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배려

좁은길을 걸으며 2006. 1. 15. 15:38

 

예수님은 생명의 배려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셨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배려(consideration)          2006/01/15/주일/

                      (신명기22장1-12절/로마서14장1-6절)


신의학적인 용어에 ‘아스퍼거 신드롬(Asperger Syndrome)’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종의 장애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 세계 속에만 갇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상대방을 배려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상당한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아스퍼거는 이기적인 성격과는 다릅니다. 보통 이기적인 사람들은 남의 입장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 때문에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만, 아스퍼거는 아예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인구 200-300명당 1명 꼴이 되지 않을까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오히려 매우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그러나 남을 배려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직설적인 말과 행동을 하다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Disorder) 말고도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형태 속에서 모두가 경쟁심 가득 찬 사회로 치닫고 말았다는 느낌에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현실 사회 속에서는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지 경쟁이 치열하지 않는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는 90점이라면 우리는 겨우 66점이고 세계 평균 70점에도 못 미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세상을 답습하며 따라가기 보다는 거꾸로 사는 인생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배려 속에는 1)이해, 2)양보, 3)용서 등의 요소가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절).

연약한 자는 누군가의 배려를 통해서 힘을 얻고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도 때로는 매우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 매우 실망했다!”라고 한다면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들을 항상 배려할 마음이 있을 때 그 온정과 열기 속에서 우리 사회와 가정, 교회가 밝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무엇을 잘못하는 것을 보면 “얘, 너는 등신 같이 그것도 못해? 등치는 소 잡아먹게 커가지고서!” 하면서 그 인격을 깔아 뭉겨버리기도 합니다.

사람이 나이 먹어간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잘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기를 못 먹는 사람은 평생 채식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런 경우 상대방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따뜻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저는 제 아내가 돼지고기를 못 먹기 때문에 정육점에 가면 우리들 먹을 돼지고기 따로, 그리고 쇠고기를 따로 사 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 못 하고서 “당신은 생기다 말았소? 쇠고기 값이 얼마나 비싼지나 아오?” 이런다면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습니까?


우리 사회는 지금 모두가 마음들이 어수선하고 불안한 모습들입니다. 그것은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양극화 문제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한결같이 “살기가 힘들다!” “죽을 지경이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소원은 경제가 잘 풀려서 골고루 혜택을 보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렵고 힘들수록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에 앞장을 서야 되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이 앞장서서 사회적 배려를 창출 해 낼 줄만 안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든지 더 아름답고 밝은 세상으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 신앙들끼리도 서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의 배려가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이 잘 이루져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더 잘 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끼리 싸우는 것은 아군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해 놓고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우리 서광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교회가 도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처음 교회 나온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우리의 눈높이에서 판단하거나 급하게 끌어올리려고 생각하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냥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 해도 큰 맘 먹고 나온 사람인데, “회비 내라, 봉사하라!”는 것보다는 “예배에 빠지지 말고 잘 나오시기만 하라!”고 하면서 질 좋은 서비스, 즉, 일종의 돌봄(Care)이 필요합니다.

일단 복음을 깨닫는 것이 우선이지 무엇을 하는 것이 우선은 아닙니다. 처음 나온 신자에게는 우리 환경에 적음하기까지 여러분들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개울을 건널 때 필요한 것이 징검다리입니다. 그 개울만 건너고 나면 더 이상 징검다리는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책 찾는 것도 도와주고 때로는 그 형제를 위해서 대신 주일헌금도 내주고 감사헌금도 내 줄 만큼 베풀어야 합니다.


왜 서광교회는 예배당이 1층에 있는지 아는 분이 계십니까? 사실은 장애인 노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나아가서 목사인 나는 여러분들에게 모든 것을 배려하려고 하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배려한다고 했지만, 목사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목사의 의중에는 전혀 없었던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아무개만 감싸고 돈다!” 무슨 일에 나서기 싫은 사람을 시키면 “목사님은 매날 나만 시킨다고...”, 그러나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은 “목사님은 나는  잘 안 시키고 아무개만 시킨다....” 어느 장단에 춤 춰야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목사와 접촉할 기회가 많은 성도는 아무래도 목사와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목사님에 대한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목사님은 얼마나 외로울까? 이런 것 생각해 봤나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3절).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는 항상 자기위주로 모든 것을 주장하고 평가하려는 곳으로 갔습니다.

