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 해제 Giải tỏa cách ly
히브리서 4장 14-16절
-들어가는 말-
모든 용어 하나하나가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인간 세상에서 그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새로운 언어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한 소멸되기도 하며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중에 하나 '격리 ;隔離,Giải tỏa cách ly'라는 말인데 요즘은 상용어처럼 자연스럽게 사용되게 되었다.
'격리'의 뜻은 일반적인 의미로는 "어떠한 사정에 의해 다른 것과 통하지 못하도록 사이를 막거나 떼어놓는 것"을 뜻하지만 "전염병 환자 등을 따로 옮겨서 떼어놓는 것"을 뜻하는 용어이다.
2020년에 대유행병으로 번진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지구촌의 수억의 사람들을 격리시켜 놓고 말았다.
비록 신체적인 격리를 당하지 않았을지라도 인류 전체가 격리를 해야만 하는 지경에 놓였던 한 해였고 이것은 지금도 연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한 가닥의 희망이 있다. 그것은 '백신을 맞는 것과 항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이곳에서 다른 나라나 특정한 지역으로 가게 되면 격리부터 받아야 한다. 여간 힘들고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러나 격리가 끝났다 할지라도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게 아니다. 행여나 또 어디에서 누구에게로부터 병원균이 옮길까 해서 마스크 착용은 물론이지만 제한된 활동을 해야 하고 항상 위생관리에도 철저를 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격리'라는 게 이번 COVID 19로 인해서 처음 생긴 말이 아니다.
격리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하지 않았을 때, 즉 아주 옛날에 격리라는 게 시작되었다.
성경에 의하면 인류 역사가 시작된지 얼마 안 되어서 우리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격리 조치'를 당해야만 했다.
우리는 실감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인류가 겪는 '제한의 요소'는 너무나 많고 엄청난 대가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언어 문제, 인종간 갈등, 이념의 논쟁, 싸움, 전쟁, 죽음 등으로 얼룩지게 되고 말았다.
인류는 아직도 격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죄에 매여 죽을 인생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딱 하나(?)면 격리 해제를 받을 터인데 그것을 거부하고 안 믿으려 하고 오히려 비난까지 하면서 말이다.
오늘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격리 해제의 길과 그 이후」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 싶다.
살 수 있는 길이 있어도 눈이 가리게 되면 볼 것은 안 보고 안 볼 것만 보고 사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안타까운 인생들 가운데서 오늘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인류는 이미 격리가 되었으나 스스로 항체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생물이나 미생물의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안고 있는 죄의 바이러스 인자는 암보다, COVID 19 바이러스보다 훨씬 무서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체'이다.
그렇다고 계속 격리만 당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격리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것인가!
1. 죄는 격리를 불러왔다
2. 예수의 피로 격리 해제되었다
3. 하나님과 동행하자
1. 죄는 격리를 불러왔다
죄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죄罪'가 치명타를 몰고왔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장 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죄의 불감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이같은 일(모든 불의, 즉 추악, 탐욕, 악의, 사기, 살인, 분쟁, 악독 등)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1장 32절-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볼 줄 안다면 죄는 정말 무서운 바이러스요. 어떤 과학적 연구와 노력으로도 치료제는 없다.
따라서 인류는 죄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격리를 당했다. 다른 말로는 '추방'이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니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장 24절-
이때부터 인간은 격리 생활 가운데서 죽도록 고생해야 했다.
인류가 이 격리에서 벗어나는 길을 무엇일까 하고 고민을 한 것이 오늘날 수많은 종교나 철학 사상으로 나타났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것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목을 더 죄는 결과만 초래했다.
그러는 중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계명과 율례와 법도(격리 규범)를 지켜야만 했다.
하나님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시켜 주셨다.
