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빚쟁이 Debtor

좁은길을 걸으며 2021. 4. 10. 14:04

빚쟁이 Con nợ

로마서 1장 8-17절

 

 

- 들어가는 말 - 

 

나는 빚을 졌다. 나는 빚쟁이이다. 평생 갚으려 해도 못 갚을 빚을 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현명하게 빚을 감당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누구나 태어난 후로 빚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돈 빚 말이다. 빚을 지게 되면 마음에 부담을 갖는다.

그러니까 빚쟁이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나는 돈 빚에 시달려 본 경험이 없다. 나는 남에게 돈꾸는 건 안 하기로 했다. 그래서 솔직히 빚쟁이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내 주변에는 빚 갚기 위해서 평생 노동하는 사람도 있고 빚 갚기 위해 강도 짓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갚을 능력이 없어 집과 토지를 은행에서 경매에 붙여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내 빚을 대신 갚아줄 사람이 있다면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그런데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빚에서의 해방 또는 자유!!!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는데 하루 아침에 빚이 청산이 되었다니...!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빚쟁이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빚이 있다.

마귀는 인간에게 죄의 굴레 씌워 질질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다.

罪는 인류가 안고 있는 큰 빚덩어리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인간들은 매우 자유로운 것처럼 날뛰며 살아간다.

지옥으로 끌려가면서도 감각을 잃어버린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함정에서 벗어났다. 바로 예수를 만났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죄에서의 구원; Salvation from sin', 그것은 '죄의 빚에서의 자유 ; Freedom from the debt of sin'를 뜻한다.

구원받지 못한 인류는 아직도 여전히 '죄의 무거운 빚덩어리'를 지고 허덕이며 살고 있다.

우리는 이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행복한 인생이 되었다.

그래서 찬송하며 감사하며 하루하루 살동안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빚을 졌다. 그 빚은 예전과 다른 빚이다. 그러면 이게 뭘까?

 

 

1. 우리는 예수께 빚졌다

2. 우리는 모두에게 빚졌다

3. 전도로 빚을 갚자

 

 

1. 우리는 예수께 빚졌다

 

우리가 예수께 빚을 졌다. 그것이 사실일까!  사실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 말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Atonement/ Redemption'하셨다. 이 의미는 너무나 크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 그런데 예수가 대신 죽었다.

이것을 '대속의 죽음;Death instead, Death of the ransom'이라고 한다.

우리가 죄의 노예로 팔렸었는데 우리를 그 노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대신 '몸 값을 치른 죽음; The Death of the ransom'이 있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우리는 '예수께 빚진 자'이다.

우리는 예수께 빚을 졌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도 그 사랑을 하나도 안 받은 자처럼 감사와 찬송을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자들이 많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편 116편 12~ 14절 말씀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편 116편 13절-

십자가가 아니면 영원 형벌 받아야 할 우리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방심하는 동안 그 사랑에 대한 감격은 온 데 간데없고 늘 남의 허물만 보이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거기에 미쳐서 복음에 귀를 막아버린 사람들이 많다.

 

바울은 늘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이란 말을 그의 서신서 가장 앞에 표현했을까!

이유가 있다. 구약에는 종살이를 하다가 7년이면 '해방'이 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주인이 너무 좋아서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출애굽기 22장 1절- 고 하면 그 귀를 뚫어 증거로 삼고 영원히 종 되는 경우가 있었다. 

주인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컸으면 자발적으로 노예 생활을 계속하겠노라고 그렇게 귀 뚫린 종의 자리까지 가겠는가!

그런 바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아니다.

곧 바울이 그렇게 했다. 그는 복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복음의 감격이란 싸구려 물건이 아니다. 올림픽 게임에서받은 금메달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구원을 우리가 갚없이 받았다.

우리는 그 사랑에 탄복해서 스스로 평생 그리스도의 종의 살만한 충만한 가치가 있다.

베드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를 세 번이 모른다고 했다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오셨을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물으셨을 때 그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헌신의 삶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 가서 순교를 당했다.

 

 

2. 우리는 모두에게 빚졌다

 

바울은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장 14절-

그 빚진 대상을 밝히고 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장 14절-

언제 어디서 그들에게 빚진 일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어떤 신새를 졌단 말인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던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사실은 우리가 빚진 자 된 것은 주 예수께 빚진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마치 저들에게 빚진 심정을 가지게 되었다.

자, 이것은 다른 게 아니라 '사랑의 빚'이다. 예수 사랑을 먼저 받는 바울, 예수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사랑을 아직 모르는 자에게 가서 이 사람을 전해야 할 의무를 가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되었다.

