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늘나무 뜨락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위하여
성경/로마서8장1-8절 2010/05/30/ 이송로목사
우리의 삶의 제일된 목적은 ‘나를 즐겁게’, ‘나를 행복하게’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가 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얼마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모른다. ‘자신도 만족하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예수께서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6:24)다고 하셨다.
본문에서 바울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니다. ‘성령을 좇아서 사는 법’을 잘 배워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잘 지켜보려고 노력을 많이 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안에서 부여된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피곤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안에 거하는 비결’을 알지 못하고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 ‘죄의 법 안에서’ 끙끙대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이 피곤해지고 기쁨이 없고 불안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육신에 속한 자로 살면 그 마음 속에서 늘 두 가지 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싸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이런 갈등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냥 ‘양심의 가책’을 받는 정도로만 살아간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범하거나 죄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내적 싸움’ 또는 ‘내적 갈등’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내 속사람(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3절).
이럴 때 우리는 신앙생활 자체가 힘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즐겁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지옥은 안 가야겠고....’ 그러나 지금 죽으면 ‘지옥 갈 지도 모르겠고....’라는 불확실성 속에 사로잡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 얼마나 답답할 노릇인가?
생각해 보라! 우리가 믿는 복음이 불확실한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죄’가 불확실성에 빠뜨리게 된다.
이럴 때, 답답하고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 속에서, 숨이 콱콱 막히는 것 같은 상황에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절규와 같은 탄식이 있는데 그것은 “오호아,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여러분은 이 부르짖음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에게로 끌고 와서 마음으로부터 우리도 이런 탄성을 질러야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 시간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불확실성 속에서 늘 헤매며 사는 신자라면 이 탄성을 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몸서리치게 부르짖어야 한다. “사망 길에 빠진 이 몸 캄캄한 데 헤매며 부르짖는 나의 애원 들어소서 내 주여!”
중국에 이아무개 목사님의 얘기를 하나 하겠다.
그는 열일곱 살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께 목사가 되겠다고 약속을 드렸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늘 마음속에 자신의 위선적인 삶에 대해서 괴로워했다.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생활과 그 같은 가르침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성경책을 끼고 바닷가로 갔다.
그는 바닷가에 성경책을 돌로 눌러놓고 썰물의 물까지 걸어서 갔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왜 늘 승리의 생활을 하지 못합니까? 왜 늘 육신에게 져야 합니까? 나는 위선적인 목사입니다. 어떻게 해야 온전히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응답해 주세요. 만일 응답하시지 않으면 나는 여기서 파도에 묻혀 죽겠습니다.
이렇게 두 시간을 기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은 없고 파도가 다시 밀물로 다가오자 일어나지 않고 응답을 구했다.
계속 파도가 밀려와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래도 물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응답은 없고 큰 파도가 와서 몸을 때리자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졌다. 그는 파도에 밀려가면서 기도를 계속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파도에 밀리고 밀려서 바닷가 성경을 놔 둔 자리까지 밀려나오고 말았다.
너무나 억울해서 울면서 밖으로 나와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왜 나에게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리고서는 바위가 있는 곳에 옷을 벗어서 늘어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부르는데 창공만 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나는 이제 집으로도 돌아갈 수가 없군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며 절망하는데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셨다. “생명의 성령의법으로 되느니라!”
그는 바닷가에 놔둔 성경을 펼쳤다. 그런데 그 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후로는 늘 ‘생명의 성령의 법’만 생각하며 신앙생활과 목회를 해 왔단다. 그는 승리의 비결은 날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때 이후로 55년이 되었지만 주님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보라. 바울은 발견했다. 뭘 발견했단 말인가? 해답을 발견한 것이다.
그 해답은 언제든지, 아니 무엇이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다.
롬7:25이 그냥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성경 지면을 채우기 위해서 적어놓은 군소리가 아니다.
바울은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이다.