그러나 이것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율법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다가도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범죄 하여 허물이 되었으면..." -레위기 4장 2,3절-
이것으로 인해 율법 전체를 어긴 결과가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격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처절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공동체로부터 격리 대상을 정하신 규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레위기 13장 2절-
제사장은 진찰하는 의사가 되어서 그것을 정확히 판별해야 했다. 그것이 정확히 나병인 것이 밝혀지면 그 병 환자는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에 그 전염병이 확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단 구약의 그들뿐이겠는가! 죄의 불감증은 나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혐오의 대상은 나병환자가 아니라 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다.
'죄악에 갇혀서' 평생 죄의 종노릇 하던 인간이 바로 격리의 대상이며 결국 영원히 꺼지지 아니할 지옥 형벌의 대상이다.
경제가 상승이 되고 세계 10대 강국이 되었으니까 우리는 자유로운가!
오히려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더 무감각해졌다. 하나님을 더 멀리하고 더 빨리 죄악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볼 때에 잘 사는 것이 더 불행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골로새서 1장 21절-
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 죄 때문에 우리는 격리되어졌다. 한 마디로 사망 안에 갇히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거기서 나오려고 허우적거리다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을 뿐이었다.
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인간은 술, 담배, 필로폰으로, 카지노 등을 돌며 헤매다가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렇게 살다가 가면 영원히 격리에서 해제되지 못한 채로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격리되어 살아가야 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큰 불행인가!
그러면 이런 격리에서 헤어 나올 길을 없는 것일까!
당연히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끝인가! 그러 수는 없다. 그게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우리 인간 스스로는 그 길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길을 비쳐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 예수의 피로 격리 해제되었다
우리는 이미 죽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단지 '목숨이 끊어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죽음'의 원천적인 의미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죽은 송장'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나는 때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기 죽은 송장들이 걸어 다닌다."
죽음은 단지 모든 활동들의 멈춤이 아니라, '생명의 줄이 끊긴 상태'를 의미한다. 무론 그러다가 어느 날 '육체의 죽음'이 찾아든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인간들은 '죄와 허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죽어있는 상태'에 있었다.
바로 이것이 격리(隔離)이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에베소서 4장 18절-
이게 하나님에게서의 격리이며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눈을 떠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가 저들은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되어 그들 사는 것에 매료된다면 우리도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고린도후서 6장 17절-
구약에서 많은 속죄 제사를 통해서 보여준 것이 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번거로운 제사 행위를 날마다 행하며 이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 제사 자체가 우리를 죄에서 속죄를 가져다줄 수는 없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장 10절-
다만 그것은 장차 인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속죄의 모형'일뿐이었다.
자, 여기서 잠깐!!!
우리는 겨기에서 자유하게 될 수 있는 백신을 만났다. 와~!!! 그 백신이 뭐냐고요?
바로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그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형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인류 전체에게 가장 놀라운 희소식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이야기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만이 인류 전체를 격리에서 해제할 능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앞에 나오서 단번에 속죄를 이루신 분의 피의 그 백신으로 '영원한 삶'을 얻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19절-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그렇다. 예수의 피밖에 없다. 예수의 피가 특효약 백신이다. 인류 전체를 살리는 데는 세상 과학과 의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계시로 보여주시고 세상에 오셔서 골고다 언덕에 오르셔서 흘려주신 예수의 피가 인류를 속죄를 이루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피 백신으로 인한 항체'를 몸에 지니게 되었다.
3. 하나님과 동행하자
격리에서 벗어났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오염균들이 들끓고 있다. 이 땅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 조심하면 된다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가 예수의 손을 꼭 붙잡아야 한다.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의 손을 놓을 때 어느새 알고 오만가지 잡균은 우리에게 달라붙는다. 이럴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또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한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예수 믿은 후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립보서 1장 27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장 15절-라고 일러주고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들도 마귀에게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삼가 조심해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장 8절-
두루 다니며 살피고 있다가 예수의 손을 놓고 사는 신자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늘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 화목하는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서 5장 20절-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가 그분이 먼저 내미신 손에 내 손을 내밀어 붙잡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면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신앙생활의 기쁨도 없이 항상 답답한 생활만 연속한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가는 신앙이 곧 '하나님과의 동행; Walking with God'이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 3:9 -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우리가 그분의 손을 놓아버릴 때 오히려 우리는 '종의 멍에를 매는 어리석은 자; A fool with the yoke of a servant'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 1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늘 그분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항상 역부족이다. 우리는 아직도 늘 넘어지기 쉬운 존재이다.
