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목에서 Trên con đường của cuộc đời tôi
사도행전 9장 1-22절
들어가는 말
나도 모르게 태어나 살다 보니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동적으로 국적을 얻게 되어 한 나라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우연일까!
그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막연한 생각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왜 태어났으며 또한 어디로 가는가!"
막상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해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도 고민이 많았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나이에 "인생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며 신작로 길을 걸으며 불렀던 노래가 떠오른다.
마침 그때 나온 유행가가 있었다. 가수 최희준 씨가 불렀던 '하숙집'이라는 노래였다. 나는 자주 불렀다.
"구름이 흘르가듯 떠돌다가 가는 길에..."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거고 벌거숭이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정도 두지 말고 미련도 두지 말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왔다가는 인생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배워왔다. 그래서 허망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2절-
'헛되고 헛되다 הֲבֵ֥ל הֲבָלִ֖ים (헤벨 헤벨림)' 과연 그럴까! 그럴 수도 있다.
길을 잘못 들어 허송세월 하다가는 이렇게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인생의 길목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거짓 정보'의 홍수에 밀려 허망한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유교적인 풍토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어떤 이는 불교적인 환경에서, 또는 샤머니즘인 관습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다. 사울은 율법주의 환경에서 살면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우리가 태어나서부 주어진 환경에 젖어 살다 보면 거기서 나오기란 죽기보다도 더 힘든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죽기를 각오하고서라도 뛰쳐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되는 건 절대로 아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 어느 길목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거기에 응해야만 한다. 이것이 믿음이고 순종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장 1절-
우리는 우리 인생 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듣고 깨달아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함께 가는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때문에 하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불행이다.
악한 권세를 가진 마귀는 인생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길목을 막고 있다. 그렇지만 십자가 용사 된 우리들은 믿음의 방패를 들고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마귀의 불화살을 소멸시켜버려야 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2장 14절-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곧 '참 길'을 만난다. 그 길을 가야만이 허망한 인생을 살지 않게 된다.
예외는 없다. 이 세상에 테어난 그 어느 누구라도 이 진리 듣거나 읽고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바로 여러분과 나는 이 진리를 듣고 알게 되었다.
1. 우리는 여전히 길가는 나그네이다
우리는 다 길가는 나그네이다. 하지만 옳은 길이 있고 그른 길이 있다. 어느 길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인생들은 길을 잃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사야 53장 6절-
가지 말아야 할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로 계속 가면 멸망에 이르고 이르고 만다.
옛 말에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 그냥 스쳐지갈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잘못된 길에서 사나운 맹수를 만난 꼴이 되었다.
하나님과 멀어진 길에서 만난 것이 곧 우상숭배와 죄의 쾌락이다. 이것을 가지고 마귀는 인간을 유린하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을 부를수록 점점 더 멀리하고 바알에게 제사하며 아로 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호세아 11장 2절-
이곳 사람들도 보면 집집마다 우상과 샤머니즘의 '분향대 cầu phúc'가 있다. 그리고 음식, 꽃, 돈을 올려놓고 향을 피우며 지극정성으로 복을 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인생 길에서 만난 것은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죽음의 사자'를 만난 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살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인생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지만 저들은 몰라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비단 우상숭배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 교회 다니면서도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
세상 어디로 가든지 간에 하나님과 멀어진 길에는 우상, 부정, 학대, 거짓, 쾌락 등이 판을 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또 하나의 속임수가 있다. 종교 다원론자들은 길 ways이 수없이 많이 있다고 말을 한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출발점은 달라도 정점頂點;At the apex은 같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그것은 자기합리화 불과한 거짓말이다. 그런 식의 인생길이라면 내가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로正路가 되신 예수께서는 세상에는 두 개의 길만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좁은 길 Narrow way, 넓은 길 Wide way'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장 13,14절-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다. 고난이 있고 박해가 있고 위험을 감내하며 가야 하는 길이다. 이 글을 읽는 우리들은 이미 이 길에 들어서서 여기까지 걸어온 인생이다.
우리는 이미 결심했다. 주만 따르기로, 이젠 결코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I've decided to follow Jesus. No turning back.
우리의 인생 길에는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이 있다. 그것을 이기고 나가기란 쉽지 않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베드로전서 4장 12절-
'연단하려고'라는 말씀에 주의를 하라. 어찌보면 연단받지 않은 신앙은 참 신앙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모두 연단을 받았다. 욥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고, 그의 세 친구들이 그랬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그렇다.
따라서 나만이 겪는 고난이라고 한탄할 필요가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출애굽기 13장 17절-
그들은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이 길로 우리를 데리고 왔냐?"라고 원망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연단시키는 하나님'이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배드로전서 1장 7절-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장 10절-
우리는 '그가 아시나니'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겁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 분의 목적에 순응해야만 한다. 그 목적은 '순금 신앙'이다.
