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탓 Đổ lỗi

좁은길을 걸으며 2020. 10. 22. 11:53

탓 Đổ lỗi

고린도전서 10장 10-13절

 

 

-들어가는 말-

 

우리 인생 가운데서 부정적인 정서 가운데 하나가 '탓'이다.

세상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것으로 얼룩져 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여러 분 중에 상처를 많이 받고 살아온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누구에겐가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누구에겐가 큰 상처를 안겨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책임 떠넘기기'에 익숙해져 왔다.

바로 인간의 죄악 된 속성의 하나가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남을 탓하고 핑곗거리를 만들어 둘러다 붙이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미움, 분노, 증오로 이어진다.

우리가 살다 보면 주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특히 가족에게서, 형제에게서 상처를 많이 받는다.

상처를 준 자는 언제 그랬는지 기억도 못할 수 있지만 상처를 받은 자는 그것을 평생의 아픔을 가지고 괴로워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받은 상처만을 기억하고 평생 그 아픔을 되새기며 '탓'만 하고 산다면 그 결과는 또 어떻게 될까?

어떤 이는 너무 억울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니다.

나는 책임이나 잘못이 없는데도 나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누명을 씌웠을 때 이것을 '탓'만 하고 있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남을 탓하며 살까?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우리 뇌에서 '위험신호'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것을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며 과거의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명상 요법이나 체면 요법을 통해서 그것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 나름대로 이런 부정적인 정서를 극복하는 방법을 연구해서 치료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근본적인 치료방법은 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나는 상처를 극복하고 나의 내면의 세계, 즉 영혼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주는 것이 성경에 있다고 믿는다.

이런 것들이 알고 보면 마음의 불안이나 의심에서 기인한다고 봤을 때 자신 혼자 명상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 5절-

우리는 '그 얼굴의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극복해 나갈 수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혼자 속 알이'로 덧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오히려 마음으로 죄짓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어찌하여..."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내 귀에는 "그러지 말고... 그러지 말고..."라는 말로 들려온다.

우리는 바로 그 문제를 예수께로 가지고 와서 말씀으로 해결을 받아야 한다.

'탓'이란 말은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성경에는 이 말이 '원망怨望; blaming'이란 말로 나타나 있다.

이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일이 잘못되거나 부정적 현상이 생기는 것에 대한 `때문'이나 `원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탓은 분명히 우리 인생에 있어서 과거에 당한 부정적인 추억의 산물이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지난날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과거의 아픔 그것을 예수께 가지고 와서 완전히 해결(치료) 받아야 한다.

나의 주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사이신 예수시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장 13절-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심리상태를 알고 계시는 주님이시다.

그리고 치료하시는 예수 Healing Jesus시다.

 

 

 

1. 탓을 멈춰라

2. 복음으로 해결하라

3. 덕으로 바꿔라

 

 

1. 탓을 멈춰라

 

하나님은 우리를 탓하는 존재로 지으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니까 탓은 나를 무너뜨리는 마귀의 포석이기도 하다.

비록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애매한 말을 들었어도, 오랫동안 시달림을 받았어도 거기에 메여 살면 안 된다.

만일 거기에 메여있으면 스스로의 감옥 안에 갇힌 인생을 살게 되는 비극적인 인생이 되고 만다.

불효자식의 특징이 있다. 부모를 원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떤 이는 돌아가신 다음에도 다시 끄집어내서 이야기를 한다. 부모를 탓하기 전에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것만으로 감사하고 산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일까!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런데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평생 그 생각들을 지우지 못하고 산다.

똑같은 환경이라도 어떤 이는 감사하며 살고 어떤 이는 원망하며 산다.

탓은 무서운 죄였다. 왜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배회해야만 했는가?

단적으로 말하 지면 하나님을 원망(탓)했기 때문이다.

오늘 성경 본문은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0장 10절-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읽어 내려가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렵고 힘든 고비를 만날 때마다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결국 그들 세데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가!

나는 자문해 보았다. "만일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이 성경 내용을 안 이후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자."하고 굳게 다짐해 왔다.

'탓'은 무서운 죄이다.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탓을 멈추라 Don't blame others."

쉽게 상처 받고 쉽게 원수 맺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타인에게 있어서도 좋지 않은 일이지만 본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좋지 않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이웃이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장 18절-

설사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입혔다 할지라도 그것을 앙갚음하려고 하거나 마워하고 원망하는 경우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

탓을 멈추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복을 빌어주라는 것이다. 탓을 하게 되면 부정적인 자아로 바뀌게 되고 소극적인 사람이 된다. 그러나 너그러운 맘을 갖게 되면 긍정적인 자아로 바뀌고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며 살겠는가?

