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 예수 Jesus the Refuge
- 시편 46편 1-11절-
-들어가는 말-
왜 집을 짓고 사는가? 왜 옷을 입어야 하는가? 왜 먹어야 하는가?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다.
동물이나 타인으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해서이며 더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이며 굶주림을 피하고 건강을 지켜가기 위해서이다.
역사가 이렇게 길게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기초적인 것마저도 해결을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것을 걱정하고 살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6장 30절-
그러나 인간들은 여전히 이런 것들을 걱정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서울 변두리도 10억 원 이상 줘야 아파트 한 채를 겨우 마련할 거라는 얘기도 있다.
참 어이가 없고 한숨이 절로 나고 별꼴이 반짝이다. 생각해 보면 돈 없는 젊은이들은 정말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내 개인으로서는 이미 답을 찾았다.
그러한 경쟁의 대열에 끼여서 허덕일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해 보라.
인생은 어차피 모험이다. 그리고 그 모험을 예수 안에서 하는 것을 배워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이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우리가 세상의 가치에 묶여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히려 거기서 자유하다면 정말 행복한 인생이 될 텐데 말이다.
우리는 영혼의 가치에 매달려야 한다. 이미 그 소중함을 알았기에 이젠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의 방식에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의 가치’이며 ‘영혼의 쉴 곳’, 즉 ‘영혼의 피난처’가 중요하다. 언제까지 우리가 세상의 공식에 맞춰서 살아서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갈 때는 한 평의 땅도 가지고 가지 못할 텐데 거기에 목을 매고 살 것인가!
코빗 19(COVID 19)로. 이런 때에 우리의 피할 곳이 어디인가! 2020년 한 해는 이 질병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여기에는 지구촌 어느 누구에게도 외예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나 좀 살려주세요! 나도 살고 싶어요!” 나도 살고 싶어서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비대면으로 사는 것도 쉽지가 않다. 1년 이상 한국에 못 가고 있으니까 때론 답답하다. 가려고 맘만 먹었으면 열 번이라고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도 알았다.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다. 한국은 의료기술이 뛰어나고 질병예방관리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뛰어난 나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하다.
우리의 영혼이 피할 데가 어디인가? 나는 여기서 피난처 되신 예수를 생각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예수께 더 가까이 가야 한다. 이것이 정답이다.
정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주는 안위를 추구한다면 그에 정비례해서 마음고생이 더욱 클 것이다.
1.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다
2. 예수가 피난처이시다
3. 교회를 피난처로 삼아라
1.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다
코빗19 사태를 맞으면서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할까를 깊이 묵상하며 지내왔다.
과연 세상은 안전한 곳이 있는가! 나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외국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철수를 했다.
나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예수를 피난처 삼아 조심하며 보내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지금까지 안전하게 지내왔다.
생각보다 이 나라 정부가 지혜롭게 대처를 잘했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받더라도 일단 외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국제선 항공을 차단하고 철저한 격리와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나는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방역을 해내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꾸준히 코빗 19 확진 자 0(zero)을 달려오다가 요즘 몇 명 발생하자 다시 엄격한 조치로 유행을 막아내고 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어디서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고 무엇을 위해 살며 누구를 바라보고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임시방편으로만 모든 일을 대처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 정보에만 민감하여 자녀는 어느 학교로 보낼 것인가! 그리고 어느 직장에 엮어줘야 하는가! 어느 쪽에 투자해야 집값 땅값이 많이 오를까!
늘 이런 기대 속에서 약삭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자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질주하고 있다.
베트남도 농촌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우르르 밀려드는 것을 본다. 물론 이것을 이용하여 경제 대국을 이뤄보겠다는 정부 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경제 대물 결에 휩쓸려 물 만난 고기떼처럼 우르르 도시로 밀려들고 있다.
손에 몇 푼 쥐기 위해서 정말 이리저리 오토바이를 타고 부지런히 달린다.
이제는 자가용 사기 붐이 일어나니까 너도나도 은행에서 대출을 내서 차를 마련한다.
앞으로 5년 내로 절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대출을 내서 아파트로 들어가서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야심대로 결혼해서 한두 명의 자녀를 낳고 뼈가 빠지도록 자녀교육에 투자할 것이다.
