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믿음 II đức tin thật II
고린도후서 13장 5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흔히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어느 날 돌아보면 믿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얼마나 비탄스러운 마음이 생길까!
그러나 다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을 믿으며 그분 밖에는 구원하실 이가 없으신 것을 믿는가?"
"예, 아멘."하고 소리 지를 수 있다면 당신의 믿음은 확실한 믿음이다.
이 질문은 세례받을 때 목사 앞에서 서약할 때 대답했던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면서 가야 한다. 마치 운전자가 오일 계기판을 가끔씩 쳐다보며 기름 넣어야 할 때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우리의 믿음이란 고속질주를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성장하기도 하고 또로는 엄청난 슬럼프에 빠져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난관을 파헤치며 가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고 야곱 또한 그랬다. 그러니까 '믿음의 고속질주'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교만일 수 있으며 자신을 속이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가 예수께 뿌리를 깊이 박고 있기만 하다면 어떤 시련과 고통이 와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 되어 가는 인생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깨닫게 될 것이고 여기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감사와 찬양을 부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 믿음이다.
중요한 것은 뿌리깊은 신앙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골로새서 2장 6,7절 -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이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또 돌쩌귀밭에 떨어진 씨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처럼 되어서도 안 된다.
옥토, 즉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바라보는 십자가 중심의 복음의 아름다운 신앙에 뿌리를 깊이 박아야 한다.
안 그러면 이러저리 그냥 흔들리고 만다.
1. 참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2. 은혜에만 의지해야 한다
3. 착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
1. 참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갔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이 얘기는 너무나 많이 들어서 18번지처럼 외우고 다닌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말로만의 고백이 아니기를 바란다.
3년이나 예수를 따라다녔던 만큼 진실한 고백을 듣고 싶으셨던 예수시다.
예수께서는 매우 지혜롭게 질문을 던지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덜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그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은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태복음 16장 16절 -
이 대답은 다른 모든 제자들도 이 고백에 동의했을 것이다. 아니 개개인이 동일한 대답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밖에 있는 '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가 아니었다. 바로 3년 이상을 함께 했던 바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있으셨다.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했다. 그것도 길게 말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장 17-19절-
그런데 나는 왜 예수께서 이 장소에서 이렇게 질문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곳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직접 가 보았다. 이것은 현제 '텔 단טלדן'이란 곳이다.
옛날 단지파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예수님 당시 가이사랴 빌립보이다. 이곳은 요단강의 발원지가 되는 헬몬산의 기슭이다.
나는 이곳에서 시원한 발에 발을 담그며 묵상을 했다. 척박한 이스라엘 땅에서 이것을 만나면 마치 에덴동산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곳이다.
문제는 여로보암 왕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는 것을 차단하려고 이곳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제단을 쌓게 했다.
이런 이방 신 우상을 섬기던 위치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듣고 싶은 고백이 있으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우리는 괜히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모든 우상과 이단을 배격하는 고백이다. 마리아가 신성한 여자로 변신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단지 그 여인은 예수를 낳은 신앙의 여성이며 그때 아름답게 쓰임을 받은 것 외에 그 어떤 이상한 설도 끼여 넣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중요한 것은 적어도 신랑신부가 첫날밤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이상으로 소중한 고백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역사적으로 신앙고백 또는 신조를 강조해 왔던 것이다.
이 고백 속에서 거듭남이 있고 이 고백 위에서 튼튼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이 무너지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한 개인으로서도 늘 이것을 점검하며 다시 자신을 확증해야만 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고린도후서 13장 5절-
2. 은혜에만 의지해야 한다
내가 이 얘기를 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사는 것이 '내가 잘 해서?'가 아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목사들이나 신자들이 교만하고 도도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과연 당신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오늘 믿음으 가졌다고 말하고 또 때로는 이 믿음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말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때'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를 망각하다가 교만하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만 봐도 '인기스타 목사'가 됐던 분들이 지금 어떠한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끼니도 잇기 어렵게 자라 후 은혜를 받아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개척교회를 세웠다.
고생고생해서 교회를 일구다 보니 어느 날 명성 있는 교회가 되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데 이것을 망각하고 자기가 능력 있어서, 자기의 노력으로 이렇게 된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자기 합리화'에 빠지다 보니 교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이 다 옳은 줄로 착각하기도 하고 자기가 교회와 교단의 큰 어른으로 착각한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린도전서 8장 2절-
이런 일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것마저도 '아니올시다.'로 매듭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바울사도를 늘 다시 보게 된다. 정말 그가 훌륭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 은혜에 의지했다는 것이다. 만일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이나 어떤 지위를 불문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사실은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가 답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이 대단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빼어버린다면 그것은 폐품처리 감이 되고 만다.
참된 믿음에는 교만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겸손만이 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다." -에베소서 2장 8절-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다른 것을 갖다 대면 댈수록 딴소리, 핑곗거리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나는 이미 죽었다. 십자가 밑에 장사지냈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교만해질 수 있는가! 그런데 교만해질 수 있다. '그때'를 망각하면 교만해질 수 있다.