나 주변에도 보면 늘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서 제동(절제)이 안 되는 모양이다. 

원망하면 할수록 손해는 자신이 입는다. 누구를 미워해 보라. 그러면 누가 손해를 보는가? 본인만 속 끓이다가 결국 화병에 걸려 죽는다. 이건 바보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니까 이럴 땐 내 인생의 핸들을 예수께 맡겨버려야 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37편 5,6절-

이게 비결이다

그러기 위해 일단 탓을 멈춰라.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우리는 겸손히 예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하는 인생이다.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이무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솔직해야 한다.

시간표를 돌려서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현재 누구에게 보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분은 나의 모든 형편을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해결하시는 능력자이시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장 9절-

일단 하나님께 맡기고 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이 있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 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괴감에 빠지거나 우울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감사하며 찬송할 자들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따라서 마음의 갈등과 불안을 예수 안에서 해결하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순간 미루지 말고 신속히 '탓'을 멈춰라. 그리고 이 말씀을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 1절-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2. 복음으로 해결하라

 

상처에 매달리지 말라.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데 어디 그것이 쉬운가? 자꾸만 생각이 나고 나를 괴롭게 하는데 어디 말처럼 쉬우냐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상처 치료의 특효 약이다. 그리고 예수는 역사 위에서 최고의 의사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효과가 대단하다. 

"그 문제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 68편 19절-

'탓'이라는 짐, 즉 원망의 짐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면 때로는 속이 부글부글 끓게 되고 이것이 오래 가면 '몸의 질병'으로 바뀌기까지 한다. 이렇게 되어서 죽으면 하나님께서 "너 잘했다. 고생했다."라고 하실까!

상처를 받은 자가 있다. 요셉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요셉이 형들을 미워하거나 탓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얼른 긍정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가자.

우리가 요셉에게서 보는 바 그의 삶은 자신을 형들에게 심부름 보냈던 부친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장삿치들에게 팔아넘긴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훗날 형들을 만났을 때 형들에게 오히려 안심시키는 말을 하며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세기 45장 5절-

요셉은 지난날의 문제를 복음으로 해결한 셈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라는 표현이 참 멋지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만! 인생의 모든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예수를 바라봐야 하고 그분의 복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너는 맨날 남 탓만 할 거야?" 이렇게 말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멍든 가슴을 어루만져 줘야 한다.

"그래,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그럴까!" "이 문제를 가지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자."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편 18편 6절-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서 치료해 주실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왜 상처를 받으셨을까? 

그 손에, 그 발에, 그 머리에 그리고 온몸에 왜 그리도 피 투성이가 되셨을까! 바로 우리가 입은 상처 때문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이사야 53장 4절-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상처를 낫게 해 주시는 여호와 라파יהוה רפ이시다.

내가 좋아하는 찬송이 있다.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나의 상처 입은 심령을 불쌍하게 여기사.... 미쁘신 나의 좋은 친구" - 찬송가 86장 1절-

우리 그 손의 못 자국을 만져야 한다. 아니 예수님이 그 손으로 만져주셔야 한다.

옛적에 갈릴리 주변 마을 다니시며 치료하시던 주님은 지금 내 곁에 오셔서 나를 만져서 치료하시는 '예수 라파'가 되신다.

예수의 복음은 한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상처를 싸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상처를 주는 자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자로!"  "탓하는 자에서 감사하는 자로!" 우리의 인생이 바꿔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맛본 자들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장 23,24절-

우리는 연약하다. 내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 원망을 들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그냥 묵과하고 지나치지 말라. "생각날 때 즉시 행동에 옮기라. Act immediately when you think of it"는 뜻이다.

우리는 미루기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미루지 말라. 

"얼마나 속상했니! 정말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혹시 나는 전혀 상처를 준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 저러냐 싶어도 그것이 죽고 살 일이 아니다 싶으면 "아,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생각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래, 나 때문에 힘들었구나! 미안하다!" 하며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해준다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내가 너에게 뭘 섭섭하게 했는데 너는 나를 탓하냐?" 이러면 서로의 관계는 악화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남의 상처를 만져주다 보면 어느새 나의 고통은 사라져 버린다.

이게 하나님의 원리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다.

 

 

 

3. 덕으로 바꿔라

 

'탓'의 반대말이 생각났다. 그것은 '덕'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덕은 공자가 말하는 덕德 gentle, 도덕道德, morality과는 차이가 크다

성경이 말하는 덕은 '미덕美德virtue; ρετή 아레테', 즉 '고상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의 고상한 성품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야 옳다.

