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성장 과정 Jesus' growth process ; Quá trình trưởng thành của Chúa Giê-xu
-누가복음 2장 41-52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답게 성장해야 한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그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하겠지만 또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의 인격을 닮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장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배우며 자라느냐에 따라서 그 인격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성육신하신 이후로 우리와 같은 성장과정을 거치셨다.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애굽으로 피신하셨다가 그 부모에 의해서 나사렛 동네에서 서른 살 때까지 사셨다.
추측이 가능한 것은 이렇다.
그는 나사렛 동네에서 부모의 애정을 받으면서 보통 아이들처럼 자라셨을 것이다.
수재난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신 것 아니고 랍비학교를 다니신 것도 아니다.
그는 그 동네와 이웃 마을 사람들과도 관계를 가지고 서로 교제하며 어린이 때는 동네 어린이들과 뛰어놀기도 하셨을 것이다.
특별한 사람처럼 혼자 무엇을 연구하거나 유별난 생활을 하려고 하시지도 않으시고 그냥 좋은 이웃이 되어 보통사람으로의 인생 과정을 겪으시며 사셨다.
가난한 목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호의호식하거나 더 좋은 옷을 입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가 가장 잘 하실 수 있었던 일은 역시 목수가 아니었을까!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마태복음 13장 55절-
그런데 형제도 넷이나 더 생겨났다. 그래서 그는 동생들을 챙겨주기도 하고 또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식사도 함께 하며 잠도 같이 자며 고락을 나눴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같은 것은 침묵하고 있으며 짤막하게 '목수의 아들', 그리고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장과정에서 가장 특이한 것 몇 가지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의 오신 목적이 목수의 일도 아니며 형제가 몇 명이 있었느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목적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것과 인류 구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안 그러면 시시콜콜 다 다룬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ό καιρός ; 구속사적 시간)'적 시간에 모든 것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그렇다. 내가 책을 쓴다고 해도 그것은 책을 쓰는 목적에 따라서 그 부분에 모든 포크스를 둘 것이다.
누가복음은 사복음서 가운데서도 가장 자상하게 예수의 나신 과정과 성장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 예수'에 좀 더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내용 속에서도 우리는 배울 것이 있다.
1.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렀다
자녀는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다. 자, 임신 해서 열 달을 조심하다고 아기를 낳는다. 그리고 젖을 먹이고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위생과 돌봄의 시간을 갖는다.
성장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때를 따라서 음식을 챙겨 먹여야 하고 예절과 말을 가르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유치원에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아이의 개성과 특기를 살려주려고 음악 교육, 영어교육, 영재학습 등을 시킨다. 행여나 친구들과 무슨 일이 있을까 신경 써야 하고 다른 애들보다 뒤처질까 봐 신경을 쓴다.
그래서 기를 꺽지 말아야 한다며 아이를 황제처럼 떠받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성장할 때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뭔가!
내 눈으로 볼 때는 차이가 없다.
오히려 인간성에 있어서는 더 후퇴되었다가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식은 더 나아졌지만 지혜가 더 많아진 것도 아니다. 키는 우리 때보다 더 커졌지만 독립심에 있어서나 강인한 의지나 끈기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과학기술의 혜택으로 지난 날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시설과 환경에서 자라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현대문화의 혜택을 넉넉히 받아야 자녀들이 바르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무신론적인 환경에서 세상 지식교육만 받아놓으니까 잔머리 굴리는 것만 배워서 어른이 되면 공허해지니까 죄악의 큰 늪에 빠져드는 것을 본다.
그러니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자라야 한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자와 맛보지 못한 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예수의 성장 과정이 그랬다. 예수는 당시로 봐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성장했다.
오늘날이니까 그렇지만 옛날로 치면 천민 목수쟁이의 아들이었다.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난 유태영박사도 머슴의 아들이었다. 그 역시도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야단도 맞았다.
그러나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렀다.
희한하다고 할 만큼 임실에서 송원대학교 총장 정창덕 박사도 나왔다. 그는 가난해서 학교를 못 가게 되었을 때 오직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 맛 본 경험으로 인해 꿈을 가꿀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거기서 텃밭을 일구며 목수의 일을 도우며 목수 예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겉 보기에는 똑같이 보였을라도 내면 세계는 달랐다. 충분히, 충만하게 구속 사역을 준비하는 과정에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예수에게서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4절-
2. 하나님의 지혜를 입으셨다
예수는 보통 사람이었다. 입을 굳게 평상시에 명랑하게 뛰어 놀기도 하시고 보모가 시키는 일에 수종을 들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누가복음 2장 51절-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오신 이상에는 '인간의 도리'를 다 하셨다.
티를 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겸손하시고 온전한 순종으로 늘 부모를 도와드렸다.
아무튼 공생애의 3년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열두 살 때의 일이다. 예수께서 유월절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에 따라가셨다.
구약의 절기를 지키는 것, 왜 이런 절기가 있는지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는 것도 잘 아시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누구에게도 더러내지 않으시고 공생애를 기다리셨다.
유월절 지키러 가는 길에는 여러 친족들도 많이 있었다. 그 절기를 다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서 난리가 났다.
