사유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기다려주려고 하지도 않고..... 기분 따라서 이혼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만날 때 완전한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고, ‘모난 사람끼리’ 만나는 만났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격언을 아무데나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저 산위에 있는 큰 바위들을 보십시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맞으면서 닿고 닿아서 그렇게 부드러운 바위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이혼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한 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상대방에 대하여 얼마나 오래 참고 견디어 보았소?”
분명히 사랑은 장난이 아니지 않질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철부지처럼 행동들을 하는지 너무나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랑은 파워입니다. 사랑이 우리의 만남을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만들어 갑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것도 사랑입니다. 용서하겠다는 마음이 앞설 때 제아무리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도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차가운 가슴으로 시비를 가리겠다고 할 때는 더욱 복잡하고 끝이 안 보이는 형태로 문제는 꼬여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모든 문제가 ‘사랑’이면 다 해결될 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끝내기 전에 “너희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고 당부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
우리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 사는 동안에 필수요소입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 주는 ‘신뢰의 끈’이며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소망은 우리의 이상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 주는 비전이며 내일을 향한 인생의 큰 기대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기에 오늘의 고생도 거뜬히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만 되는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에서는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중의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가장 위대함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 믿음도 있고 소망도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그렇게도 위대한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는 능력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온전히 내맡길 수가 있으셨습니다. 그는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위대한 사랑은 인류 전체의 죄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빅 파워!’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나도 살리신 파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능력 있는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심증에 빠져서 ‘콩 나와라 팥 나와라!’는 식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코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맨 날 비리를 파헤치고 끌어내리고 하면 세상을 밝아질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17:9)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써 남의 허물을 덮어주려고 해야 합니다. 사랑의 가슴은 그 자체로도 이미 파워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허물이나 잘못들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좀 더 따스한 눈길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감싸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울어야 할 제목이 있다면 “내 가슴 속에 사랑 없음을 인하여 가슴을 쥐어뜯고 울어야” 합니다! 사랑은 머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시킨다는 말이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