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부활 復活 ; Resurrection

좁은길을 걸으며 2021. 4. 3. 15:19

부활 ; Sự Sống Lại

-고린도전서 1장 1-58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사도신경 끝자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Sự sống lại của thân thể,  và sự sống đó đối "라고 신앙고백을 드린다.

그냥 맹목적으로 드리는 고백이 아니다.

여기까지 확실하게 믿어야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가진 신자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그저 성인聖人의 한 사람 정도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끔씩 그런 사람을 본다. 이건 복음을 믿는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예수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그 속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 그 자체로 다가왔다.

그것이 부활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크리스천이며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현재 우리는 그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는 예수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며 지옥의 자식처럼 희망 없이 살다가 가야 하는 인생에 불과했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만에 다시 사셨기에 이 사실을 목격했던 제자들과 따르던 사람들이 나가서 "예수가 살아나셨다."라고 외친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어 우리도 믿게 되었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부활!

예수 부활!

그리고 믿는 자의 부활 곧 나의 부활!

이 얼마나 아름다운 멜로디이며 소망을 주는 메시지인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생명과 능력으로 나타난 복음진리로써의 큰 가치가 곧 부활復活이다.

이 부활을 통해서 나타난 역사는 인간들의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에 의한 우주적 변화로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부활절를 새 창조의 날로 여겨 하나님께 큰 감사와 감격의 찬양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천사들아 즐거워 할렐루야 기쁜 찬송 부르네 할렐루야!" -찬송가 164장 1절-

 

 

1. 부활 외침

2. 부활 탄력

3. 부활 입증

 

 

1. 부활의 외침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내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외치시지 않았다.

그러나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과 제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이 소문은 퍼나갔다. 그렇다. 긴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이다.

숨을 죽였던 겨울이 지나면 땅속에 있는 뿌리에서 물을 흡족히 빨아들이면서 새움이 트고 꽃이 만발하게 한다.

꽃들이 노래한다. 새싹이 노래한다. 어느새 나비가 날아들고 벌도 꽃을 찾아간다.

만물은 외친다. "와! 봄이다. 주께서 새 생명을 주셨다. 우리는 다시 살았다!"

부활은 새생명의 역사이다. 아니 새 창조의 역사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요한계시록 21장 5절- 하신 그분의 외침이 부활이다.

그 부활 속에 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힘차게 외쳐야 한다. "예수가 부활하셨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천사가 일러준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장 5,6절-

"그는 여기 계시지 않으신다! He is not here!" "그러나 그가 다시 사셨다! He has risen!"

그렇다. 죽음은 예수를 영원히 가두지 못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크게 외치자. "Chúa Giêsu đã sống lại!쭈어 예수 다 송 라이!"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

 

복음은 외침으로 전파가 된다. 목사는 강단에서 외쳐야 한다. 전도자는 길거리에서 외쳐야 한다.

선교사는 다른 민족에게 가서 외쳐야 한다. 

우리는 만나는 이웃과 일가친척에게 외쳐야 한다. 이것이 예수 복음의 성격이다.

때로는 목을 놓아 외쳐야 한다. 마치 천로역정에서 기독도(크리스천)가 장망성을 떠나면서 "생명! 영원한 생명!! life! eternal life!!" 하고 외치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을 이 부활의 복음만이 인간이 살리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경제라는 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영원한 사망의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외침을 통해서 그들의 발길을 예수 앞으로 돌리게 해야 한다.

실제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 충만을 받고 그들은 외쳤다. 베드로의 첫 설교는 그 주제가 '예수가 부활하셨다!'였다.

"너희가... 못 박아 죽였으나...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사도행전 2장 23,32절-

그러면서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2장 32절-라고 외쳤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듣고 회개하고 예수께 3천 명이 돌아왔다.

그렇다. 예수 부활의 복음은 외침의 복음이다. "믿음은 들에서 난다."-로마서 10장 17절-

우리는 어떤 면으로라도 외쳐야 한다. 김익두는 한 때 깡패였지만 그가 예수의 복음을 듣고 회심한 후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외침이 사라졌다. 이미 예수 믿는 기존 신자들만 앉혀놓고 외친다고 하고 있고 또 수평이동으로 교회 옮겨 다니는 철새들만 앉혀놓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웅변이 뛰어나면 인기 좋은 목사로 인정받고 그런 시대 속에서 방황하며 살고 있다.

 

착각하지 말자.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가서 외쳐야 한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우리도 부활한다!"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들고 외치는 건 복음이 아니라 정치 쇼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이렇게 외치셨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이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장 25절-

 

오늘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지면을 많이 활용한 내용이 부활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외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만일 내가 전한 그 말(부활의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 1,2절-

그러면서 바울 다시 부활의 복음을 꺼내 들고 외쳤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정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3-8절-

외침의 복음을 통해서 분명한 것 하나는 "듣는 자가 날아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만큼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말을 꺼내보지도 않고서 "저 사람은 불교라서... 저 사람은 씨도 안 먹히는 사람일 거야.... 저 사람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서... 등등" 핑곗거리만 찾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는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서...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에스겔 3장 11절-

가서 외칠 때에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은 다 믿게 되어 있다.

