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상식 常識 Ý thức chung

좁은길을 걸으며 2020. 11. 29. 01:49

상식 常識 Ý thức chung

신명기 30장 11-14절

 

-들어가는 말-

 

상식의 하나님, 상식 있는 인간

Thượng đế là Thượng đế của lẽ thường. Một người có ý thức chung

하나님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상식ommon sense을 주셨다. 인간이면 누구나 상식적이어야 하고 상식을 존중해야 한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바탕에 상식이 깔려있고 그 위에 좋은 지식과 미덕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상식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및 사리분별 능력을 통칭한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크리스천들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세상 초등학문의 지식의 건전성에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고상함이 있는 건전한 상식 가 되어야 한다. 사실 잘못된 상식도 상식이라고 하며 그 상식이 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무식이 상식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보실 땐 몰상식이다.

그러니 만큼 우리는 하나님 진리의 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든지 세상의 잘못된 상식의 물결에 휩쓸려 갈 수가 있다. 잘못된 이념이나 이단사설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 거기서 헤어나오기란 정말 어렵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 디모데후서 3방 7절-

나는 나름대로 매우 상식을 존중하며 상식 있는 인간이 되어보려고 노력하고 지내왔다. 만일 상식에 못 미치는 말이나 행동을 하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외톨이가 되거나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평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 크리스천들을 보라.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에도 못 미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경우를 너무나 쉽게 본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하며 고민을 수없이 많이 해 보았다.

세상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또한 거기에 걸맞은 생각이나 말, 행동을 할 줄 아는 상식인이 되어야한다.

 

당신은 상식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대부분 ‘라고 하겠지만 실상은 상식선에서 벗어난 사고와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물론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해지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하나님은 상식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상식의 인간으로 지으셨다. 이것에 감사한다.

 

 

1. 상식常識의 하나님

2. 상식常識의 말씀

3. 상식常識의 사람

 

 

1. 상식常識의 하나님

 

하나님은 상식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자신이 진리이시며 모든 것을 정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상식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항상 그분은 인간의 상식을 능가하는 분이시지만 인간의 체질을 아시고 거기에 걸맞게 상식으로 대해 주시며 건전한 상식을 존중해 주시는 분이기에 상식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하신 일을 가만히 묵상해 보라.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하셨다. 그 속에 사는 우리 인간들은 그 혜택을 입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것을 느끼며 사랑가도록 오감을 주셨다.

나는 요즘 하나님을 느끼며 산다. 그 어느 것 하나를 바라봐도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능력, 그리고 질서를 느끼며 감사한다.

그분이 펼쳐놓은 이 아름다운 그림책을 보며 늘 노래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것을 숭배하거나 어떤 잘못된 이단 사상이나 거짓된 신화를 따르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왜냐하면 상식에도 어긋난 일에 정신을 팔며 헛되이 정신과 돈을 쏟아붓고 영혼까지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신화, 진화론 그리고 세속적 철학에 빠져 있는 자들은 얘기는 그들 자신들끼리 통하는 상식일지라도 그것은 기독교 진리적 관심에서 볼 때, 즉 하나님이 보실 때 뭐라고 하실까!

그것은 거짓된 지식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들과 그것을 가지고 논쟁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디모데전서 6장 20절-

세상의 숱한 얘기들은 비상식적인 것을 진리나 되는 것처럼 둔갑질을 해 놓았다.

이단도 미찬 가지이다. 그들 역시 미혹의 영의 덫에 이미 걸려들어 나올 수가 없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한일서 4장 1절-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상식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그것이 십계명이며 율법책과 선지자들의 얘기다.

물론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십계명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라.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비상식적인 인간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고 숭배하게 되었고 또 그것을 당연한 관행처럼 지켜왔다.

상식에 위배되는 일을 해왔던 그들은 자기들의 풍습과 전통이 들어오며 배격하며 박해를 해 왔다. 그러니까 상식이 어긋나고 나면 고치기 어려운 관행이나 관습에 찌들게 되고 만다.

인간은 상식에도 안 맞는 바벨탑을 쌓아 올리려는 일에 늘 몰두해 오며 자기들과 다른 가치를 말하면 적대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식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치도 않은 일을 명령하시거나 일부러 낙방을 시키려고 테스트를 하신 일이 없다.

