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기를 힘쓰라
(히10:19-25)
교회(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원래는 ‘불러내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그러나 한자 음 ‘가르칠 교(敎)’에다가 ‘모을 회(會)’ 자를 따서 ‘교회(敎會)’라고 했다.
이 교회를 세우신 분이 누구신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교회의 설립자는 예수님이시다. 참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마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교회가 그냥 말로써 세워진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피로 세운 교회이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운 교회”(행20:28)인 것이다. "피로 사신 교회"(계5:9)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가 아니면 오늘날과 같은 교회는 있을 수가 없다. 십가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써 세운 교회이다.
십자가의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집단이거나 이단들의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우리에게 이런 아름다운 모임, 즉 교회공동체가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품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에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일찍이 칼빈 선생은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했다. 아기는 엄마 품에 있을 때가 가장 평화롭고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교회 안에 있을 때에 안정되고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바울 선생은 우리에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엡1:23).
그러므로 주일은 물론 시간시간 교회에 나와서 그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여러분은 이 작은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이다.
작은 교회라고 시시한 교회가 아니다. 나는 작은 교회가 더 아름답다.
“참새가 작아도 알을 낳고 고추가 작아도 맵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담당하는 능력있는 교회, 즉 주님께로부터 칭찬받는 교회가 될 줄로 확신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아주 작은 교회였고 경제적으로 미우 가난했던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었다.
우리는 오늘 히브리서를 읽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레위기와 짝을 이루는 성경이다.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보면, 아무라도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레위서나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핵심은 “우리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이다.
레위기를 보면 맨 날 짐승 잡는 얘기만 나온다.
그러나 레위서는 복음 중의 복음이 담긴 중요한 책이다.
거기서 나온 모든 얘기는 ‘장차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얘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교회당 안에 누구라도 다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라는 것이다.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피와 관련된 얘기이다. ‘정결하고 보배로운 피’라야 한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 19)
그 피가 무슨 피일까?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그래서 그 증표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순간,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27:51)라고 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새로운 실 길’(히10:20)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권세’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교회’라고 하는 은혜의 처소에 나와서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자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 즉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십자가의 보혈로 날 씻어주소서!”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 온 맘이 얼나나 개운하고 시원해지는지 모른다.
이것에 대한 특권과 감사와 감격을 망각해 버리고 “바쁘다 바뻐!”하면서 세상으로 가본들 얻는 유익이 뭘까?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은혜 받아야’한다. 은혜 받아야 산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절).
지금 이 자리에서 결심하라. “모이기를 힘쓰자!”
모여서 첫번째 해야 할 일은 예배이다. 그 다음에 성도의 교제이다. 교육이다. 우리는 예배 모임의 중요성을 잘 인식해야 한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그런데 마귀는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임을 원천적으로 방해하는 원수이다.
교회가 들어서면 공산주의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부터 파멸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공산주의나 마찬가지 형태의 체제를 고수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서 교회를 세울 수 없다.
그리고 정부가 공인하지 않는 장소에서 모이면 집시법위반으로 잡혀가서 중벌을 받아야 한다.
마귀는 이미 열린 길도 보지 못하도록 연막을 치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예수 믿으려면, 좋은 직장도 포기해야 했던 때가 있다. 왜냐하면 주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롭게’ 믿겠다는 것이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올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닌가 하고 진단해본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주님 오실 때가 되면 이단(異端)들은 더 잘 모인다. 그것은 사단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극성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건전한 복음을 가진 교회들은 오히려 텅텅 비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건전한 복음을 가진 교회가 열심을 낸다면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의큰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모이기를 폐하는 것과 모임에 게을리하는 것은 나쁜 습관 중 하나이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25절) 당부하고 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쁜 습관 속에는 항상 ‘마귀의 올무’가 있는 것이다. 한 번 두 번 빠지다 보면 나중에는 ‘상습’이 되는 것이다.
신자가 교회와 멀어진 만큼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를 엿보는 놈은 마귀이다. 우리는 그 꾐에 빠지면 안 된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25절).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힘쓰자!”는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다. 교회생활은 곧 여러분들의 가정생활과 직결되는 것이다. 교회생활이 행복하면 가정생활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행복한 신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