 

 

2. 부활 탄력

 

부활엔 탄력이 있다. 살아있는 가지를 꺾으려고 하면 탄력이 있어서 잘 안 부러진다.

부활에는 탄력이 있다. 그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부활의 탄력은 때로는 고속을 능가해서 초고속이다.

사실은 예수 부활의 탄력을 받은 자들이 여기서 저기서 지금도 복음을 전하고 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모진 박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탄력은 더 대단했다.

봄에 산불이 나면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그 불똥이 여기저기로 옮겨 붙어서 더 크게 번지는 것과도 같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가 그러했다.

그만큼 부활의 불꽃은 대단한 탄력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카타콤에 들어가서 비밀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여기서 나온 유명한 말 중의 하나가 '물고기'란 뜻의 'ΙΧΘΥΣ 익투스(ησοῦς Χριστός, Θεοῦ Υἱός, Σωτή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이다.

따라서 나는 이곳에서도 복음이 탄력이 붙기를 원한다. 처음부터 탄력이 붙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그것은 저절로 탄력이 붙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자유롭지 못하다고 탄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간절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녹아 나온다.

이들의 찬양하는 것을 봐도 그렇고 또 주님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를 봐도 그렇다.

초대교회 안에는 어느 교회나 박해가 심했다. 특히 디아스포라가 되어 신앙생활하는 유대인들 역시 더 큰 박해로 인해 위협과 불이익을 심하게 당했다.

그러나 더 큰 탄력을 받았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장 8,9절-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은 1세기에 가장 탄력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아무런 박해도 없이, 다 배가 부르고 지성이 하늘을 찌르듯 하지만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콘스탄트 대제가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공인하면서 서서히 그 탄력은 약해지고 '종교의 부패와 암흑'으로 빛이 퇴색되어갔다.

복음을 이지적으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로는 다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이나 어떤 단체력을 통해서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 1장 8절- 탄력을 받는다.

다른 데서는 오히려 종교적인 것일뿐 오히려 퇴락을 몰고 온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복음은 탄력을 받는다.

우리는 다시 오직 성령께만 의지하고 말씀에만 의지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역사는 새롭게 일어날 것이며 부활의 탄력은 곧 영혼구원의 역사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3. 부활의 입증

 

부활의 입증은 무엇으로 가능할까! 사실은 어느 누구도 예수가 부활하실 때 직접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믿는다.

이미 빈 무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고 또한 미리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자들이 열두 제자뿐만 아니라, 500여 명의 형제들에게 나타내심으로 잘 알 수 있으면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록들이 또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 더 있다면 대부분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순교적인 죽음으로써 부활을 입증했다.

이것이 아무리 역사적인 사실, 즉 팩트라고 할지라도 오늘날 "에이, 지어낸 소설이야!"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는 우리에게는 성령이 이것을 우리 안에서 직접 역사하시며 증거로써 함께하신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입증하시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셨다.

 

바울은 위대한 석학이다. 그는 예수 부활의 확실성을 말하고 또한 우리 성도의 부활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함께 열거하면서 아주 뚜렷하게 부활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가 이 바울이 남긴 부활신앙에 대한 입증자료를 믿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을 제시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을 믿는다면 "구원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 2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의 개관 성에 따른다. 바로 바울은 자기 주관에 따라 억지로 짜 맞추기식으로 부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린도전서 15장 12절-

생각해 보라. 바울은 한 때 율법주의자였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는 데에 앞장을 섰다.

그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났다.

환상이 아니었다. 그는 그 순간 눈이 멀어버렸다. 더 이상 예수가 구주이신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일평생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를 당했다.

바울은 적어도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예들을 들어가며 우리에게 예수 부활과 성도 부활에 대해 입증하고 있으면서 변증과 반증까지 필역하며 우리에게 확신을 던져주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고린도전서 15장 14절-

1)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2)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되고 믿음도 헛 것이다

3) 우리는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다

4)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5)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6)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할 것이다

7) 예수 믿는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확신하는 바는 "부활은 확실히 있다. Chắc chắn có một sự phục sinh." 그러므로 "확실히 믿고 따르라. Hãy tin tưởng và làm theo."

바울은 부활 문제를 의심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 신앙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 22절-

 

 

- 나가는 말 -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다. 단지 죄 사함을 받는 것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 함께 살았다."

이미 세례 속에도 부활이 담겨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 31절-라고 까지 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기에 아무렇게나 살지 않는다. 더 진지하게 우리의 생을 돌아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죄는 이미 예수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

그러니 만큼 우리는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사모하며 다시 오실 주님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미 부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부활'이 남아있다.

그날이 오면 우리 모두가 '신령한 몸'을 입고 복락원에서 살아갈 가장 아름다운 지체를 입게 될 것이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탐욕, 부정, 더러움, 오만함, 전쟁, 질병이 없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다.

그분이 나를 살리셨다. 그리고 나를 새롭게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부활의 주님만 따라가면 그날에 우리는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영원히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