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효도
2005/05/08/어버이주일/ (누가복음2장40-52절)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땅에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를 사랑으로 양육해주신 어버이께 감사를 합시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이것을 보면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한 가운데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약속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준 땅에서 네 생명일 길리라”(출20: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부모공경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버이날만 돌아오면 왠지 맘이 숙연해지고 또한 설교하는 목사도 “이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고 할 때에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뉘우치며 회개하는 맘으로 이 강단에 섰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말년을 행복하게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부모를 거역하고 반역을 시도하다가 결국 그의 상투머리가 이 상수리에 걸려서 요압 장군에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이 압살롬의 돌무덤을 자날 때에는 저주의 표로 돌을 던지고 지나간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많은 인물들의 효행과 불효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특별히 우리 인생의 참된 모델이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1.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이 효도입니다.
소학(小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몸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이다. 부모가 끼쳐준 이 몸을 다루는 데 어찌 삼가고 위하지 않을 수 있는가?”
두달 전 탈렌트 이은주양이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나름대로 정당한 명분을 내세워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메스컴들이 앞다투어 그의 자살을 미화시켜서 보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 역시 하나님 앞에는 큰 죄악입니다.
얼굴 뜨거운 일을 했을지라도, 아니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나체사진을 찍고 수치심을 느꼈을지라도 그녀의 마음이 건강했더라면 자살로 이어지지는 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생존해 계시는 어머니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좀 더 골똘히 생각해 보면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이 얼마나 큰 효도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건강하게 자라셨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40절). 어떻게 보면 이것은 부모님의 책임과도 관련된 이야기지만 역으로 보면 건강한 어린이로 자라나는 것이 부모에게는 안심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나이에 맞는 성장이 잘 이루어질 때 부모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건강하게, 튼튼하게 자란다고 할 때 단순히 신체적인 발육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모 못지않게 내면(정신, 영혼)의 세계가 나이에 걸맞게 잘 발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대하는 바는 지식 있는 어린이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혜 있는 아이’로 자라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솔로몬은 그 아들에게 잠언을 가르칠 때,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은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3:14),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4:7)고 했습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지혜로운 자식을 둔 부모는 그 자체로서 면류관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2.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효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새 열두 살이 되셨습니다.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서 유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한 주간 동안 절기를 지키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일가친족 틈바구니에 끼여서 오는 줄 알고 안심했다가 예수님이 일행 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예루살렘까지 가 보았는데 유대인 선생들 하고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듣기도 하며 대답을 하시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을 다 놀라게 만드셨습니다. 그 부모는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부모님 마음에 근심이 되셨지만 그 말과 행위가 오히려 부모님의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오늘의 청소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에 있기에 주일에 안 보입니까?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그런데 오락실이 더 좋다고 합니다. 아니 안방이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맨 날 피곤하다고 하면서 늦잠을 잡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 못 나온다고 합니다. 11시 예배에도 못나오는 녀석들이 8시 전까지 학교에 등교를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예수님은 있어야 할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아버지 집’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 청소년기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오락실이나 T.V앞에만 앉아있다면 과연 그런 자식이 커서 어떤 인간이 되겠습니까?
내가 자랄 때와 또 전도사 때 학생들을 지도할 때만 해도 아이들은 교회에서 보내는 것을 정말 즐겼습니다. 부모님이 신앙이 없어서 그것을 이해를 못 하신다 해도 그런 어려움과 핍박을 이기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 날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장래가 우려되는 바는 지금의 청소년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효도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결국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녀들이 나중에 믿지 않는 부모님을 예수 앞으로 인도해 오더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신앙생활 하는 믿음의 가정에서는 자녀가 교회를 가까이이 하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보다 더 대견스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지체만으로도 큰 효도가 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자식은 부모를 떠나 먼 곳에 보낸다 할지라도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나는 자녀가 주안에서만 자라준다면 세상 어디에 내보내도 걱정없을 것 같습니다.
3. 순종하여 받드는 것이 효도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후로 나사렛 동네로 돌아가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51절).
한 마디로 ‘순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순종 가운데는 부친 요셉의 ‘목수의 일’을 도우셨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12살 때부터 공생애로 나가시기까지 18년 동안을 목수의 일을 도우며 사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순종은 많은 부분을 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직업적인 일’을 돕는 것이 효도였습니다. 지금은 산업의 구조가 달라져서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부모님 농사의 일을 돕는 것이 매우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인권 학대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다만 자녀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보이지 않게 효성심이 배어나왔고 또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그것들은 아름다운 추억의 고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령 부모가 밥 얻으러 다니며 그 자식도 밥을 얻으러 다니는 풍경을 보고 자란 세대가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풍속도가 없어서인지 어른이 누군지 아이가 누군지 분간이 안 갈 정로 버릇이 없는 아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아비를 조롱하고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힐 것이라”(잠30:17).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챤은 세상 어디를 가나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난다면 전도에도 큰 효과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도 큰 덕을 세우는 요소가 됩니다. “아무개 집사님은 정말 훌륭한 자녀를 두셨어!”라는 평가를 받을 때 얼마나 그 부모님은 행복하겠습니까?
그 아이에게서 풍겨나오는 것은 예절 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를 향한 효도가 스며져 있는 스며져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입니까? 정말 예수님을 닮은 아이로 자라가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가는 아이!’ [날이 갈수록 주의 두루 광명하게 비치고 천성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찬송458장2절).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아이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는 아이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스러울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아이를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아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아이로 자랄 때에 ‘효다운 효’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에 부모를 지옥으로 보내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사람들에게도 더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가야 합니다. 나도 한참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을 때 동네분들과 모를 심을 때 어른들 사이에 끼여들어 농담을 하다가 “이 버릇 없는 놈아!”라는 말을 듣고서 그 하나님께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른들 앞에서 말의 실수를 거의 안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기적인 아이로 자라서는 안 됩니다. 마음 씀씀이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아이들이 그렇게도 살벌합니까? 초등학교 내에까지 폭력서클이 파고 들었다고 할 때 그런 데 가담한 자식들의 부모는 얼마나 애간장이 다 녹겠습니까? 한참 귀염받고 사랑을 덤뻑 받고 자라가야 할 아이들이 왜 어두운 곳에서 다른 아이들을 왕따시키고 두들겨 패고, 심지어는 “가정이 싫다!”고 말하면서 가출을 해야 합니까? 그 마음에 예수님이 있다면 그렇게 행동을 하겠습니까? 부모님께와 이웃들에게, 아니 교우들에게 ‘사랑스러움’이 있는 자녀가 되십시오. “이 놈아 징그럽다, 정말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씀이 부모님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경우에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으면 그러겠습니까? 물론 부모님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녀된 도리로서는 그 어떤 경우에라도 부모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를 쓰십시오. 부모님을 거역하는 자식들이 있는 집은 웃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불행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가정은 아무리 풍부한 물질을 가졌다 해도 결코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자녀들이 부모님을 무시하는 경우를 봅니다. 특히 어머니를 무시하는 자녀들을 봅니다. 그 가운데서 어머니를 종처럼 부려먹는 자식들을 봅니다. 그리고 어떤 가정을 보면 아버지의 권위가 박탈된 경우를 봅니다. 자녀들이여, 아버지의 권위를 다시 회복시켜 드리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여 받드십시오!” 세상은 변해도 진리를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대로 살면 여러분의 장래는 반드시 큰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미루지 말고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부모를 행하여 사랑과 존경심을 가지고 ‘받들어 순종’합시다. 우리 모두 효자효녀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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