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소리

부지런한 인생으로

좁은길을 걸으며 2006. 1. 22. 23:15

 

겨울 참새가 찔레나무 가지에 앉아있네요 고난 길을 인생들에게 함내세요 하고 바라보고 있네요

 

 

                    부지런한 인생으로              2006/01/22/주일/

                        (잠언6장 6-11절)


리는 흔히 노동하는 것을 죄의 댓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놀고 먹도록 하셨을까?”

아닙니다.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기 전부터 이미 노동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기 전의 노동과 범죄 이후의 노동은 그 성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는 꼭 노동이 생계의 수단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로는 “얼굴(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창3:19) 생계형 노동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십계명 제4계명의 안식일 법을 보면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출20:19)고 했습니다.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한 자에게 안식일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휴식은 부지런한 자에게는 달콤한 휴식이지만 게으른 자에게는 양심의 가책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우리 크리스챤들은 부지런한 인생을 살 것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삶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질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잠언서에서 말하는 지혜 중의 하나가 ‘부지런함(industry; diligence)입니다. 반대로 ‘게으름(laziness; idleness)은 미련함의 동무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개미를 통해서 부지런한 삶을 배우라고 가르쳐 줍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6절).

개미가 결코 사람보다 나은 존재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미물에 불과합니다. 때로는 개미가 얼마나 귀찮은 존재로 느껴질 때가 많은지 모릅니다.

채소나 과일나무에 진딧물이 끼는 것을 방지하려면 그것들의 천적인 개미를 없애버리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개미들의 생활 상태를 눈여겨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함의 한 모델’로 제시하셨습니다.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7,8절).

바로 그 부지런함 뿐만 아니라, 1)스스로 알아서 하는 지혜, 2)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것들은 본능적인 요소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우리는 개미보다 천 배 만 배 지혜있다고 하는 인간이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며, 하루살이 인생처럼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겨우 시키는 일이나 마지 못해서 하고 수 틀리면 데모나 하고.... 솔직히 일은 쥐꼬리만큼 하고 돈은 많이 받으려고 하는 심보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봉급이 많으냐 적으냐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기 전에 이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사명 때문에 일한다!” 그렇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돈이라는 등식 속에서만 살기 때문에 돈 되면 하고 돈 안 되면 안 하는.... 야박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직업의 소명의식, 일에 대한 소명의식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돈이 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일을 주셨다는 그 자체 때문에 즐겁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직장 선교 연구원 방선기 목사님이 어느날 택시를 타고서 “요즈음 경기가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경기라는 것이 각자 하기 나름이지요!”그러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집에서 놀면 경기가 안 좋고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면 경기가 좋아집니다. 저는 경기가 좋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목사님은 그분에게 호감이 갔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극동방송이 틀어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아, 예수 믿는 기사님이셨군요!” 했더니, 그 택시기사가 하는 말이 “이렇게 좋은 찬송을 들으면서 운전을 하다가 때때로 전도도 할 수 있으니 운전하며 사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운전하다보면 짜증나는 일이 많지요?”라고 물었답니다. “물론 그렇지요! 목적지에 다 가서 돈 없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차를 세워 놓고 만원어치만 태워다 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고 만원어치만 태워다 줄 수가 없어서 목적지까지 태우다 줄 때도 있는데, 일단 만원이 넘어서면 손님이 부담스러워할까 봐서 미터기를 꺾어비린다!”고 하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문득 영화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개인택시도 아닌 회사택시를 운전하는 기사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같은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하기까지 했답니다.


이런 기사들이 많다면 택시를 타는 손님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이 엄청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 미터요금 외에 보너스를 보태 지불했답니다. 나는 세상의 택시를 탄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택시를 탄 것 같았답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평범한 택시기사이지만 왕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보였고, 다. 직업을 통해 평신도로서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답니다. 그날 작은 택시 안에서 ‘흩어진 교회’를 보는 기분이어서 아주 맘이 흐뭇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일하기 전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그 일이 즐거울 것이며, 또한 이 세상이 더욱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뀔 줄로 믿습니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9-11절).]


