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인간의 본성과 의義의 삶 Bản chất con người và Cuộc sống chính đáng

좁은길을 걸으며 2020. 11. 8. 01:41

인간의 본성과 의의 삶 Bản chất con người và Cuộc sống chính đáng

창세기 820-22

 

 

들어가는 말

 

인간의 본성 Human Nature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은 진화해 왔고 계속해서 진화한다고 말한다.

그럴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인간이 천사가 되는 법도 없고 귀신이 되는 법도 없고 짐승으로 후퇴되는 법도 없다.

특히 문화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그 시대의 문병의 옷을 입고 살기는 해도 그 본성이 달라졌거나 초기 인간보다 인격이 더 성숙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격이 아담의 인격보다 더 나아졌거나 훌륭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원래 그 본성이 하나님의 선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불법을 자행한 뒤 인간의 본성이 악하게 되었다.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창세기 8장 21절-

이런 인간의 상태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죄를 짓고서 싶어서 짓는 것이라기 보다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장 4절-

이 말은 우리가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 속에 '죄의 본성 Nature of Sinsful'이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을 닮은 한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 Children of wrath in nature'로 추락되고 말았다.

죄의 자리에서 허덕이며 사는 인간들은 지치고 피곤하여 '곤고한 인생 A painful life'이 되고 말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4절-

세상의 도덕주의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것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로마서 7장 22,23절-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짓고 살아간다.

바울은 죄 ἁμαρτία;하마르티아나 육신 σάρξ ;사르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했다. 아무리 우리가 구원을 받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본성’,  죄의 세력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이 상태에만 머문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인생일까!

그러나 우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용기있게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 있다.

나 자신만을 바라보면 안 된다. 눈을 들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날마나 매 순간마다 예수를 바라보고 산다면 얼마든지 이러한 곤고한 삶에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가 있다. 다행인 것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며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분이 계신다.

바울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유를 얻기를 갈망했던 때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은 '절대 불가'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써만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갈라디아서 2장 16절-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를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한 줄기의 큰 소망이다.

바울도 절망의 절규처럼 외치다가 그 순간 "잠깐만!" 하고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 법을 육신으로는 죄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 25절-

 

 

1. 의의 옷을 입으라

2. 성령으로 행하라

3. 의에게 종이 되라

 

 

1. 의의 옷을 입으라

 

과거의 우리의 삶은 죄의 누더기를 걸치고 사는 삶과 같았다. 그래서 목욕도 안 하고 더러운 곳에 뒹굴며 사는 미개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와 같은 삶을 당연하다고만 하고 있을 것인가!

 "죄를 짓는 자마다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장 4절-

그런데 이 죄는 어떤 정당성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냥 불법이다. 불법을 저지른 인간에게는 저주와 형벌이 따르게 되었다.

'죄와 저주 갇힌 인간'은 '형벌의 칼 아래 놓인 인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형벌이 따른다.

 

 

그러나 우리는 늘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를 입혀주신 분이 누구신가?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바로 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세례와 함께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 27절-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은 예수께서 고스란히 다 받으셨다.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구속의 능력을 통해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았다.

우리가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예수께서 다 받으시고 우레에게 '의의 옷', 즉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내 안에서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로새서 3 10-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마음속에 '새로운 창조질서'가 일어난다.

그러니까 예수를 바르게만 믿는다면 아주 똑똑한 사람이 된다. 그 형상의 회복과 같은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와, 대박!!!

우상과 미신에 찌든 사람들은 이런 역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이런 역사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가기 때문에 '육신의 연약'으로 얼마든지 죄를 지을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고의가 아닐지라도 죄를 지으면 다시 고뇌와 번민 속에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물론 회개해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 이서 2장 1절-

그러니까 우리가 죄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왜? 의의 옷을 입었지만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는 아직도 죄를 향한 욕망이 늘 발동하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으면 죄는 언제든지 우리 안에 역사한다.

이것을 외면하고 "나는 이제 절대로 죄를 안 짓는다." 이러면 거짓말쟁이가 되거나 이단자들의 밥이 될 수도 있다.

바울이 그렇게 힘차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능력의 사도가 되었지만. 그는 겸손히 말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린도전서 15장 31절-

구원받은 성도여! 당신은 예수의 보호막 아래서 살아야 한다. 항상 그분께 꼭 붙어있어야 한다.

그렇지 우리는 옛사람의 본성이 되살아나서 또 죄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 사도 역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장 14,14절-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으면 마귀는 틈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탁한 말씀이다. 아직 예수를 모르는 자들에게 이것을 당부했다라기 보다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당부한 말씀이다.

 

2. 성령으로 행하라

 

이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여러분은 걱정을 앞세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곧 성령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신다. 그분은 '보혜사'로 계시지 때문에 '돕는 자 Helper로, 상담자 Counseller로, 조언자 Advisor로, 형이나 오빠 Brother로, 선생 Master로 계신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장 4절-

바로 육신의 연약으로 인해 옛사람의 본성이 괴롭히려 할 때에 얼마든지 도와주시는 분이시며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는 겨우 몇 가지 일만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 인생의 전반을 도우시는 분이시며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으신 분이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 하시나니 곧 죄로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5장 6절-

그러니까 먼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 없는 본질 Innocent Nature'로 보내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고, 또한  인류의 구속을 이루셨다.

우리에게는 '무죄'라고 하셨다. "당신은 무죄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나 '무죄'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제 당신은 의인이야!"

