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도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길 기도한다.
예수님의 부활
성경/요한복음 20장 1-18절 2010/04/04. 이송로목사
4월! 만물이 약동하는 계절에 우리가 부활절을 맞게 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오는 생명체들을 보면서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메마른 것 같은 나무에 새싹과 줄기가 나오고, 진달래, 벚꽃, 복숭아꽃 등이 만발하는 계절입니다.
한편, 들짐승과 새들이 알을 낳으려고 둥지를 새로 틀고 알을 낳을 채비를 하는 계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 생명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부활(아나스타시스;anastasis)은 사계절의 순환에서 생기는 생성과정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로써 겨울 내내 얼어붙었던 땅에서 흙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도 신기하고, 말라버린 것 같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고 새싹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고, 누에고치를 뚫고 나방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고. 계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도 신기한 현상이지만 부활은 그 보다도 훨씬 뛰어난 완전히 죽었던 생명이 살아난 사건이며, 완전한 생명, 즉 영원히 살 몸으로 다시 살아난 생명의 사건이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부활은 우리의 죽을 몸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영원히 썩지 아니하고 죽지도 아니하고 늙지도 아니하며 아름답고 젊은 모습으로 변화된 몸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서 부활한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도 않으면서도 평강과 자유와 기쁨,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곳에서 살아가기에 적당한 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에 오염되지 않고 근심 걱정도 없고 시기 질투 미움 싸움 전쟁 사고가 없는 곳에서 영원무궁토록 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으로만 이루지는 사건이므로 인간의 의술이나 자식으로는 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진실하게 하는 자가 크리스천입니다.
따라서 부활사건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며, 또한 영원토록 기념할만한 사건이기에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주일을 지킴으로써 부활신앙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매해 부활주일 아침이 되면 누구나 이렇게 인사합니다.
“크리스토스 바스크레스”(Христос воскрес!) 하고 말하면, 상대방은 “바 이스찐누 바스크레스”(“Во истину воскрес”)라고 화답하는데, 그 뜻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는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외치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치십시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빨리 간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갔다가 무덤 입구에 닫아놓은 돌이 없어진 것을 보고 굉장히 놀라고 두려움에 싸여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습니다. 아마 “선생님의 시신이 없어졌어요!”라고 울면서 말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요한 더 젊어서인지 먼저 도착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혀서 무덤 속을 내어다 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한쪽으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이 두 제자는 이때서야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아마 두 제자가 돌아간 다음에 마리아는 다시 무덤으로 와서 무덤을 다시 들여다 본 것으로 보여집니다.
“흰 옷입은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12절).
그 천사들이 말을 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절).
이런 상황에서 뒤를 돌아보니 예수님께서 마리아 서 계셨습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아직도 주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만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겠나이다.”(15절).
아주 당돌하고 믿음 좋은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야!”
그때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이신 줄을 알고 “랍오니(선생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반가움에 못 이겨 순간적으로 예수님의 팔을 붙들려고 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고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하면서 이 모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 못박히신 전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셨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하시던 약속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심을 친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면 더 큰 은혜와 소망이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던 말씀이 오늘날가지 우리에게 큰 효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생명 내 생명!”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15:15-18).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므로 빈무덤으로 변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그 무덤 앞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무덤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부활 신앙’을 가지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면서 이웃에게 예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녀야 할 올바른 정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순간 영생을 얻었습니다.
무덤이라는 것은 우리 육체가 죽으면 잠시 쉬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가치에 쳐 주실 일, 영원한 가치의 것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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