누구나 다 맘만 먹으면 쉽게 이행할 수 있는 일을 명하셨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여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명기 30장 11-14절-

어찌 보면 누워서 떡먹기만큼이나 쉬운 것을 명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에게 미혹된 인간들은 이 길을 멀리 하고 스스로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여 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끼리 지켜야 할 상식을 말씀하셨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도덕적 기준이라고도 한다

이 인륜에게 관한 내용도 보면 눈에 보이는 부모형제와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상식적인 선에서 명령하셨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식선에서 말씀하신 것뿐이다.

무엇이 어려운가! 당연한 것을 못하고 세상은 시기, 미움. 다툼,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쉽게 풀고 가면 될 일을 평생 원수로 여기며 가슴에 응어리를 가지고 살다가 눈을 감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불의와 죄와 타협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시며 초자연, 즉 창조의 행위를 나타내시는 경우가 있으실 뿐이다.

이런 경우 이게 비상식적인 일이 아닌가 하고 의아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신 것 외에 상식 밖에서 이뤄진 일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정당한 방법과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뿐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비상 섭리를 통해서 나타내시지만 그것이 죄와 불의와의 타협이 아닌 이상 하나님의 권리이면서 또한 능력으로 나타낸 놀라운 기적이다.

곧 이것은 몰상식한 마귀를 대적하는 최신 성능의 화력을 지닌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3장 5절-

하나님은 과학을 거슬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바른 과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지혜를 더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인류가 함께 공유하며 나누며 평화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른 역사관을 제시해 주시며 바른 과학적 사고가 과학이 되게 하시며 바른 역사관이 역사되게 하시며 문학, 예술, 사회적 가치가 진리적 가치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그 사회가 밝아지게 하신다.

따라서 건전한 상식을 가진 자들이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인류는 다 한 가지로 치우쳤다. 저들의 목구멍은 다 열린 무덤이 되고 말았다.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로마서 3장 12,1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상식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몰상식하게 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진리의 빛을 비춰주셨다. 죄악으로 찌들어 살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지극히 상식 인간으로 돌려놓기를 원하셨다.

그래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상식을 제시하셨다.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정말 상식적이었다. 사실 알고 보면 예수는 몰상식한 인간들에게 처형을 당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이 상식적이라면서 마땅히 예수를 처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비상식적인 인간들의 입을 봉쇄하셨다. 진리를 거슬린 인간들은 상식도 거슬렸다.

우리는 복음서를 보면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죄를 씌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나는 그에게서 이무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요한복음 1818-라고 했다. 그러나 빌라도마저도 그 상식을 저버렸다. 그 까닭에 예수는 십자가 죽음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난 후 무덤을 봉쇄하고 병사들까지 동원해 곧게 지켰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하셨다. 예수의 부활로 몰상식한 인간들의 입을 봉쇄하셨다. 예수의 부활 소식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유다와 온 인류, 즉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지극히 당연한 사실로 다가왔다. 하나님의 기적이 오늘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서 상식이 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상식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식, 즉 '진리의 바른 지식인 복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그들에게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비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깊은 고민을 해 봐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지금 세상을 대하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상식이어야 한다.

내가 아는 기독교인의 양식과 상식은 미덕의 삶과 사랑으로써만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고 본다.

 

 

2. 상식常識의 말씀

 

이치를 따져보라. 이 우주를 누가 만드셨나?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신다.

유일하게도 인간에는 이것을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재능과 역사의 진행에 따른 인식, 그리고 문자와 예술 등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

정말 하나님은 멋있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시편 111편 2절-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시각으로 우주를 바라보면 볼수록 이치에 딱딱 맞다. 아!!! 얼마나 상식적인 하나님이신가에 다시 놀라곤 한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잘 받기만 한다면 그 자체로 인간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경제와 과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민주주의로 바뀐다 해도 그것이 우리 인류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지금 세상은 과학적 발달로 인해 모든 것이 편리해졌다.

그러나 왜 인간들의 불만적인 욕구는 하늘을 찌르듯 할까!

