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여왕 국화를 보세요. 교회 앞 담장 위에 심었더니 늦가을의 서정을 힌층 더 향긋하게 만들어 주네요. 한 번 가까이 와서 향기를 맡아보세요.
순종의 길, 축복의 길 2005/10/30/주일/
(신명기30장11-20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우리 인간들은 처음부터 두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종으로 인한 축복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최초 가인과 아벨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똑같이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가는 길은 180도 달랐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바로 고대를 거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한국 땅에 태어나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가는 길을 서로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부모, 자식, 형제 간에도 말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 인류는 복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을 반항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무서운 죄악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간들은 복 받는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타락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죄의 쾌락에 쉽게 연루가 되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망하는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난날들을 생가해 보면 우리도 한바터면 그렇게 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크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참되신 분에게로 돌아와서 그분만이 참 신이며 인류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알고 믿고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만으로도 이미 행복한 크리스챤들입니다.
우리 모두 옆사람에게 “당신은 행복자입니다!(Blessed are you!)”라고 말해 줍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돌아온 그날부터 시작이며 그 이후로는 주님이 가라고 하신 길로만 가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모세의 설교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미 출애굽해서 40년을 동안 방랑하다가 이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그 메시지를 보노라면 그 핵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무서운 종살이에서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하여 가는 길목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 목사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 동안이나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듣는다’는 것과 ‘순종한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같은 글자인 ‘쉐마’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에서 순종과 불순종을 이런 용어로 표기를 했습니다.
‘순종’이란 ‘유빠코에’라는 말인데, 그 본래의 의미는 ‘들음 아래’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불순종’이란 말은 ‘빠라코에’란 말로써 ‘들음 밖에’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흘려듣느냐? 아니면 귀담아 듣느냐에 따라 좌우명이 결정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은 꼭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여기서 ‘생명과 복’이라는 말은 ‘순종의 길’에서만 얻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망과 화’란 말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간 결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류 앞에 두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청사진이 바로 성경입니다.
옛날에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두 친구는 조용한 강둑을 거닐며 앞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보니 갈래길이 나왔습니다. 한 길은 강둑을 따라 계속된 길로서 주위에 과수원도 있고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은 언덕으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언덕 위에는 작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다정했던 두 친구는 여기서 헤어졌습니다. 한 친구는 강둑을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가면서 과수원의 과일도 몰래 따 먹었습니다.
몰래 따 먹는 과일이 더 맛이 있었습니다. 그 후 그 친구는 훔치는 일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훔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켰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죽이고 달아났다가 체포가 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신문을 집어든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래 전에 헤어졌던 친구의 사진이었습니다. 언덕 위로 올라간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언덕 위의 불빛에 이끌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그 친구는 그 곳에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놀랍게 변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고 총장이 되었습니다. 또 하원의원이 되었다가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신문에 난 것은 대통령이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아브라함 가필드입니다.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가필드처럼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야 합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망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레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니라.”
‘to walk(행하다)’, ‘to keep(지키다)’ 는 말을 ‘to submit(순종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순종’, 또는 ‘복종’이란 말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면 믿을수록 이런 말들을 좋아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377장 후렴)
순종이 어려운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쉬울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11절).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지키지 못할 것을 지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문제를 내는 시험관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내가 공부를 안 해서 풀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수학 분제도 아니고, 과학 문제도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풀 수 있는 문제를 주십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절).
입을 열어 ‘아멘!’하면 되고, 또 마음으로 ‘믿습니다!’하고 결심만 하면 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쉬운 것인데, 10년, 20년, 30년을 믿어도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사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그러면 순종은 저절로 이런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때서야 “이렇게 쉬운 것을 왜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졌을꺼!”라는 생각에 자신이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생활과 구주와 맺은 언약을 늘 좋아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멀고, 교회와 멀고, 목사님과 멀고, 성도들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순종이 어려운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여러분이 세상과 벗이 되고, 마귀와 짝하고 살면 하나님의 말씀(율법)이 큰 짐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만 살짝 드리고 미꾸라지 마냥 빠져나갈까 궁리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고, 목사님을 존경하고, 교회를 사랑한고, 성도를 사랑한다면 ‘순종’이 ‘자발적인 순종’, ‘자발적인 복종’으로 드러나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시간 보내는 것이 아깝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드리는 물질도, 헌신도 모두가 기쁨이 됩니다.
바로 이런 분들로 인해서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점점 아름답게 펼쳐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몸은 교회 안에 담고 있어도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은 가정에 있지만 마음은 가정을 떠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20절이 잘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곧, ①사랑하고(loving), ②순종하고(obeying), ③부종하고(holding)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패턴이 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사랑이 해답입니다. 사랑은 역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지키게 만드는 뿌리입니다. 역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니라.”(16절)고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변하고 역사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그 효능을 지속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순종의 길에서만 축복의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서광가족 여러분! 순종의 길을 택하십시오. 순종의 길이 곧 축복의 길입니다.
인간의 삶은 운명 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비록 운명적 요소가 있어 보이더라도 모든 것을 운명에만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적 존재로, 인격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행한 일에 반드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회개한 것은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는 오늘날(today)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이제 하나님을 택하고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순종이 즐거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게 진짜 멋진 신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 길 선택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생명과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쉽게 편하다고 사망 길을 따르지 마십시오.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희생이 따르더라도 생명 길로 나갑시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