우리는 저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빚졌다. "저 아이를 낳아놓고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또한 풍요하게 해 주지도 못했다. 따라서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렇게 말할 때 부모는 사랑의 빚을 진 것처럼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곳에 와서 학생들을 바라볼 때 바로 이같은 심정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베트남인들에게 빚진 자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이유는, 내가 먼저 예수의 사랑을 입었고 그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바울이 가르친 교훈을 생각해 본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로마서 13장 8절-

나는 예수 사랑을 받았다. 나도 누구에겐가 전도를 받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누구에겐가 찾아가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괴롭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지로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그러면 어떻게 이 빚을 갚을 것인가?

나는 빚졌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지금 빚갚으려고 여기에 와 있다. 여기에 약 20만 명이 비즈니스를 위해서 와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

나는 그냥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복음 10장 8절- 라는 말씀에 충실하기를 원한다.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나를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기도로, 은혜로 후원해 주었다.

 

나는 이 사랑의 빚을 갚을 길이 없다.

그러나 갚을 길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 즉 "여기에 있는 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고 싶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이들을 알고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와 보니까 "아, 하나님께서 보내주셨구나!" "아, 하나님께서 나보다 앞서 여기에 와 계셨구나!" 이렇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고서 나는 여기에서 맺어주신 사람들과 하나되어 살고 있다.

나는 내 인생 동안 또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직접 낳은 자녀들과 똑같은 영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가야 한다.

그 사랑에 못이겨 '스스로 종 된 삶' 그 자체로 더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들의 영혼이 없으면 나는 못 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

곧 이 길에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길을 가리. 이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www.youtube.com/watch?v=JGqpzdVPaak

 

 

 

3. 전도로 빚을 갚자

 

이제 나는 알았다. 나는 빚쟁이이다.

나는 예수님께 신세를 너무 크게 졌다. 이건 무엇으로 보답할꼬! 

그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셨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전에 나를 위해서 말이다. 그가 대제사장의 뜰과 빌라도 같은 천한 자들에게 멸시와 천대 조롱을 받으며 뜬 눈으로 밤을 보내셨다.

이튿날 아침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수없이 자빠지시고 그때마다 채찍에 맞아 온 몸이 갈기갈기 찢히시며 피투성이가 되셨다.

십자가에 "텅텅!" 대못을 박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는가!

십자가에 꼬박 6시간을 매달려 계시는 동안 얼마나 괴롭고 힘드셨으면 " 제 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장 34절-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은 "내가 당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내 주님께서 당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으로 전파하라." -마가복음 16장 15절-

바울은 예수를 박해하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때서야 하나님께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빚진 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사도행전 9장 15,16절-

이로 인해 바울은 관심의 초점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로마서 1장 10절-

 

우리가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 헌신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서 1장 5,6절-

바울은 알고 있었다. 자신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로마에서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빚진 자니라."라고 할 때에 "우리 모두는 빚진 자이다."라는 말도 맞다.

그 빚은 더 이상 죄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죄의 빚'이 아니라 '사랑의 빚' 즉, 예수께 빚진 우리들이다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빚을 갚기 위한 노력으로써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복음 전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장 15절-

언젠가는 로마에 갈 꿈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꿈을 꾸며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그 꿈을 이루었다. 사도행전 끝부분은 바울이 포송 줄에 묶인 채로 로마에 도착하게 되고 잠시 자유한 몸이 되어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의 빚은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

이제 우리 가슴속에는 '예수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인간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그 희생이 사랑으로 더러 나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 사랑이 담긴 희생 앞에서 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께 돌아올 것이다.

 

 

 

- 나가는 말 -

 

나는 빚진 자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빚쟁이다. 죄악의 빚을 탕감받은 사랑의 빚쟁이이다.

"주 예수께 빚진 것이 한 없건만 나 주 위해 드린 것은 참 적으니

내 천한 몸 이 생명을 받으소서!" - 찬송가 317장 3절 -

www.youtube.com/watch?v=mI5RNSW5fDs

우리는 하루하루를 주 예수께 빚진 자라는 심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주님께 드리는 헌신이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사랑에 못 이겨 저 죽어 가는 영혼들을 볼 때 '빚진 자'라는 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것은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부득불 해야만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너무나 안일하다. 내가 그렇다. 다른 사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나는 다시 분발하기를 원한다. 너무 안일하고 게으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복음 전도를 방해할 수 없다.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이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효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복음을 들고 가서 전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