복지제도가 발전하여 실업수당이 나오고 노인수당이 나오고 무상 제도들이 나왔어도 그것에 만족하기는커녕 더욱더 불안의 요소들이 증폭되어 가는 이유는 뭘까!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고 인본주의 바탕에서 거짓된 신화를 앞세우고 실용주의로 줄달음질 할 때 거기서 얻는 것은 절망, 슬픔과 고생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 상식을 저버렸다. 사단이 와서 유혹할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라고 하자 헛된 욕심에 빠져들게 들고 말았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한다. 그리고 상식선을 넘어서게 만든다.

하나님은 어려운 것을 부탁하시지 않으셨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이 상식을 짓밟고 말았다.

세상에는 자기의 본문이라는 게 있다. 그러나 상식선을 넘어서게 되면 어리석은 자로 전락되고 만다.

노아는 세 아들 모두 결혼을 시켰다. 노아는 포도농사를 했는데 발효된 포도주를 마셨다. 그는 취해서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를 발견한 함은 그것을 다른 두 아들과 자부들에게 고해바쳤다.얼로리 꼴로리 아버지가 홀랑 벗고 눠 계셔!”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뒷걸음쳐서 아버지를 덮어드렸다.

술에서 깬 노아는 그 사실을 알고 함의 자손 가나안에게는 저주를 했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을 못 이행하고 사는 인간들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우리 상식적이지 못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

얼마나 감사한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우리는 이제  성경으로, 복음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만족이 있다. 물론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도 복음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인간됨에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상식의 책이다.

우리는 아무리 자유가 좋다고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자유주의'에 노출이 되면 자칫 방임과 방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다시 종의 멍에를 매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상식이다.

그런데 이름뿐인 신자들은 세속주의에 빠져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도 못하며 휩쓸려가버린다.

 

이제 우리는 이미 복음을 통해서 깨달은 진리를 가지고 행동하는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마음의 심비에 상식의 법을 새겨주신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상식을 좇아서 처신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리고 상식의 영이시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고린도후서 3장 2절-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 속에서 진리의 영으로 계시며 지극히 상식적인 삶의 살도록 촉구하신다.

성경을 날마다 읽어야 하는 이유는,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기분이 되고 이것을 상식화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 속에 섞여 살지만 우리의 눈동자는 빛이 나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떠오르는 샛별처럼 초롱초롱 반짝거려야 한다.

이럴 때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고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같이 마시고 즐기며 같이 농담이나 하고 거짓된 일에 빠지거나 동조하는 것으로는 결코 저들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모세 오경을 보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된 인간들을 어떻게 멸망시키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처럼 선민 된 백성이 아닐지라도 상식에 어긋난 짓을 일삼는 이집트의 왕들과 가나안 족속을 멸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다.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신명기 820-

이스라엘이 이방 사람들의 풍속에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결과로 어떻게 되었던가 하는 사실을 사사기의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고 바벨론 포로 얘기들 속에서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성경으로, 복음 진리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특히 잠언 성경을 많이 읽어라. 솔로몬의 숱한 얘기들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식을 제공하고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어라. 하나님은 상식적이지 못한 왕들을 폐하셨다. 상식적인 왕을 튼튼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상식선을 떠나서 역사를 진행하시지 않으셨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전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도록 한다면 좋겠다.

어디를 가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상식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

 

 

3. 상식常識의 사람

 

상식적인 인간으로 사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니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도 기도해야 한다.

진리는 상식을 거슬리지 않는다. 따라서 진리의 사람은 상식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 예수의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세상 밖에서 살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만큼 하루하루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속에서 우리의 처신은 무엇인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로마서 122-

여기에 충분한 답이 있다.

1.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죄악의 삶과 그와 같은 방식-

2.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된 새로운 폼 -옛 삶의 사고와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

3. 하나님의 뜻 분별 - 질문의 삶-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가? 기뻐하시는 뜻인가? 온전하신 뜻인가?”

 

세속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거룩한 삶, 또는 경건한 삶의 태도를 잃지 않는 모습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보면 어떠한가? 세상 사람들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말과 행동을 하며 오히려 세상의 조롱을 사고 있는 것을 숱하게 많이 보고 있다.