우리는 '좁은 길', 즉 '생명 길'로 가야 할 인생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내 힘으로 하려고만 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이다.
복음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 4절-
그러니까 모든 것을 예수께 맡기고 그분만 따라가면 반드시 저 영화로운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2. 길목에서 꼭 만나야 할 분이 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우리는 길 잃은 나그네였다. 그리고 죄 가운데 빠져 살고 있었다.
혼자서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길 잃고 헤매는 인간에게는 구글지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성경이 그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즉 정확한 '우주 표준지도'이다. 바로 여기에 길이 나타나 있다.
와~! 대박!!!
"내가 곧 길이요." -요한복음 14장 6절- 하신 분이 나타난다.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또한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다.
우리는 꼭 그분을 만나서 인생길을 가야만 하고 또한 그분이 보내주신 약속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만 완전한 목적지, 즉 하늘나라까지 도착할 수가 있다.
나는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 만난 얘기를 '도상의 실존'이란 말로 표현하고 싶다. 나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실제로 일어난 중요한 체험이나 사건을 말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싶다. 성경에는 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인생의 길목에서 '도상의 실존'을 경험했는가?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나도 일생을 살면서 내가 가는 길목에서 누군가를 만날 텐데 곧 그들에게 '도상의 실존'을 경험하도록 하고 싶다. 예수를 만나서 '참 길', 즉 주 예수를 따라가는 길을 발견하여 행복한 인생을 살고 하늘나라 가는 영혼들이 많기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고 신음하며 살고 있었다.
유대 땅 갈릴리 근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찾아서 걸어다니시며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만나주셨다.
사복음서를 보면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를 만났던 자들의 얘기들로 가득 차 있다.
예로써, 어느 날 예수께서 호수 주변을 거니시다가 대대로 물고기를 낚으며 살아가고 있는 베드로를 만나주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베드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다.
그때 베드로는 배에서 나오자마자 예수의 발아래 꿇어 엎드렸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장 8절-
그가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를 만나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열 두 제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니고데모, 수가성 여인, 삭개오, 각색 병에 걸린 수없이 많은 사람들, 배고프고 가난한 영혼들까지 예수를 만난 영혼들은 그 인생이 바뀌고 말았다.
십자가를 지는 현장에 느닷없이 억지를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던 구레네 시몬의 얘기, 십자가 지시고 최악의 고통을 겪는 그 순간에서도 한쪽 편 강도에게까지 낙원을 허락하신 얘기는 우리 모두에게 큰 감명을 중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갑자기 엠마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좌절로 마음이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예수께서 곁에 오셔서 동행해 주시며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누가복음 24장 25절-
심령이 뜨거워지는 메시지를 주셨고 또 음식까지 함께 드셨다.
눈이 밝아져서 예수를 알아봤을 때는 이미 예 수께서는 사라지셨다.
그때 그들은 얼굴이 환하게 빛났으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은 '도상의 실존'을 경험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나이가 있다. 사울이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의 사람으로서 학문이 대단했고 율법에 능통하며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를 오해했다. 예수의 부활을 외치고 다니는 자들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다 잡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다마스커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를 그대로 두시지 않으셨다.
다마스커스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 갑작스럽게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비췄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도행전 9장4,5절-
이게 바로 '도상의 실존'이다. 그는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길 Road에서 예수를 만났기에 세계선교의 귀한 모델로 쓰이받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사도행전은 연속선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와 여러분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는 '내가 만난 예수'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내가 전도했던 이들에게서 "예수님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
나는 그들에게 반문한다. "만일 네가 예수님을 몰랐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나를 만나주신 예수'를 높여야 한다. 날마다 그분을 향해 감사와 찬송을 들려야 한다.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찬송가 95장-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져주셨다. 나와 인류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분께서 가신 길은 그 걸음마다 피로 얼룩이 졌다. 쓰러지면 얻어맞고 다시 일어서서 걷다가 수없이 반목해서 쓰러지셨다.
'십자가의 길', 이것은 '예수의 도상의 실존'이었다.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기 때문에 오늘 나와 여러분의 존재는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헤매다가 멸망하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3. 그 길을 걸으며 길의 안내자가 되라
우리는 이미 그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베드로전서 2장 21절-
예수와 손잡고 걸어며 하늘나라까지 가야 한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여전히 유혹을 받고 살며 또한 풍파를 겪기도 하며 고난과 박해를 받기도 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디모데후서 3장 12절-
예수 믿으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를 마음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질병도 고난도 겪어야 하는 인생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더 편하게,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아니다.