영어학원, 수학학원, 음악학원 등으로... 이 열풍이 시작 된지가 5년쯤 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 영혼의 안식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사실 전혀 연관이 없다.
이들의 장래도 지금의 한국의 답습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현실이고 보면 크리스천일지라도 이것을 피해 갈 수만은 없다. 어차피 인생으로 와서 그 시대의 물결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의해서 흘러가다 보면 진정한 ‘영혼의 안식처’를 망각해 버리기 쉽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야고보서 4장 14절-
우리는 떠돌이 인생이 아니다.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그리고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고 거기에 온 몸과 맘을 바쳐야 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지만 여기서 정착하고 안주할 수가 없다.
우리는 정처 없이 살다 가는 나그네이기에 더더욱 피난처가 필요하다. 소낙비가 오면 처마 밑으로 피하듯이 우리의 영혼이 피할 곳이 있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있다. 이것을 바르게 안다면 이 땅에 살아도 날마다 천국의 삶을 살 수가 있다.
정말 그렇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참 평화를 맛보고 누리는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단의 세력에게 노출되어 있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피난처가 있다. 이 피난처가 없다면 우리는 여지없이 사단의 먹이사슬이 되고 말 것이다.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다. 진짜 그런가! 진짜다.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세상 나라에 두면 둘수록 실망의 크기가 그만큼 커질 따름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세상을 피난처로 삼으려 하는가!
사단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미끼를 던진다. “옛날에 한 소녀가 있어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라 생각하며 살았답니다.”
막연한 기대는 위험하다. 인간들은 돈이 많으면 그 마음에 큰 위안이 될 거라고 믿고 경제의 풍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속지 말자.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에베소서 5장 15,16절-
2. 예수가 피난처이시다
예수는 성육신하셨다.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멀리 보이기만 했던 피난처가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자리에까지 오셔서 그의 빛과 영광을 보았다.
재앙이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더 이상 국경을 넘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눈을 뜨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벌써 일어섰다. 한센병도 고침을 받았다. 심지어는 죽은 자가 살아났다.
옷자락만 살짝 만졌어도 혈루증이 나아버렸다. 정말 불치의 38년이나 된 병자도 깨끗함을 받았다.
이런 일을 통해 진정한 우리의 쉴 곳이 ‘구주 예수’의 품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영혼을 치료해 주시는 의사 중의 의시였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한복음 5장 14절-
예수는 우리의 피난처시다. 그가 어느 날 배를 타고 가다가 주무셨다. 갑자기 불어닥친 광풍에 배가 뒤집힐 지경인데 예수는 태평하게 주무셨다.
제자들은 당황한 나머지 제자들은 급히 예수를 깨웠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마가복음 4장 38절-
제자들의 피난처는 예수였다. 맞다. 바로 예수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마가복음 4장 39절-
예수는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들처럼 되셨다. 그도 배고픔을 느끼셨다. 그는 때로는 울기도 하셨다. 그리고 온갖 시험을 다 받으셨다. 끝내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분이 지금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장 15절-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피난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장 16절-
자, 오늘날 내 피난처가 되신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 사실을 결코 간과하지 말자.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1장 26,27절-
이제 우리는 일상에서 예수를 피난처 삼아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우리에게는 세상적인 권세나 어떤 경제적인 풍요가 있어야 안위를 얻거나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예수! 그분 한 분으로 만족을 누리게 살 수 있는 신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아서 세상만 보고 사는가! 우리의 쉴 곳은 예수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셨다.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복음 7장 37,38절-
성령강림절 이후로 성령은 교회에 오셨고 각 성도들 속에 직접 오셨다.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도행전 2장 3,4절-
성령께서는 이 사실을 보증하고 계시며 동시에 성령 역시도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예수와 성령의 보호 아래 사는 인생이 되었다.
성도들이여,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고 산다면 언제나 우리는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피난처가 있으니 정말 행복하다. 정말 두려움이 없다.
허허벌판에 있을 때 갑자가 소나기가 쏟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비를 다 맞아야 한다.
만일 우리 인생 앞에 피난처가 없다면 우리는 여지없이 마귀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예수를 친히 보내주시고 그를 피난처로 삼게 하셨다.
