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신앙과 의리

좁은길을 걸으며 2006. 2. 12. 18:02

정월 대보름이네요. 항상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로 사시고 여유있는 모습의 한 해 되세요.

 

                    신앙과 의리                       2006/02/12/주일/

                  (사무엘하9장1-13절)


리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우정이 두터웠던 친구 사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다윗과 요나단을 꼽습니다.

우정에도 어떤 동기(계기)가 있다고 봅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친하게 된 동기는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이 무고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알고 그 목숨을 보호해 주는 일에서 출발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그들 사이의 우정을 두텁게 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그것은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연락(통)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윗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삼상18:1).


다윗과 요나단 사이는 서로 마음이 통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몇 명이나 가지고 있습니까? 특별히 진실한 신앙의 친구를 몇 명이나 두고 있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통하는 그 친구를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루도 서로 연락하지 않고는 못 사는 사이이기에 자주 만나고 자주 연락하고 서로 마음에 있는 얘기를 털아놓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절).

다윗과 요나단은 실제로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이 관계를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관계가 그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너희를 친구라 하였나니....”(요15:15).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바로 우리가 죽어야 할 목숨을 대신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런데 다윗은 너무나 빨리 자기 친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사울과 함께 불레셋과의 전투에 참전을 했다가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평생 마음에 걸렸습니다. ‘생명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을 생각해 내게 되었습니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의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잠27:10).

다윗은 요나단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훗날 왕이 되고 나라가 안정이 되어갈 무렵 제일 먼저 챙겨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요나단이 낳은 아들 므비보셋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자기를 죽이려고 평생 쫓아다니던 사울의 집을 생각하노라면 결코 생각하기조차 싫은 사람들이 사울가(家)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다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입었던 것을 깊이 새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리라!”(삼하9:1).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윗의 멋진 신앙과 의리입니다. 참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은혜를 잊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은혜는 다 까먹어버리고 현실의 어려운 점만을 앞세워 자기를 헌신하는 일에도, 그리고 지난 날 어려웠을 때에 입었던 은혜도 다 망각해 버리고 ‘배신자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영향은 교회 안에까지 파고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실용주의가 무엇입니까? 나쁘게 말하면 ‘이익이 있으면 삼키고 이익이 없으면 뱉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신앙을 배운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리(義理)’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영어에서는 단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도리] justice; (the principle of) righteousness; [의무감] (a sense of) duty; obligation; a debt of gratitude; [신의] faith; fidelity; faithfulness; loyalty; [성실] integrity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말 사전에는 ‘의리’라는 말을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서 마땅히 의리 있는 사람, 즉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의리를 배반하는 사람을 가장 나쁘게 평가합니다. 단테는 그의 서사시 '신곡(神曲)'이라는 작품에서 사람이 범하는 가장 큰 죄는 다름 아닌 '배신'임을 지적하고 있는데, 지옥의 가장 밑자리에 가룟 유다가 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이고, 또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은 30에 자기 스승을 팔아먹은 배신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뵈십시오. 왜 다윗이 참 신앙의 사람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그것을 증명해 주는 성경 구절이 바로 본문 3절 말씀에 나타납니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리라!”(3절).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것인데, 다윗이 지금 교만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친절과 사랑을 베푼다면 그 손길은 누구의 손길을 펼치는 것이겠습니까?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그를 그 권력의 자리에 앉게 해 주셨으므로, 더욱 낮아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자로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생색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뿐입니다.

이런 행동이 바로 ‘신앙의 의리’, 또는 ‘친구의 의리’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집의 남은 자’를 찾았을 때, 사울의 종으로 있었던 시바라 하는 자가 나와서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입니다!”(3절).

다윗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마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다행히도 요나단에게 빚진 그 은혜를 1/10000이라도 깊을 길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때에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세상을 살면서 가슴 벅차오르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그가 어디있느냐?”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4절).

그래서 므비보셋을 데려왔는데, 아마 므비보셋은 다윗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7절)고 하면서 그에게 조상의 밭을 주고 “항상 내 상에 먹을지니라”(7절).

그 당시의 문화 가운데서 ‘밥상을 베푼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스러운 대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시23:5).


그렇습니다. 다윗은 요난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11절).

왕자로서의 대접을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왕의 업무를 생각해 보면 므비보셋을 챙기는 일이 쉽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갈수록 배은망덕(背恩忘德)으로 치닫는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장1-5)고 일러주었습니다. 이렇게 말세에는 자기 이익 추구만을 위하여 사람들이 변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의리)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2:13).

소아시아 일곱교회 가운데 버가모 교회 선도였던 안디바는 아시아에서의 첫 순교가 되었는데, 그는 네로 황제 버금가는 도미시안 황제 때에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고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다가 놋솥에 들어가 서서히 가열해서 태워 죽이는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욕심많은 주인에게 마음 착한 머슴이 있었는데 그는 겨울 준비하려고 나무하러 산에 올라 갔습니다.
주인은 머슴이 얼마나 일하는가 보려고 몰래 따라가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주인 앞에 곰이 나타나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고함지르며 도망가다가 돌 뿌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러자 곰이 달려와 주인을 덮치려고 하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곰이 피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알고보니 근처에 있던 머슴이 주인의 소리를 듣고 잽싸게 달려와 곰의 몸통을 도끼로 후려친 것입니다. 주인은 머슴과 함께  잡은 곰을 메고 마을로 돌아 왔는데  주인이 다음날 곰가죽을 시장에 내다 팔고 돌아와서는  머슴에게 말하기를
"이놈아, 네가 친 도끼자국 때문에 가죽을 비싸게 팔지 못했다" 하며 야단쳤다고 합니다.

주인을 살려 준 은혜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곰 가죽에 도끼자국 난 것을 생각하는 것이 못된 인간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는 “언제 그랬나요?”라는 식이라면 우리 주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다음은, 사람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카르'라는 지방에는 은혜에 보답하는 좋은 풍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 입으면 그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해여 그날 밤 그 집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밤을 새우며 감사 한다고 합니다.  혹시 비가와도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꼬박 비를 맞으며 은혜 베푼 사람의 고마움을 가슴에 새긴다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자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을 사람에게 집단으로 매를 맞거나 쫒겨난다고 합니다 . 우리나라에도 이것을 도입하면.....?


나에게 은혜 베푼 사람'을 생각하며 감사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특히 나에게 신앙적인 은혜를 입혀 준 사람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나를 교회로 이끌어 준 부모나, 친구에게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의리라는 것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강조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지켜나가십시오.

우리 신앙의 매력의 하나가 ‘의리를 지켜 드리는 것’, ‘의리를 배반하지 않고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다윗과 같은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 대하여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목사님에게, 그리고 교우 상화 간에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의리’를 소중히 여긴 만큼 여러분의 존재 가치도 더 존귀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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