우리가 강하게 된 것은 우리가 그분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이 가장 아름답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립보서 3장 12절-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늘 가까이 주님께로 가야 한다. 교만하면 넘어진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야고보서 4장 8절-
무엇보다도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 한다. 하루하루 기도를 통해서, 말씀 묵상(큐티)을 통해서, 또는 예배를 통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격리해제 이후 늘 지속해야 할 아름다운 삶의 지침이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 22장 21절-
이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다.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시간이다.
우리 앞에는 복된 삶이 펼쳐져 있다. 이미 우리는 차려놓은 밥상에 둘러앉아서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마저 거절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건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며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분 앞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 가서 예수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곧 이것이 격리 해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 하심을 입고" 이 사실이 바로 예수 피로 속죄받아 완전 격리 해제되었다고 선포된 사실에 늘 감사하면서 늘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한다.
'은혜의 보좌 the throne of grace'라는 저 멀리에 있는 하늘 보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우리는 격리 해제된 자유와 기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다는 의미로 사영한 말이다.
당당하게 왕의 아들로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성경을 대할 때도, 기도할 때도 그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풍성한 은혜'로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맞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곁에서 역사하신다.
바로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언제라도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보라. 이게 곧 은혜의 보자와 맞닿는 삶이다.
이런 동행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따라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생각하며,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예수와 함께 Với Chúa Giêsu mỗi ngày; Walking with Jesus every day'라는 구호를 외치며 살 필요가 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따로 시간을 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강한 면역력을 가지고 다시는 죄의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고 하늘나라까지 갈 수가 있다.
- 나가는 말 -
어떤 이는 아직도 격리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그 격리를 풀어주시려고 갈보리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피를 다 쏟아주셨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시편 124편 7절-
죄와 사망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를 격리할 수 없다.
우리는 백신을 맞은 자와 같다. 예수의 피는 영원히 우리 속에 효능을 지닌다.
어떤 이는 왜 그렇게 힘든 생활을 하는가!
더 밝고 아름다운 삶이 우리를 기다리는 데도 마귀는 우리를 그 속박에서 놓아주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백신을 맞지 마!"라고 했던 이상한 집단들의 말에 속고 사는 이들이 있다.
정작 꼭 들어야 할 예수 복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율법적 사실만을 강조하는 집단이나. 시한부적 종말론에 빠져 이상한 말만 골라서 듣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그렇개 자들은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누구에게 탓하며 원망하겠는가!
고스란히 자기 책임이다.
그러나 예수께 나오면 된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들면 산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기만 하면 산다. 그 이후 그분의 손만 꼭 잡고 가면 안전하다. 이런 삶이 예수 믿는 행복한 삶이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죄 사함을 받는 즉석 효과의 백신'으로 '죄에서 해방'이라는 은총을 입게 된다.
우리는 그분 앞에 나아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영원히 산다.
"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로마서 6장 22절-
이러한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주어졌다.
우리는 이제 격리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수의 피라는 백신을 맞고 예수의 손을 잡고 남은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즐겁게 찬송하며 걸어가자.
다시는 격리조치될 필요가 없다. 에덴에서 격리되었던 우리를 예수께서 백신을 맞혀주시고 해방시켜 주셨다.
격리 해제받은 성도여, 즐거워하며 춤추자.
인간론 요약
1. 창조된 인간 - 원시상태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
2. 죄 아래 있는 인간 -격리 당한 인간( 죄=바이러스) -죄의 노예
3. 은혜 안에 있는 인간 - 예수와 그의 피(백신) -자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