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위에 세운 7층 탑 Tháp 7 tầng trên đức tin
- 베드로후서 1장 1-11절 -
- 들어가는 말 -
여러분은 지금 믿음을 가졌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을 가졌는가?
그렇다면 그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 Sự tin tưởng quý báu và có giá trị'이다. 보배란 '아주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 Rất quý và quan trọng'을 뜻한다.
이 믿음을 굳게 지켜나간다면 이 세상에서 파워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은 물론 하늘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베드로후서 1장 11절-
믿음이란 아주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믿음은 은행 신용카드보다 더 소중한 하늘 신용카드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 precious faith'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렇게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또한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 약속 가운데서 새새명을 얻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명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우리는 항상 긴장의 끈을 풀지 말고 깨어있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바울도, 베드로도, 요한도 동일하게 이것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린도 후서 7장 1절-
오늘 성경에서 베드로 사도 역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후서 1장 4절- 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원받았으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은 성경 그 어느 곳에도 없다. 오히려 더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신의 성품 The divine nature'을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또는 예수님의 성품 Jesus' character에 강조점을 두고 싶다.
다음은 어떤 방식으로 크리스천의 성품이 나타나냐 하는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가진 이 보배로운 믿음이란 반석 위에 어떠한 탑을 쌓아가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믿음 위에 세운 7층 탑! 이것에 주목하며 우리도 꼭 이렇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노력하며 살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후서 1장 5-7절-
'더욱 힘써'라는 말은 '성심껏 applying all diligence'이란 말과 통한다. 이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우리가 가진 믿음생활 역시 날마다 아름다운 노력을 견줘 나가야 한다. 전심전력 고군분투 專心專力 孤軍奮鬪해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생각 없는 사람에서 생각 깊은 사람으로, 대충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매우 철저하고도 열심 있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7층 탑을 쌓아보자.
기초석은 믿음이다.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그 믿음 위에 아름다운 성품을 쌓아보자.
1. 믿음에 덕을
2. 덕에 지식을
3. 지식에 절제를
4. 절제에 인내를
5. 인내에 경건을
6. 경건에 형제우애를
7. 형제 우애에 사랑을
1. 믿음에 덕을 쌓자
'덕 Moral exellence'이란 무엇일까? 덕은 '도덕道德,Morality'과 가까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공자, 도가의 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십계명에서 법만 배운 게 아니라 '덕德'을 배웠다.
우리는 십계명을 기초로 한 도덕과 윤리를 강조해야 한다. 그렇다고 율법주의자가 되라는 얘기로 들으면 오산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덕'이 따라와야 한다.
왜? 구약 사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성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출애굽 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맞다. 그러면 구원받은 백성이면 그것으로 '끝'인가? 결코 아니올시다.
'덕스런 삶'을 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율법을 즐거워하면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이미 출애굽 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속 효능이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예수께서 이 덕을 세우셨다. 우리도 예수의 덕을 선전하는 사람으로서 먼저 자신을 세속에 물들이지 아니하고 '덕'된 삶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2. 덕에 지식을 쌓자
'덕'을 강조한 만큼이나 '지식 kiến thức'도 중요하다. 어떤 지식이냐고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지식은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질이 중요하다. "무엇을 아느냐? 누구를 아느냐? Bạn biết gì? Bạn biết ai?"가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지식의 용량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골머리 아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머릿속에 정작 채워야 할 아름다운 지식은 없고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세상 지식 말이다. 고대에 율법 지식뿐만 아니라 철학 지식까지도 해박했던 바울은 말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지식은 '주 예수를 더 바르게 알고 깊이 아는 자식'이다. 당신은 이것을 위해서 노력을 하는가?
'십자가의 도'를 중심 해서 성경 전반을 바르게 아는 지식으로 채워라. 이 얼마나 멋진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나(하나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장 3,6절-
베드로 서신의 마지막 부탁이 이것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베드로후서 3장 18절-
3. 지식에 절제를 쌓자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도 '절제tự kiểm soát'의 미美가 없으면 무용하다. 다시 말해서 '덕'과 '지식'도 '절제' 속에서 더 빛이 난다.
"난 체 하지 말라." 그것은 당신의 몫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몫이다.
가장 중요한 '절제'의 미는 바로 당신의 입이다. '말의 절제'가 중요하다. 그리고 '행동의 절제'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생각의 절제'에 비롯된다.
상대방이 조금 틀린 말 했다고 핀잔을 주지 마라. 나에게도 실수가 많다. 그리고 조금 화가 난다고 쉽게 화내지 말라.
욕심이 난다고 빼앗지 마라. 먹고 싶다고 막 먹지 말라. 가고 싶다고 아무 데나 가지 마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정 32절-
그러니까 이것은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적절한 말을 하라. 행동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말 밤에 보여준 예수의 입의 말, 행동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절제가 묻어 나오는지를 살펴보면 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야고보서 2장 1절-
그러니까 아름다운 인품을 지닌 사람은 자기 생각, 즉 마음을 잘 다스린다.
4. 절제에 인내를 쌓자
우리의 삶 가운데 절제와 인내는 쌍둥이처럼 따라다녀야 한다. 항상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보면 절제를 못해서이다.
말을 함부로 한다. 행동에 조심성이 부족하다. 알고 보면 '인내kiên nhẫn'가 부족해서 그렇다.
