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히신 예수님
성경/요한복음18장1-11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가 유월절을 앞 둔 주일날이었습니다.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이 날을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장면은 세상 임금과 군주들의 대관식과는 대조적으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어린아이들과 서민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대관식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길에 폈습니다.
그러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하며 외쳤습니다.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호산나주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호산나’라고 하는 말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로마의 속박에서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고, 헤롯의 독재에서 구원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어쨌든, 그들의 본의와는 달리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과업’의 사명을 띠고 ‘세상나라의 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하신 셈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사실상 고난주간의 시작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 날을 ‘수난일’이라고 말한다면, 그에 못지않게 십자가 참형(慘刑)을 앞에 두신 예수님의 한 주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을 고민만 하고 아무 것도 안 하고 일손을 놓고 망연자실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께로 갈 때가 얼마남지 않으셨다는 생각에 더 분주하게 움직이셔야 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사는 지혜를 여기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고민이 있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면 오히려 그 고민들이 마음을 지배해 버려서 더 어렵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일수록 새로운 일을 찾아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괴로운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움직인다면 그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님께서 5일간에 걸쳐 하신 일이 아주 많으십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할 생각이나 하고 이권을 노리는 자들을 향해 매섭게 책망하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면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러 가지 교훈들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지혜를 가르치셨습니다. 포도원의 비유, 말세에 일어날 일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못할 생생한 교훈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입니다. 그 교훈 속에는 사랑과 겸손, 그리고 죄 씻음의 원리 등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하늘로 가신 후에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약속도 하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우리에게 길이길이 잊지 못할 생생한 교훈들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일들을 고난주간에 행하셨던 것을 우리는 보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침착하게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시라는 것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잡히신 애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 때는 그들의 시간적으로 금요일 밤(우리시간으로는 목요일밤)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감란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산의 중턱쯤 되는 곳에 감람기름을 짜는 곳이라고 불리우는 ‘겟세마네’라는 곳에 머물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우리는 되새겨 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십자가의 참형을 받으실 것을 아시고 그 고통을 면할 수만 있다면 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기도 가운데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승리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기도를 하는 듯 마는 듯 하다가 코만 곪았습니다. 그들은 ‘실패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마귀를 이기셨지만 제자들은 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마자 한 무리가 등과 횃불을 들고 칼을 차고 떼를 지어 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가 이곳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수인들을 유다와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이 여기 계신 것을 안 것은 평소에 예수님이 이곳을 찾아 늘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후에 슬그머니 빠져 나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가던 자들과 군호를 짰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그 자가 예수다. 그러면 그 때 예수를 붙잡으시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모든 상황을 아주 침착하게 대응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안 나타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께 다가와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마26:49)라고 하며 입을 맞췄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행하러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거짓된 말, 거짓된 입맞춤이라는 게 있습니다. 얼마나 가증합니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거기에 빈정대거나 대항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에 “이 배신자여, 나쁜 놈!”이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배신자가 잘 될 리가 없지만 오히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은 30이 그렇게 탐이 나서 그랬다고 하지만 그의 마음의 근성에는 항상 도둑의 심보가 따라다녔던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요18:4)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 즉 “내가 여기 있다 나를 잡아가라!”는 뜻과도 같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그들은 갑자기 잡으러 왔던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의 말씀이 굉장히 위엄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그들은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니라!”라고 하시고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면 속에서 예수님께서 끝까지 자기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스승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지난번 하나님께 드렸던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져야 함을 상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말의 책임’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책임’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려놓고 “언제 그랬냐?”는 식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난 날 기도할 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니다!”(요18:9, 요17;12).
이 기도가 이루지기를 위해서 그 사람들에게 “이 사람들의 가는 길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베드로는 엉뚱한 일을 저질러버립니다. 대재사장의 종 말고라고 하는 사람의 귀를 칼로 쳐버립니다. 10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혈기를 앞세우면 이렇게 실수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한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도 순간의 분노를 통해서 그 정당성이 무너져버리는 경우를 허다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는 것이 목회다!”. 어는 교회 당회실에 가보니까 “이것까지 참으라!”가 써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으로 번져서는 안 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정신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자기 선생님을 위한답시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제자를 두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전혀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주님 앞에 정당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말고의 귀를 도로 갖다 붙여주셨습니다. 그 순간에도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3).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물리적으로 대항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데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셨고, 또한 십자가를 지셨다는 기억합시다.
우리는 배신자 유다만 정죄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비방하고 또 베드로의 성급한 성질이나 논하면서 시간보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일어난 사건의 일련의 과정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왜 이런 일이 있어야만 했는가?"의 궁극적인 면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만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통해서 우리의 혈기가 죽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정욕이 죽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인간적인 수단’, ‘물리적인 수단’, 심지어는 ‘세속적인 수단’을 동원하려 했던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의 방법에 따라 사는 신자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기도만 하는 한 주간이 아니라,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더 많은 영혼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도록 한다면 더 없이 복된 한 주간이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배신당한 일이 있더라도 그런 일에 매이지 말고 그 배신을 뛰어넘어 주님의 뜻을 향해 마음을 집중할 줄 아는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배신의 장벽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직 우리가 가는 길에 장애물이 수없이 많을지라도 우리들은 주님을 배반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의 그 모범을 따라 살아간다면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우리에게도 면류관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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