만일 자신의 현실과 문제만 바라본다면 답은 없다. 역시 사람을 바라봐도 답은 없다. 유명한 상담자를 찾아가도 답은 없다.
그런데 답이 있다. “예수를 바라보라!”
그분은 지금 내 안에 계신다. 여러분은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무슨 응답을 하실는지를 기대하며 바라보라.
예수님을 묵상해 보라. 그분이 나의 죄와 허물을 짊어져주셨을 뿐만 아니라 현실의 고통의 문제까지도 져주시는 분이시다.
사실은 진짜 마음으로부터 예수를 신뢰하고 바라보라. 그러면 그분이 주시는 응답과 더불어 확신이 올 것이며 그 순간 ‘갈등 끝’이며 ‘방황 끝’이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가져와야 하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풀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너무나 답답하면 문제자체만 생각하지 말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한다.
때로는 목사인 나도 그래왔었다. 얼마나 바보인가?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면서 저절로 문제가 풀리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리로다!”라고 외쳤다.
방금 전까지 “아이고, 죽겠네!”하던 사람이 갑자기 “감사합니다!”라니...말이나 되는가?
로마서 8장1,2절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여기 이 말씀에 해답이 있는 것이다.
“나의 영혼 피할 데 예수 밖에 없으니 홀로 있게 마시고 위로하여 주소서. 구주 의지 하옵고 도와주심 비오니 할 수 없는 죄인을 주여 보호하소서!”
우리는 아무리 위험한 순간에도 피난처되신 예수님께로 피해면 산다. 얼른 그분 앞에 나가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산다.
그리고 죄없다 함을 받는다. 할렐루야!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의 능력은 한없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참된 신앙을 외면하거나 이탈한 사람은 누가 무엇을 잘못한 걸을 가지고 평생 우려 먹고 살려고 한다. 자기 자신도 감당 못하면서 남의 허물과 실수는 그렇게 물고 늘어질려고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늘 용서하고 잊어버릴 줄 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도 늘 복음의 신앙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아이들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집으로 돌아와야 하듯이, 우리는 예수를 가정삼아 신속히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안으로 와야 한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죄에 넘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한 결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다. 마귀는 우리 늘 ‘율법적인 잣대로 정죄’를 일삼는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마귀에게 코가 걸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보라,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와 있고, 또 예수 안에 있기만 할 것 같으면 1) 결코 정죄함이 없다. 2) 그 속에 ‘생명의 성령의법’이 역사하게 되어서 우리가 ‘영적인 삶’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생활인지를 늘 점검해야 한다.
오늘 잘 믿다가도 내일 ‘그리스 예수 밖으로’ 나가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세상 유혹과 욕심에 끌리게 되면 죄는 자동적으로 나를 지배하려고 하고 다시 노예로 삼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민함을 가지고 예수 안으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다시 성령은 역사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원동력을 제공해 주신다.
그래서 ‘영의 생각’을 하게 하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절).
그러나 반대로 “육의 생각은 사망이라!”(6절)고 가르쳐 준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영의 생각’을 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나 자신이 예수 안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 있는가?”하는 것인가?
이렇게 될 때에 그 속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여 해방, 자유, 기쁨, 평안이 넘치게 해 주시는 것을 물론, 율법 아래 매인 종의 삶이 아니라, 율법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열매들을 많이 맺게되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가 하겠다”고 하면서 ‘나’를 세우면 ‘육신에게 져서’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겨우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종노릇’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세상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더 곤고하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무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절망일 수 없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선다(잠24:16)고 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3절)라고 명시하고 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할 수 없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놈은 마귀이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은 죄를 이기게 하시고 또 육신의 욕망을 극복하도록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도와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감사하리로다!”하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 말씀을 듣고 ‘육신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영을 따를 것인가?’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영을 따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속에서 생명의 성령이 역사히시기 때문에 죄에게 넘어지지 않고 하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서 사는 멋진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과 감사를 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날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