“하나님(예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편 1절-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장 33절-
3. 교회를 피난처로 삼아라
우리는 교회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드렸을 때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 18절- 하셨다.
교회가 없으면 음부의 권세, 즉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보호하시며 예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가 되신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에베소서 1장 22절-
교회가 피난처이다. 왜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일 뿐만 아니라,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목사나 교사들에게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 가르침에 있어서 예수의 복음을 바르게 아는 자의 가르침을 받을 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르게 되고 교회의 마래가 있기 때문이다.
바른 복음 진리를 향하여 가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리더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경험하며 예수께로부터 오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교회의 일원으로써 복음 진리의 신앙 위에 바르게 터를 세워가고 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세상 일에 관심이 너무 많아졌다. 교회 운영을 세상 경영 방식 그대로 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양을 잘 보살피며 바른 복음의 꼴로 먹어야 할 목사들이 방향을 어디로 틀고 있는가에 의문이 드는 교회들이 많아졌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매머드처치Mammoth church 또는 매가처치Megachurch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런 걸 꿈꾸며 기업처럼 변해버렸다.
교회는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지친 모습으로 교회 안에 들어오면 활기가 솟아나야 한다.
그 활기는 바른 복음 메시지를 받고 예수의 통치 아래 엎드리며 세상이 못 주는 위로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교황이나 교주처럼 되어 있다면 그것이 예수께서 바라시는 교회이겠는가!
교회가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 화려한 인테리어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웅장한 찬양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20절-
이제 교회는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란 세상의 위험한 물결, 즉 사망의 골짜기에서 불러냄(콜 아웃)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성경적인 교회로 돌아갈 때에 우리의 영혼은 진정한 피난처를 만나고 쉼을 얻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고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교회가 진정한 피난처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는 지금도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 그리고 그 교회 하나하나를 평가하고 계신다. 진정으로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칭찬받는 교회로 가야 한다.
어떤 기복주의도 안 된다. 어떤 신비주의도 안 된다. 어떤 이단적 사상도 안 된다.
오직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때에 우리 속에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실 것이며 온 성도들은 기쁨과 화평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가 피할 곳은 십자가밖에 없다.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늘 외쳐야 한다. “피 묻은 복음이라야 영혼을 말게 할 수 있다.”
나는 ‘복음우산’이란 복음 송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심판이 나에겐 없네 주의 피 내 죄 가리네
날 위해 주님 돌아가셨으니 심판이 나에겐 없네. “.“
우리의 피난처는 십자가와 그의 보혈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것을 망각하면 교회의 본질은 퇴색되어 가는 것이다. 십자가로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싶다.
“나의 영혼 피할 데 예수밖에 없으니 혼자 있게 마시고 주여 도와주소서!
구주 의지하옵고 도와주심 비오니 할 수 없는 죄인을 주여 보호하소서!” -찬송가 388장 2절-
“주 날게 밑 참된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 해 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찬송가 419장 2절-
-나가는 말-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 방식으로 피난처를 삼아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피난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영혼의 안식’을 제공할 수 없다. 오히려 갈증만 더하는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피난처시다. 그가 세상에 오셨다. 그가 오셨어도 어둠의 세력은 아직도 연막탄을 뿌리며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해 오고 있다.
우리는 깨어 있어 예수의 진리를 사수하며 교회를 교회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포스트 코로나를 말하며 또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으로 갈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에 매료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는 예수뿐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 8절-
예수께서는 지금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 온전히 행하지 못할지라도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온전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계신다.
코빗 19로 인해 교회가 직격탄을 맞은 것처럼 되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더 정신을 차리고 깨어야 한다.
이런 일로 알곡 인가 쭉정이인가가 더 확연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 없는 목회자들과 교인들로 인해 한국교회는 큰 진통을 겪고 있다. 이것도 지나간다.
그러나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수의 교회’이다.
아무리 몸집이 커도 예수께서 보실 때 사데교회가 되어있다면 희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인이 있어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 되게 한다면 불씨는 되살아날 것이다.
피난처 되신 예수여,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참된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이어야 할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버림받은 교회가 될까봐 두려움마저 느낍니다.
다시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그 성도들이 첫 사랑을 회복하고 제 위치로 돌아와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을 의지하며 증거하며 예수의 모범에 따르는 건전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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