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은총을 크게 입은 자여

좁은길을 걸으며 2005. 12. 19. 09:35

 

요즘은 그래도 귤이 최고지요? 감귤처럼 좋은 과일이 어디겠어요!! 하나씩 까먹다 보면 어느새 반상자는 금방이죠 ㅎㅎㅎ

 

                 은총을 크게 입은 여인                2005/12/18/주일

                      (누가복음1장26-38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시 여러분은 누구에겐가 남달리 귀여움과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을 두 글자로 ‘총애(寵愛)’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열 두 아들 중에 부모로부터 남 달리 총애를 받았지만, 오히려 그 형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고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애굽 보디발의 집에서도 총애를 받게 되어 가정 총무까지 되었지만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하게 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도 총애를 받게 되어 모든 사무적인 일을 담당하게 되었고, 결국 그 나라 왕 바로에게까지도, 온 국민에게도 총애를 얻어 총리대신이 될만큼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령 우리들도 인생을 살면서 내가 속한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총애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런 면에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다 총애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진정한 총애라는 것은 사람으로부터의 총애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의 총애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 박수갈채를 받는 사람보다도 이 추운 겨울에 주의 사랑으로 따뜻한 밥에 된장국 한 그릇 함께 나누는 사랑 나눌 수 있는 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주의 더욱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총애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한 지혜로운 로마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의 선물보다는 그의 총애를 받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존경할 만하고 이해심이 깊은 황제였다. 따라서 그의 총애 역시 존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선물은 받을 때뿐이지만, 총애에는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키루스라는 사람은 그의 친구 중 하나에게는 V자형 금메달을 선물해 주고, 다른 하나에게는 키스(kiss)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받은 사람은 키스를 받은 사람을 부러워했습니다. 그것은 키스를 받는다는 것은 ‘큰 총애를 나타내는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한 주간 앞두고 하나님께로부터 총애를 받은 한 여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계획해 오신 메시야를 한 여인에게 주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누가 그런 일에 당첨될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으면서 요셉이라는 총각과 정혼을 한 처녀 마리아에게 이 놀라운 소식이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여자의 난자(卵子)를 이용해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탄생시키려고 만세 전부터 예정하신 그리스도를 임신케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 부름 자체가 그녀에게는 큰 은총의 사건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남으로써 하나님께 총애를 받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주교에서는 오늘날까지 마리아를 ‘아베 마리아’라고 하면서 그녀를 추앙하고 있지만, 오히려 성경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는 표현 외에 다른 면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마리아의 행위를 너무나 앞세우다 보니까 ‘성모 무죄설’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4:6)는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는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된 것은 그의 어떤 행위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값도 없이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밖의 어떤 인간의 행위 면을 앞세운다면 오히려 그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은총과 총애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또는 ‘하나님의 호의’, 그리고 ‘하나님의 어여삐 여기심에서 오는 도움’이라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이보다 앞서지 못합니다. 에스키모인들은 ‘은총’이라는 낱말에 대해 항상 ‘어여삐 여기심에서 오는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감사함으로 받고 순종하는 것만이 도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아주 귀하게 쓰임을 받았지만 항상 겸손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15:10).


이렇게 요셉이라는 한 동네 총각과 정혼한 상태에 있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28절).

바로 여기서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할 때에 이 ‘은혜를 받은 자’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케카리토토메테’라는 말인데, ‘호의를 받은 자’, 또는 ‘총애를 입은 자(highly favored)’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평안할지어다!’라는 말도 ‘카리레’라는 말로 ‘축하하다(greetings!)’, ‘기뻐하다!’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합쳐놓으면 “고귀하게 하나님의 호의를 입은 여자야, 축하하노라!”는 뜻이 됩니다.

“바로 그 주님이 너와 함께하시도다!”라고 할 때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당황하면서 속으로 하는 말이 “이런 인사가 어찌된 일일까!”(29절)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30절)

“네가 하나님께 특별한 총애를 받았느니라!”


그녀가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이 살아왔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평소의 경건한 삶, 도적적인 순결을 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율법준수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의’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지 그녀가 무죄하신 독생자를 임신하기 위해서는 아직 남자를 가까이 한 일이 없는 처녀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면에서 도덕적 순결이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이런 영광을 차지한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어느 임금이 길가는 성자를 불러 자기 앞에 오게 했습니다.

이 때 임금의 시종이 그 성자의 짐을 내려주고 성자를 임금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임금이 성자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하나님이 그대를 빛나게 하시고 그대가 하나님 가까이에 사는 것은 어찜인가?”

이 때 성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천한 백성 중의 하나인 저를 아는체 하셨습니다.

또한 짐을 내려주게 하고 저를 당신 앞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제게 영광을 베푸시고 저를 당신 곁에 앉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무슨 공력이나 권리가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임금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 성자는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그분은 사랑의 줄로 우리 마음, 영혼, 그리고 생각까지도 당신께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슨 공력이나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저 역시 이런 신분으로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만이 우리들의 부러움이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녀대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 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1:42)는 말씀은 옳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마리아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값없이 얻은 복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어여삐여김을 받은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또한 은총을 크게 입은 자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에게 비교해서 나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잘못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행복하고 은총을 크게 입은 사람들입니까? 무엇을 근거로 들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감탄한 나머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눅11:27)라고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8)고 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나 우리나 다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자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인간(마리아를 포함해서)은 다 진노의 자녀였는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 은총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고....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엡2:8; 3:12) 놀라운 은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할 수 일이라는 것은 그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송뿐입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1절)하면서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할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33절)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마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34절).


마리아는 지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난 셈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라고 한 것은 오늘날처럼 도덕적으로 해의해진 세상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만한  일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어떻게 해서 임신이 되는 것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배아 줄기 세포 알지? 내가 너에게 그것을 기증받아서 아기를 만들려고 해!”

이런 말과는 사뭇 다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35절).


마치 성령이 씨앗이나 된 것처럼 ‘성령으로 잉태될 것’을 말씀하면서 “그 능력이 너를 덮으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오늘날 배아 줄기세포 문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앞서가는 기술이 하나님의 생명공학입니다.


오늘의 과학자들의 노력!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을 만큼 선한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지금 인생들이 해 아래서 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황우석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성과가 어디까지가 사실이냐를 묻기 전에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구와 노력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류는 지금 어떤 과학적인 노력을 통해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질병을 퇴치하려는 노력과 장애우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일들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들이라면 인류는 스스로 함정을 파는 셈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인류는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때만이 희망이 있습니다.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죄의 문제’입니다.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분만이 인류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들을 바르게 해결해 주는 해결사이십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의 지식과 정보, 그리고 과학의 성과물들, 예술품까지라도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될 것이고 그것은 심판 날에 불에 타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은 엄청납니다.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연구에 배아복제성공이 희망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수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녀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아멘’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시심이 없느니라.”(37절)>

여자는 대답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

얼마나 멋집니까?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간결한 한 마디의 대답이 값집니다. 이 값진 대담이 하나님 마음을  시원케 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이 말씀한 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할 때에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확실하다고 믿어진 바엔 “아멘 그렇게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이번 성탄절에 더욱 가득히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우리들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맡기시더라도 순종하겠노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멋입니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아노라

언제나 주님만을 찬양하며 따라가리니

시험을 당할 때도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 하여 주신다


주님의 뜻하신바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사랑과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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