“다 한 가지로 치우쳤으며”(롬3:12).

그래서 나온 말이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판단은 그 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남이 주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다”(4절).

그런데 우리가 주인 행세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배려입니다.

배려는 그 사람의 인격이 성숙해 있다는 증표요, 또한 그가 살아 온 인생의 향기이며 미덕입니다.

인격이 된 사람은 자기가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 때. 또는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이 들 때에라도 그것까지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말이 쉽지 때로는 죽기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 번 갈 때까지 가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우리들의 몫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제아무리 속상한 문제가 있더라도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그것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에 처형하는 원수들 앞에서도 배려하는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이놈들, 내가 너희 놈들의 원수를 꼭 갚고야 말거야! 두고 봐 천벌을 받나 안 받나 두고 봐라!”

이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저희가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눅23;3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양들을 위해 기꺼이 ‘생명의 배려로써’ 우리 죄인들을 위해 희생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이해 문제에 얽혀서 사소한 일에 목숨이 달려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양보와 배려를 하지 모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상복씨가 지음 [배려]라는 책을 보면, “배려는 선택이 아니라, 공존의 절대 원칙이다. 사람은 ‘능력’이 아니라 ‘배려’로 자신을 지키며, 사회는 ‘경쟁’이 아니라 ‘배려’로 유지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창13:9).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런 배려 속에서 하나님은 누구를 더 복되게 하셨습니까?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양보를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나가서는 호인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집에 들어오면 박박 긁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큰 것은 그냥 잘 넘어가면서도 작은 것에 대한 배려를 잘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신앙적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기독교를 포기하고 불교를 믿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문제이고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야보나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물질적인 문제라면,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원래 배려는 마음의 여유에서 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일 수 있기 때문에 성숙에 이르는 신앙이 아니면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항상 더 강한 쪽, 더 가진 쪽이 배려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면 정신적인 문제이든, 영적인 문제이든 더 강한 쪽, 즉 성숙한 쪽이 배려를 해야만 합니다.

남한과 북한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어느 쪽이 더 배려하는 마음을 많이 가져야 하겠습니까?

역시 남한입니다. 북한 그런 여유를 가지고 우리를 대하지 않기 때문에 은근히 화가 날 때도 있고 이제 그만 도와주자는 목소리도 큽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배려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럴 때, 죽어가는 생명도 건질 수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 중이던 조지 애틀리라는 영국 젊은이가, 어느 날 맹수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실탄이 든 다연발 자동 장총을 들고 지역탐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숙소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다른 부족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순간 그는 총을 쏴 목숨을 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았습니다.

총을 쏴 원주민이 피해를 입는다면 선교와 헌신은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그는 정지된 총을 옆에 놓고 조용히 원주민들의 화살과 창을 맞았습니다. 마지막 숨이 끊기는 통증을 느끼며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의 주검과 총을 받아든 추장은 그의 고귀한 뜻을 알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우리를 살린 이분의 뜻을 받들자.” 그 이후 이 마을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에틀리 선교사는 정당방위로써 그들을 쏴 죽이고 자신을 얼마든지 살아나올 수가 있었지만 그는 주님의 위하여, 그들을 위하여 ‘생명의 배려’로써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 어떤 문제로도 이웃이나, 교우들을 배려 못할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먼저 믿는 성도들은 많은 사람에 대해서, 특히 약한 사람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우리가 즐겁게 사는 비결이 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비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배려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마음을 넓힙시다.

“고린도인(서광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안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6:11-13).


이럴 때일수록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다면 이 사회와 한국교회는 건강해질 뿐 아니라, 행복해지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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