인내 patience란 , 단순히 '참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줄 안다.
인내란 가장 힘든 것을 참아내는 끈기이며, 심한 수모와 박해를 겪는다 해도 끝까지 견뎌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내에는 항상 고통, 눈물이 따라다니며 때로는 수치심을 동반할 때도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셨으며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분"이시다.
우리는 조급할 때가 많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어도 그것을 참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을 때가 많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칼로 쳤을 때 하신 말씀이 있다. 베드로의 심정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까지 참으라." -누가복음 22장 51절-
우리는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이다. 끝까지 인내하기를 힘쓰야 한다.
믿음을 강조했던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히브리서 11장) 얘기를 다 마친 후에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브리서 12장 1절-
5. 인내에 경건을 쌓자
성경을 이해할 때 가장 어려운 뜻을 가진 말씀이 '경건 εὐσέβεια, cung kinh'이다. 이 말은 '경의를 표하다 + 예배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고 예배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교우들끼리나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이 나와 있다. 우리끼리도, 세상 사람들에게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말과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예절도 없고 막말을 하고 버릇없이 군다면 얼마나 난처한 일인가!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삼가 더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끼리도 상대방을 깍듯이 대해야 한다. 어떻게요? '왕처럼'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왕처럼 대우해 주셨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지고 뽐내고 거만하게 행하라고 주신 은혜인가? 그렇지 않다. 더 조심스럽게, 더 겸손하게, 더 예의 바르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서 1장 26절-
경건의 모양만 있으면 안 된다. 무늬만 크리스천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그냥 주일에 교회만 왔다리 갔다리 하는 크리스천이 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엄하게 경고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장 5절-
예배 후에 밖에서의 우리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다운 향기를 날리며 살아가야 한다.
6. 경건에 형제우애를 쌓자
우리가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를 힘써야 한다. 거기다가 또 필요한 것이다.
어디 가나 '형제 우애 Brotherly kindness, lòng tốt của anh em'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가족이건, 교회이건, 또는 사회에서 형제자매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늘 이것을 망각하고 살 때가 많다.
우리는 '형제자매의 공동체' 안에 살고 있다. 그냥 주신 것이 아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돕고, 서로 우애하며 살라고 주신 공동체이다.
그런데 마귀는 꼭 여기서 장난질을 한다. 서로 갈등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게 만든다. 우리는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형제 우애를 말하기 전에 모든 사람을 대하여 '친절'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 세상이 그런가! 마치 서로 못 잡아먹어서 한이 맺힌 사람들처럼 산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조금만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면 일절 양보가 없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이렇게 살면 지옥이나 뭐나 다를까!
우리는 하루하루 천국을 살아야 한다. 바로 형제 우애를 통해서 말이다. 우리는 지옥의 자식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3장 10절-
마귀는 처음부터 가인으로 하여금 아우 아벨을 죽이게 만들었다.
우리는 형제 우애를 밥먹듯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시킬 수가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이 안 된다.
7.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자
위에 있는 모든 것, 즉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가 '사랑'으로써 가능하다.
성경 전체의 핵심은 '헤세드 חֶסֶד' , 즉 '사랑 ἔλεος'이다.
우리는 사랑의 물뿌리개로 사랑을 공급해야 한다.
그러면 이 모든 덕목의 것들이 아름답게 자라고 꽃이 필 것이다. 층층마다 다채로운 꽃이 바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불쌍여겨주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로 성경은 '긍휼'이란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야고보서 2장 13절-
옛날에 나에게 잘못했던 것, 서운했던 것만 우려먹고 살면 안 된다. 잘못했을지라도, 미울지라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 장 7절-
- 나가는 말-
우리가 이렇게 탑을 쌓으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아, 멋있다!"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생각난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이 간단한 메시지는 산상수훈의 요약판이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읽은 소감이 있다. "아, 멋있다!" "아, 정말 감동이다!"
우리가 산상수훈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있듯이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 역시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크리스천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 해도 우리는 아직 미완성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해야 할 노력이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예수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여러분이 진짜 예수를 닮는다면 어떤 사람들이 다가와서 "나는 당신이 예수라고 생각했어요."라고 할 것이다.
무론 그 말 앞에 더욱 겸손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세상 사람들의 도덕적 기준에도 못 미친다면 이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에 "당신이 정말 크리스천입니까?" 물어봐야 한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믿음이 없는 행함이 죽은 것이고 행위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22절-
이렇게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힘써서 노력을 해야 한다. 아니 성령께 부탁하며 기도해야 한다.
"오, 성령이시여, 내 맘을 강하게 사로잡아 주시고 완악하고 교만한 맘을 제거하여 주세요. 나의 옛 자아를 십자가 밑에 장사 지내게 하시고 모든 죄, 모든 악은 성령의 불로 소멸하여 주세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세요."
우리가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지 않으면 어느새 옛사람과 옛 성품이 드러나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니 만큼 결코 안심하지 말고 하루하루 기도하고 말씀을 되새기면서 예수 닮기를 갈망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결코 실족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베드로후서 1장 10절-
과거는 과거다. 과거만 한탄하는 자는 바보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용기를 얻어 담대하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보배로운 믿음 위에 세운 7층 탑은 '사랑 탑'으로 빛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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