예수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는 예수를 찾았지만 친족들 사이에서도 발견하지 못하자 다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흘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랍비들과 앉아서 토론을 벌이는데 너무나 놀랬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장 46, 47절-
그렇다. 어쩌면 이런 과정도 하나님은 다 준비과정에 있어서 한 프로그램에 포함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많이 배워야 지혜가 뛰어난다고 생각만 하면 오히려 더 어리석은 자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해서 살아야 할 인생이다.
"여화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장 7절-
학교에서 지식 교육을 많이 배웠어도 얼마나 지혜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자들이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을 읽고서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사리의 분별'이 바르다.
혹시 세상에서 많이 배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입어야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가 있다.
안 그러면 잔버리만 굴리다가 나중에는 큰 봉변을 당하거나 망신을 당하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성경 말씀은 열기만 하면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여호와의 율법은 온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편 19편 7절-
우리는 육신만 가진 인생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 밝아져야 인생이 밝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고 그 성경 속에서 보화를 발견해야 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지혜'로 인생을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에게는 항상 '성령의 지혜'가 머물렀다. 배운 것이 없는 분이 하나님의 지혜로 토론에 임했는데 오랫동안 공부한 율법 학자들을 제친 격이 되었다.
우리는 간판위주의 세상 속에서 '예수의 간판'을 달아야 한다.
교회들까지도 자녀교육에 있어서 세상 지식과 학문에만 매료되어 거기에 돈을 투자해서 똑똑한 자식 만들려고 한다면 뱁새가 황새 발을 좇아가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세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3. 온전한 인격으로 자라셨다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다. 그 인격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잘못되면 그 인격이 상실되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원래 신성을 가진 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 14절-
그가 인성을 지니신 인간으로 나신 후로는 우리와 같은 인격을 가지고 사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역시 그 인격에 있어서 존중받아야 할 한 인간이시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인격에 있어서 흠과 티가 없으신 분이셨기에 겸손하고 온유하며 또 지혜롭게 일처리 하는 것과 예절에 있어서나 순종에 있어서 손색함이 없으셨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자라셨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장 52절-
바로 된 인격이라고 말할 때에 그 성품에서 나타나게 되어있다.
말의 실수가 많으면 사랑받기가 어렵다. 행동거지가 아름답지 못하면 사랑받기가 어렵다. 그 행동거지 속에는 예절과 성실함, 진실함, 부지런함을 포함한다.
실제로 예수는 이렇게 사셨다.
이런 모습이 부모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보실 때도 그러셨다는 얘기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이것을 어떻게 알고 이런 사실을 기록했을까! 그것은 쉽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당시에 성령께서는 그 사실을 표현하게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가 중요하다. 때로는 인간에게 맘에 안 들어도 하나님 보실 때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
사람들과 하나님 보실 때 사랑스러운 사람이 온전한 인격자로 존중을 받을 수 있고 오래 간직될 모범적인 인물이 될 수가 있다.
거짓말을 지어내거나, 나쁜 판결을 내리거나, 뇌물을 받거나, 사사로운 일에 다투거나, 화를 내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좋은 인격자가 아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에 있는 팔복의 말씀에 나타난 미덕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은 인격자이다.
바로 예수께서 이런 미덕을 가지고 사셨기에 하나님도, 사람들도 사랑스러워했다.
우리가 이런 인격을 살아갈 수는 없을까!
아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부터 예수님의 인격을 닮기 위해서 기도하면 되고 그 말씀을 사모하면 된다.
없는 것을 지어서 하라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명령하셨다.
그러니까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에게만 사랑스러운 인물로 키우려고 하면 과욕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무조건 공부 잘하면 칭찬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지식과 인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말이다.
-나가는 말-
예수님은 이런 아름다운 성장과정을 통해서 성년이 되셨다. 나이 설흔 살에 공생애에 접어드신 것이다.
모든 인격적 자실에도 손색이 없으셨다.
대충대충 성장하신 분이 아니시다. 이것을 보면 세상 초등 학문의 과정이 사람을 만들어주진 못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자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성결의 지혜를 힘입어서 자라야 한다. 나아가서 예수의 인격을 닮은 인격체로 자라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온전한 인격, 즉 겸비한 인격을 가지시고 공생애 돌입하셨다.
그래서 넉넉히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속에는 능력이 나타났고 또 그의 행동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시는 능력이 나타났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는 없을까!
온전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나가면 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된다.
우리가 세상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예수의 인격을 닮음'이다. 이 속에서 예수의 향기가 날 것이며 또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능력이 니타날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곧 많은 영혼으로 주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전도의 능력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구속 사역은 십자가 위에서 단 번에 완성이 되었지만 이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까지는 아담이 범죄 한 다음부터 길고 긴 과정을 거쳤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도, 내가 전도한 사람도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인 성장 과정'이 필요한다.
단순히 신학 지식의 과정 Process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인격'을 겸비하려면 그렇다는 말이다.
인격의 수양 과정 없이 자식만 가지고 된 검사 판사들이 요즘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보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들도 그렇다. 인격의 수련 과정도 거치지 않고 목사 된 사람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옳은지 그런지도 모르는 몰지각함마저 있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할까도 생각해 봐야한다.
우리는 실수가 많다. 그러나 늘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성화 Sanctification 되어 가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내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소원해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장 13절-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도록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러면 이때 내적인 큰 변화와 함께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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