무론 예수 믿으면 확실히 더 건강해질 수 있고 더 검소해져서 알뜰하게 살 수도 있다. 더 지혜로운 경영자가 될 수 있고 더 유능한 예술가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똑똑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도 아니고 꼭 그래야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녀들로서 이 세상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며 살고 그분께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에베소서 5장 17절-
이렇게 살기 위해서 때로는 건강이 필요하기도 하고 물질도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복음 6장 11절-라고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일용할 양식'이란 단지 '빵의 문제'만이 아니라 '건강의 문제'도 포함되는 기도이다.
바울 사도는 2차 선교여행을 통해서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에서 귀한 한 영혼을 얻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바울을 위하여 판견되어 와서 바울에게 충신처럼 수종을 들었다. 바울은 그를 칭찬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립보서 2장 30절-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일이 당시의 성도들과 오늘 우리에게까지도 귀감이 되는 일로 남아있다.
더 적극적인 면에서 한 가지 더 할 이야기가 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이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의 마지막 부탁이다.
주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가야 한다. 가서 그들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을 잃고 헤매고 있다. 과거의 나처럼 말이다. 우리도 알고 보면 누구에게가 전도를 받아서 크리스천이 되었다.
맞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가야 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장 19,20절-
나는 여기에서 전도한 학생들과 청년들이 한국어로, 베트남어로 '사명'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낄 때가 많다. www.youtube.com/watch?v=8bu8J6Cm_mY
내가 새로운 입교한 제자에게 이 노래를 들려줬더니 한국어로 첫마디가 "너무 감동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래, 이 일을 삶 속에서 실천할 때 얼마나 감동적이겠으며 보람이 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가장 매력적인 일을 무엇일까!
인생 길에서 헤매며 허덕이고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 아닐까! 그리고 눈을 크게 떠서 보면 우리 지구촌에 있는 모두가 우리 형제요, 자매인데 이들을 외면하고 산다며 어찌 될까!
그러니 만큼 우리는 우리 생애 동안에 가장 우선 해야 할 것은 전도요, 선교이다.
우리가 한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연합하여 섬기는 일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아직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는 자에게 가서 그 발걸음을 돌이키게 하는 일은 더 소중한 일이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장 15절-
그런데 우리는 이 소중한 것을 놓이거나 망각하고 살 때가 많다. 나부터가 그렇다.
잠에서 깨에 눈만 뜨면 할 일들이 많다. 차가 있고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더 갈 곳이 많고 더 만나야 할 사람이 많다.
그런데 어디로 가며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당신은 어디로 가며 누구를 만나기 위해 날마다 그렇게 바쁜가?"
여러분은 하루하루 살면서 "오늘은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 복음을 전할까?" 생각하며 기도하며 이를 행동에 옮기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를 가지고 길 잃은 영혼들에게 길을 안내해야 한다.
그들도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를 만나야 산다.
나는 이 글을 쓸 때 내 양심이 거리낌이 든다. 왜? 나 역시 이런 삶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 "주여, 나의 게으름을 용서하소서!" "다시 한번 구령의 열정을 품고 나가기 원합니다.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
나가는 말
우리는 세상에 왔다가 할 일이 많다. 어떤 이는 여러 가지 업적으로 명성을 날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를 못 만나고 간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세상에서 큰 부자로 살고 대단한 업적을 인정받고 또는 인기를 누리거나 권력을 휘두르며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를 모르고 살다가 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간인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당장 우리를 불러가신다 할지라도 소망이 있다.
"지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
예수님 만나서 그 길을 따라 간 사람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메시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갈 때 때로는 고난이 닥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예수의 손안에 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장 20절-
이 약속만 믿고 가자. 그러면 반드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될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를 만나서 좁은 길을 가는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
이미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 이것은 어떤 죗값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연단 속에서 우리는 예수를 닮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더 성숙에 이르는 과정'이다. 성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열매란 '예수를 닮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이 성품을 보여주며 길 잃은 영혼들에게 찾아갈 때 저들이 우리의 가는 길을 수긍하고 발걸음을 돌려 우리를 따라올 것이다.
오네시모 같은 완악한 죄수도 바울의 인품을 보며 마음을 열었다. 그 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였다. 바울이 그 주인 빌레몬에게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었지만 "내가 데리고 다니고 싶소!"라고까지 했다.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 만난 이야기들로 책을 쓰고 싶지 않은가! 바울 자신이 전도했던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장 2절-
인생의 길목에서 예수 만난 결과가 이렇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장 9절-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장 21절-
'말씀하옵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혀 길들이기 Taming the tongue (0) | 2020.11.13 |
---|---|
인간의 본성과 의義의 삶 Bản chất con người và Cuộc sống chính đáng (0) | 2020.11.08 |
탓 Đổ lỗi (0) | 2020.10.22 |
성경을 알자 Hãy Biết Kinh Thánh (1) | 2020.10.16 |
두 권의 책 (0) | 2020.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