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함께 가는 말씀과 기도

좁은길을 걸으며 2006. 2. 20. 10:20

 

새 봄이 왔네요 이제 다시 한 번 대청소 하고 새롭게 집안을 단장해 보세요 맘이 할결 상쾌할 겁니다.

 

 

             함께 가야 하는 말씀과 기도            2006/02/19/주일/

                     (디모데전서4장1-5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나 ‘경건(헬-유세베이아; 영-godliness)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분이 우리에게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라고 할 때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또는,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에 ‘경건’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의 신앙적인 용어 가운데 ‘경건’이란 말처럼 왜곡되고 애매모호하게 쓰이는 단어도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경건’, 또는 ‘참된 경건’이란 말을 부득이하게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잘못 알고 있는 경건이란 무엇인지를 두 가지 형태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예배의 외형적인 엄숙함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미사를 보면 매우 엄숙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 개신교에서 어떤 교회들은 예배 시간에 웃어도 안 되고, 박수를 쳐서도 안 되고, 그리고 설교 시간에 아멘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것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세상을 도피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마치 수도승처럼 세상을 도피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일들을 세속적인 것이라고 하여 무조건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은 열심히 하는데 집안일과 사회생활은 낙제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 앞장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경건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처사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참된 경건’이란 이렇습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아서 사는 삶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도피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이 세상 풍습과 영합하지도 않으면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참된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 것이니라”(약1:27).


이렇게 보면, 참된 경건이란 거룩한 삶과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이 경건에 이르는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한 과정으로서 필요한 두 가지 훈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를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생활”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은 균형잡힌 신앙으로 바르게 세워지게 되고, 경건의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 당시에 참된 경건의 신앙에서 이탈하게 하는 무서운 사상들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경건주의자들이 교회 안에 파고들었습니다. 교회가 외형화 되고 형식화 되어갈 때, 반드시 잘못된 사상을 가진 자들이 교회를 침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의 신비주의 운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교인들을 점쳐주고 또 몸을 흔들어서 신기한 환상이나 입신을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으려고 하는 자들이 이 근처 교회들 안에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정말 조심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럴 때 오늘 지상의 교회는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지켜가는 진리의 파숫꾼으로 교회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딤전3:15에 보면 교회를 일컬어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면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임과 동시에, ‘진리를 사수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딤전3:16절을 보십시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3:16).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말아야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받은 은혜와 구원의 복음만을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했던 사도 바울은, “크도다 (이것이) 경견의 비밀이여,”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가 의롭게 될 수 있으며, 또 영생을 얻을 수 있으며,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 밖의 어떤 것으로도 다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속임수요, 가짜라는 것을 그는 알고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했고, 디모데에게도 그것만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런 참된 경건의 신앙, 곧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으리라”(1절)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신앙을 죽이는 ‘독약’이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을 일컬어서 ‘양심에 화인 맞은 자’라고 얘기 합니다. 이미 양심을 저버린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단자들의 공동적인 특징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화인’이란 ‘불도장’을 가리킵니다. 당시에 노예들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이마에 부도장을 찍어놔버리면 어디로 가도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기란 여간 쉽지가 않습니다.


그 당시에 에베소교회에 침투하는 이단자들은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혼인하지 말라!”. “고기를 먹지 말고 채식만 하라!” 일종의 금욕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그 당시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경건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그럴싸한 이론인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을 얼마든지 보게 됩니다.

결혼해서 성생활을 하는 것은 ‘영혼을 더럽히는 일’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육식이나 음주를 하면 영혼을 더럽힌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상에 빠지면 ‘참된 경건’은 어디로 다 달아나버리고 오직 ‘금욕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잘못된 신앙과 거짓된 경건에 속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3-5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3-5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만 거룩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생활을 하고 안 하고, 또는 고기를 먹느냐, 채식만 하느냐의 문제의 우리를 결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는 어떤 수단도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불교적 사고를 가져서도 안 됩니다. 여타한 미신적인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오직 복음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수행의 길로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능력이며,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여져 가는 시금석이 됩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 두 가지 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경건은 가장 아름답게 빛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은 연습(discipline)으로 됩니다. 바로 그 수단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매일 정한 시간에 주님과 기도로 교제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매일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는 일, 이것들은 그냥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이 생활이 하루하루의 좋은 습관이 되도록 여러분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건강한 육체를 위해서는 운동습관이 중요하듯이 건강한 신앙, 곧 아름다운 경건을 위해서는 말씀 묵상과 기도를 결코 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경건생활이 습관화 되도록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경건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밥은 굶어도 성경을 봐야 하고, 운동은 안 해도 기도는 해야 할 것입니다.

왜요?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있어서 약속이 주어주는 놀라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은 분리될 수 없다. 기도와 말씀이 함께 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 
기도는 하나님을 구한다. 말씀은 하나님을 밝힌다. 기도로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한다.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
기도로 우리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과 동거한다.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동거하신다. 기도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말씀으로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둘은 함께 갈 때에만 매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는 진리의 지식을 바르게 세워줄 것입니다. 그래서 냉철한 판단력을 줄 것입니다. 악한 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최첨단 무기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타게 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하며, 그 놀라운 은혜들을 체험게 하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담력을 얻게 해 줍니다.

이 둘은 성령의 인도 받는 삶의 지름 길입니다. 이 둘은 우리들을 경건의 목표인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수단입니다.

그 어느 것 한 가지에만 치우치지도 말고 이 둘을 병행하면서 무단히 힘든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둘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동행하면서 나아가는 지름길임을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합시다.

오늘부터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큰 은혜로 더해 주실 것입니다.

“천재와 경건이 세상에 던지는 하나하나는 세상을 바꾼다.”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경입니다. 반대로 적극적인 의미의 경건은 하나님과 사람을 존경하며, 특히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반영하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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