베드로도 자신을 잘 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베드로전서 5장 5,6절-
이 말은 잘못된 권위주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다. 잘 가르치는 지도자의 말씀에 복종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때에 우리의 믿음은 더욱 온전하게 되고 견고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면 늘 은혜만을 벗삼아 살아가며 하루하루 그 은혜를 힘입기 위하여 말씀을 경청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참 믿음이란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설 수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믿음이다.
큰 교회를 이루었어도, 헌금을 많이 했어도,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되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로 귀결되어야만 참 믿음의 헌신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3. 착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
자, 믿음의 점검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착한 행실'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복음 5장 13,14절-
그런데 "소금이 되라.", 또는 "빛이 되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를 따르면, 즉 예수를 믿으면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께로부터 얻은 선물이다.
한 마디로 예수 믿으면 마음이 착해질 수밖에 없다가 된다. 이 역할을 누가 하실까 생각해 보라.
바로 성령께서 하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사실 예수 믿으면 본질의 변화, 즉 본성의 변화가 함께 일어난다. 그 변화란 '사망에서 생명으로!'이며 '악에서 선으로!'이다.
무론 나는 '성화;sanctification,聖化'를 믿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듭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화도 없다.
우리는 거듭나는 순간 우리의 향하여 가는 방행이 달라졌고 바라보는 대상도 달라졌다.
따라서 우리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가 우리의 삶의 모델이다.
그렇다면 "예수믿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는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유가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크리스천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것은 '착하지가 않다.'
아니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하다.'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나님 보실 때에 '착한 행실'이란 대체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보는 분에도 '착한 행동'으로 더러 난다.
그런데 현실이 어떤가?
사실 나도 답이 없다. 그래서 답답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예수를 바라본다. 베드로처럼 물결을 바라보다가는 물 위로 걷지 못하고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다.
우리가 정상적인 눈으로 성경을 읽어나가야 한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비롯하여 잠언서를 읽어보라. 우리 인생 행동 지침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려주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
이 말씀 한 구절만 바르게 이해해도 엉뚱한 짓은 안 할 것이다.
너무나 엉뚱한 발상을 하면서 예수님 이름 팔이나 하니까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엉뚱한 발상으로 국가적 질병 방역지침에도 협조를 안 하고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오히려 방해 짓을 하니까 '악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우리는 종교가가 되려고 하면 안 된다. "예수의 제자가 되라!"
이거 하나면 된다.
"이럴 때 예수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이럴 때 예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실까?"
늘 이렇게 물음을 던지며 살자.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소금과 빛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불신자)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6절-
자, 우리의 착한 행실이란 지금 상황으로 치자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방역에 적극 협조 내지는 앞장을 서게 될 때에 오히려 '전도의 기회'라는 것이다.
너무나 쉬운 것을 어렵게 몰고 가니까 한국교회가 '종교인'들로 가득 차 있고 참 믿음을 가진 '예수의 제자'가 적다는 것이다.
그래,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대상들과 착한 이웃으로 살아가야 한다.
야고보서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 말, 말로만 떠벌이고 행동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경고를 날렸던 메시지가 야고보서이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도 싸웠다. 그리고 VIP의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야고보서 5장 5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서 1장 22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착하게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회 안에 파고든 세속주의적인 가치에 자신도 모르게 물든다면 변질된 신앙을 갖게 된다. 교회에서 잘못된 이념을 배우고 나서 세상에 나가서는 엉뚱한 짓하며 예수 팔이를 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26절-
야고보서는 우리를 참 믿음에로 이끌어주는 책이다. 그러니 만큼 야고보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착한 행실을 가진 신자 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참 믿음이란 무엇인가 고민해 보았다. 우선은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의 점검이 필요하다.
고백은 늘 해도 부족하다. 마치 "사랑합니다."를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신앙고백도 늘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를 바라보는 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쉬운 존재이다. 나도 모르는 순간 '내가 나 되어서' 교만해지는 수가 있다.
교만은 금물이다. 언제라도 우리는 겸허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또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만 하는 인생임을 되새기며 살아야 한다.
"이 만큼이면 됐다."라는 생각을 할 때에 교만해진다. "늘 아쉰 마음뿐입니다.", "늘 부족합니다."라고 고백을 드려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복으로 함께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착해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벨처럼 착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줄기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있고 또한 착한 양심의 사랑 실천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속에서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셨다.
우리가 늘 잘못된 종교가들을 바라보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실족되기 쉽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입에서 나오는 말부터 착한 말이 나오고 착한 행실로 이어져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의 믿음이 주안에서 헛되지 아니함을 확인하게 된다.
여러분은 산 믿음, 즉 참 믿음의 사람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아,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구었구나! 어쩐지 참 착하더라."라는 말을 듣도록 믿자.
같이 시비하는 일에 얽혀버리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 악착같이 덤비는 태도로는 정말 평생 한 명도 전도를 못할 것이다.
참 믿음의 증거를 행동으로 보여주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장 22절-
말로써만 떠드는 신앙이 아니라 행함으로써 보여주는 신앙이 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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