 

거짓된 자들을 동조하고 거기에 가담하여 목숨 걸듯이 행동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제제하면 기독교를 핍박한다고까지 덤터기를 씌우고 하는 것을 보면 꼭 사이비 집단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이런 상식 없는 말로 교인들을 선동하는 대형교회 목사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에 더욱 입이 안 벌어질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미국의 경우를 보라. 기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코로나 창궐을 부추기는 행태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들은 마스크 쓰는 것조차 조롱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그렇게 했다.

게다가 선거 결과에도 승복하지 하지 않다가 세계 사람들이 보는 데서 패어 플레이 정신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을 무시했다. 그런데도 이것이 옳은 것인 것 마냥 지지하고 억지 쓰는 군중들을 보라.

 

우리는 상식주의자들이 되어야 한다. 크리스천들일수록 더욱 그리해야 한다.

그렇게 안 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욕을 먹는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다. 성령과 예수는 우리가 지극히 상식선에서 처신할 수 있도록 날마다 지각을 주신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할수록 광적인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다.

 

돈을 사용하는 문제도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도 그렇고 또 개인의 생활비나 사회적 활동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도 마찬 가지이다.

쓸 데 없는 곳에 낭비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기본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는 돈이 되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는 이곳에 살면서 나의 전도 대상을 위해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다. 먹여야 하고 함께 하여야 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데에 주로 들어가는 비용이 크다.

다만 분수에 어긋나지 않게 균형감 있게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내 개인의 활동을 위해서는 택시를 안 타고 걸어가거나 시내버스를 이용하고 밖에서 식사하는 것보다 거의 대부분을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다.

이것이 나의 상식의 삶에 정착되어 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일어나면 기도부터 하는가! 성경을 묵상하는가! 그리고 일상에서 예수를 찾고 만나고 있는가!

이렇게 산다면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이렇게만 산다면 하늘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갈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늘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이 나서 생활하다면 더 좋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일원화 된 창구가 있다. 그것은 성경이다. 그 안에 나타난 복음이다. 그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이다.

늘 주님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살아간다면 세상에게 보여줄 것은 예수의 모범 밖에 없다.

 

 

 

-나가는 말-

 

나는 어디를 가나 상식적인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으로 살게 되었다. 왜냐하면 비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 자체부터가 비정상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들이여, 마음을 어디에 팔고 있는가?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가?

예수를 바르게 알고 복음진리를 바르게 알았다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하나하나에 대한 옳고 그름을 바르게 분별하게 되어야 할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뭔가?

깊은 통찰력도 없이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가는듯한 모습을 교회가 보여준다면 그것은 이미 상식적이지 못한 비상식 논리에 빠져버린 결과일 것이다가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슬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이 진리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린도후서 138-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로마서 22-

 

상식주의자가 되자. 예수께서도 상식에 어긋난 말과 행동을 하신 적이 없다.

명확한 답은 항상 성경에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덫에 걸리게 하려고 사람들을 시켜 예수를 시험대에 올렸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마태복음 22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태복음 2221-

이 얼마나 건실하고 건전하며 상식 있는 답변인가?

사도들도 상식에 있어서 건전했다.

예루살렘 회의 때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이 있었을 때에 야고보가 일어서서 하는 말을 보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재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사도헹전사도헹전 1528,29-

 

바울도 상식에 건전한 사람이었다. 처녀가 시집가는 문제, 과부가 재혼하는 문제를 다룰 때 어떻게 했던가?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고린도전서 726-

라는 말을 보라. 그는 자신의 상식을 말했다. 그러나 그 상식은 복음적인 시각으로 본 건전한 상식이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질문을 던져오거나 시험해 올 때에 성경적이며, 즉 복음적인 사고를 가지고 상식 있는 답변과 처신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사견을 가지고 고집하는 식으로 해서도 안 되며 이익집단처럼 행동해서도 안 되며 더군다나 사교집단처럼 막무간이어서도 안 된다.

건실한 상식을 가지고 ’, ‘아니요를 분명히 할 줄 알 때에 세상은 우리를 향해 상식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할 것이며 두려워하고 존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입에서 기독교는 참되다 Christianity Stands True."라는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하루하루 살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한 상식에 견주어서 세상을 보기를 바란다. 복음적은 시각으로 세상을 볼 줄 안다면 참된 상식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에베소서5장 15-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