우리의 적인 마귀가 제아무리 공격을 퍼붓는다고 할지라도 방패와 요새와 산성이 되신 여호와 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완전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장 1절-

이유가 뭐냐고요?

1) 예수가 내 대신 죽으셨다.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권한이 없다.

2)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장 2절-

이제 우리는 늘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 안에서 사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죄의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며 마귀가 우리를 넘어지게 하지 못한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장 18절-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는 것과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에 따르는 삶'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라디아서 5장 

성령 충만함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어 이끄시는 대로 행할 때에만 온전한 가치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에베소서 6장 18절-

이렇게 할 때에 우리가 '죄의 본성'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

 

우리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로 옷 입을 뿐만 아니라 늘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의에게 순종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장 13절-

자기 의를 내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냥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에 순종하면 된다.

우리 지체를 이 모습 이 대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義에게의 순종이다.

그러니까 이 '지체'란 하나님이 주신 사지백체와 정신, 재능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쓰라는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스스로 의를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의는 상대적 의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 의를 가지고 떳떳하게 항변할 수가 없다. "오직 의롭다 할 이는 예수시다."

"그가 우리의 의가 되셨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그가 하신 일을 힘입고 하나님 께 나가기만 하면 된다.

구약의 '상번제 常燔祭'를 드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번제를 기억하면서 제삼 시, 제육 시, 제구 시에 규칙적으로 기도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을 베드로도 실천하고 있었다. 제 구시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다.

그러니까 우리도 꼭 그렇게 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그리고 우리는 매일 기도 속에서 고백해야 한다. "당신의 의 때문입니다. 나는 의가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한 의'가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의의 행동,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갈 때만 '인정받을 수 있는 의'이다. 이 의를 힘입어 순종을 드렸을 때에 성령의 열매는 자동적으로 맺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단 한순간이라도 그리스도의 의를 취하지 않으면 호흡이 멈추는 것과 같이 되어버릴 것이고 그때부터는 육체의 일에 빠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의를 앞세우며 나가야' 한다.

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교만이며 그 순간 고집쟁이로 바뀌게 될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이나 도덕주의자들을 보면 그냥 알 수 있다. 인간끼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의 시비를 가릴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인간의 재판정에서는 보다 나은 쪽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자기 의"란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비교적 의'란 통하지 않는 것은 물론 '불법을 행한 자', 즉 '불법자'로 간주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철저하게 의롭다 할 인생은 세상에 아주 없다는 기억 해야 한다.

우리는 겸손히 평생 "그리스도의 의"만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아니 붙잡혀 있어야 한다.

곧 이것이 의義에게의 순종이다.

율법의 의를 주장하며 흠집 없이 살려고 애썼던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를 몰랐더라면 사망의 구렁텅이에 퐁당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삶에 비하면 허물투성이인 데다가 죄악투성 이이다. 그렇지라도 우리가 예수 앞에 나가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다면 '그리스도의 의'을 입혀주신다.

이건 크고 놀라운 기적이다. 우리는 이 의義에만 의지하고 나가야 한다. 이것이 곧 의義에게의 순종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보면 자기 의를 내세우며 잘난 행세를 하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자라면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입혀주신 의는 그냥 겉만 번지르르하게 페인팅하신 것이 아니다. 그의 성령을 보내셔서 '우와 진리의 새사람으로 지으심을 받게 하는 `내면의 질서', 즉 `속사람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셨다.

바로 성령께서는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이런 역사를 일으키신 분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입게 되면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성령 충만한 삶에서 멀어지면 얼마든지 '육신에 속한 본성'이 더러 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야 한다.

내 얘기가 너무 깊이 들어가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튼 이것을 신학적으로만 풀려고 하면 또 다른 의문만 낳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학적 지식이 빈약할지라도 날마다 신실한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하는 것만이 상책이다.

성령의 교통'을 통해서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교파나 종교의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주셨기에 이와 같은 믿음의 삶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성경 전체의 복음의 흐름을 조명하며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심부름할 뿐이다.

날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실 예수께 가서 생수를 마시라. 그러면 당신의 영혼에 만족함이 넘쳐날 것이다.

 

 

- 나가는 말 -

 

우리는 더 이상 '육체의 본능'에 사로잡혀서 패배자로 살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 자유인답게 사는 비결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마귀의 자녀'처럼 되었다가 '하나님의 자녀'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로마서 6 22-

우리는 형벌을 받을 자가 아니다. 이미 '신분의 변화'로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받은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속이려는 마귀의 수법은 아주 교묘하다. 그러니 만큼 우리는 '매일 성경 읽기', 또는 '성경 듣기' 그리고 '매일 기도하기'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는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니라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의 본성 속에 죄의 형벌에 두려움이 있다.

그들은 사단의 나라의 영역 안에 부림을 받고 살아간다.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절-

만일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그 순간 그들 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장 8절-

혹시 아직도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다면 '회개치 않은 죄'가 두려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런 경우 결단을 통해 회개하면 될 일이다.

또 어떤 이는 '믿음이 약해서'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도 문제가 될 수 없다. '온전히 믿기만 하면' 된다. 그 순간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리고 '복음 진리의 지식'이 부족할 때 겪을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붙드는 순간 두려움은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다.

오히려 "예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도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라고 느끼며 사명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되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나 바울은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로새서 1장 29절-

여기서 일꾼이란 섬기는 자라는 의미의 디아코노스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에서는 servant, 즉 종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본성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나니까 이렇게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도 남은 인생 동안 얼마든지 '의의 삶 Righteous life'의 자리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