누가 나에게 어떻게 대했든지 간에 내가 나타내야 할 행동은 '예수의 인품을 닮은 말과 행동'으로써 대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도덕주의자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어디를 가나 '덕 쌓기'를 해야 한다.

기초는 예수를 참되게 믿는 '복음의 신앙'의 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셨다.

바울 사도 역시 우리에게 이것을 부탁했다.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장 1절-

진정으로 아가페 사랑으로 행한 덕은 튼튼한 탑이나 '집을 짓는 것οἰκοδομέω오이코네메오'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의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영혼을 전도할 수 없다.

나는 미션의 현장에서 항상 이것을 경험하고 산다.

마냥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으세요." 한다고 해서 저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흥 집회를 통해서 진짜 예수께 돌아와 예수 인격을 닮은 삶으로 변화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로 인해 한국교회는 큰 신음을 앓고 있다.

알곡이 아닌 쭉정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사회 속에 덕을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민폐와 혐오까지 느끼도록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역행한 결과이다.

가만히 하는 행동을 보라. '탓'만 일삼고 있는 그 모습 속에 '교회 사람들'이 앞장서서 저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미션의 현장에서 '나 자신이 예수님을 보여줬을 때' 비로소 저들이 진짜 신자가 되는 것을 늘 목격한다.

우리가 말하고 외치는 덕이 겨우 공자의 가르침에도 못 미치는 정도의 덕이 아니라, 고상하고 아름다운 미덕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로마서 14장 19절-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도자의 삶을 살면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기 때문에 '서로 덕 쌓기'를 가르치며 솔선수범해서 힘썼다고 말한다.

 

우리 역시 예수의 덕 virtue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었다. 이 덕을 '은혜恩惠;χάρις'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덕으로, 그의 은혜로 오늘 새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로새서 3장 10- 고상한 삶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덕을 끼치며 살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사회에서도 덕을 끼치며 살아야 한다.

여러분은 예수가 인류에게 존중받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분의 생애 전체가 인류에게 '덕 Virtue'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생애는 인류에게 유익이 되었고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의 메시지 전체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를 볼뿐 아니라, 고상한 덕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다. 이제 과거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를 안만큼 '덕 쌓기'를 잘해야 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장 5-7절-

사랑으로 귀결되는 덕이 온전한 덕을 끼치는 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덕스럽게 살지 못하면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한다면 "너나 잘 믿으라." 심지어는 "저 사람 보기 싫어서 교회 안 간다." 말을 듣게 된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당부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배드로전서 2장 1-9절-

이렇게 될 때에 '탓'으로 얼룩진 세상을 밝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신 덕분에 나는 행복합니다." 막연하게 하는 인사 차례가 아니라, "당신의 고상함을 보니 행복합니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을 보니 하나님은 정말 계신 것 같습니다."

 

나가는 말

 

야곱의 가정에 슬픔이 있었다. 라헬이 막내 베냐민을 낳을 때 너무나 큰 산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만 아기를 낳다가 죽게 되었다. "아들이다." 그러나 산모 라헬은 그 말을 듣자 태어난 아들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 부르며 운명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은 온 가족의 슬픔이 되었다.

하지만 야곱은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섰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아픔만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막내의 이름을 바꾸어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세기 35장 18절-

이것이 야곱의 지혜이다.  슬픔의 아들을 '오른손의 아들', 즉 '든든한 아들' 또는 '행복의 아들'로 삼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나왔고 훗날에 복음의 사도 바울이 나오게 되었다.

여러분도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탓'을 하며 살 인생이기에는 너무 시간이 아깝다. '탓'을 '덕'으로 바꾸어버리자. 우리는 이미 나의 무거운 짐을 십자가 밑에서 다 풀어버렸다.

하나님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30편 11절-

십자가를 부활의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다.

자, 이제 우리는 과거에 살지 말고 현실에 충실할 필요가 있으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앞에는 하늘나라가 있고 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과 성도들이 있다. 이런 소망이 있으매 감사하자.

따라서 우리는 늘 예수의 영에 사로잡혀서 살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늘 위로의 성령의 함께하신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장 13,14절-

 

우리가 천국에 도착할 때에 이 세상에서 받은 상처는 흔적조차 사라질 것이며 다시는 상처 받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까!

"모든 눈물을  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장 4절-

그날을 바라보며 더 용기를 내서 힘차게 주의 길을 걸어가는 멋진 성도가 되길 바란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렇게 선언하자. "지금부터 나의 인생 앞에 '탓'이란 없다! 사랑하고 감싸주고 용서할 일만 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서 13장 8절-

 

www.youtube.com/watch?v=2Q-uzeuA79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