나는 예수 믿는 우리들은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게으름과 잠을 비유로 들어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잠 많이 자는 것만이 게으름은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쓸 데 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보내는 것(허송세월)’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게으름은 그야말로 악마의 베게입니다.

잠언서를 보면 잠에 익숙하며, 세월을 허송하는 자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타성에 젖어 일하기를 싫어하고, 어려운 결단을 내리기도 싫어합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피해갈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제일 잘 나고 똑똑하다고 여깁니다.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26:16).


우리는 게으름 피우는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미래를 향한 확실한 꿈이 있어야 합니다.

빌리 와일더는 “당신을 아침에 벌떡 깨울 수 있는 꿈을 가져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말인지 모릅니다. 참으로 꿈이 있는 사람은, 즉 사명에 사는 사람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학생들 경우 대학교 시험만 끝나면...달라지는 것이 겨우 명문학교 붙는 것이 꿈이었다는 것 때문에 한심스럽습니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꿈이 죽어버렸다는 말입니까?

학벌위주의의 잘못된 풍토에 휩쓸려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먼 미래의 궁극적인 꿈이 하나님나라와 연결이 되어 있는 사람은 게으름 피울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과거 우리 선조들에 비하면 1/3도 일을 안 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왜 그렇게 피곤합니까?  그런데 정말 피곤해서 피곤한 것이 아니라, 그 생각 속에 꿈이 없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궁리가 놀고 잠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10시, 11시가 넘도록 잠을 자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최소한 6시 인생으로...., 나는 몇 시 인생인지 아세요? 3시 50분 인생입니다.

타성에 젖어 사는 삶을 벗어버리십시오. 꿈에 사십시오.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품으십시오. 그러면 자동적으로 게으름은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게으른 자에게도 항상 할 말이 있더라구요! 무슨 할 말이 있냐구요?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하느니라.”(22:13)

중국의 명대(明代)의 유학자요, 정치가인 왕양명이 지혜로운 말을 남겼습니다.
"살다보니
나의 인생에 어려운 일이 네 가지가 있더라" 했습니다.
첫째로 어려운 것은
"고생스러운 것"이다.
두 번째로는 남에게
"냉대 받는 것"이 고통스럽더라
세 번째로는
"고민스러운 것"이요, (살다보면 뼈를 말리는 고민이 생김).
이 세 가지의 어려움보다 더 괴로운 것은
"한가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바쁘십니까?  그래서 불평합니까? 행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한가해지면 괜한 고민이 생기고 이것저것 걱정이 많아져서 더 힘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쓸모도 없고, 보람도 없고, 삶의 의미도 없어집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게으른 자는 매사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꼭 안 될 일만을 생각합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매사를 안 되는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부정적 사고방식에 매여 있습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앞을 보니 아플 쌍, 뒤를 보니 뒤질 쌍, 위를 보니 울 쌍, 밑을 보니 미칠 쌍, 옆을 보니 (000;너무 심한 말이라 안 함)쌍이더라”는 것입니다.

게으름뱅이의 노하우가 뭔지 아세요? “난  그것을 할 줄 몰라!”입니다.

벤자민 크랭클린은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쉽고 게으른 자에게는 모든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게으르니까 ‘죽을 맛’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게으름은 죄야!”

게으름은 책망받아야 할 죄악입니다. 비록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도 그 한 달란트를 가지고 한 달란트를 남겼더라면 그 주인에게 틀림없이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정없이 책망을 받았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5:26,30).


수님도 열심 있고 부지런한 자를 쓰십니다. 12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부지런했습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서 기도하시고, 한 밤 중에 기도하셨습니다. 낮에는 하나님마라를 전파하시면서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시느라고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셨습니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매사에 부지런한 사람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의 복된 일꾼으로 쓰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ㅐ를 서로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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