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딸 후인Huyen
내가 남쪽의 메콩유역에 위치한 안장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그 대학교 방문하여 학생들을 가리치고 또 총장도 여러 차례 만났다.
그러는 가운데서 여러 학생들과 나눔을 갖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학생들이 있다.
이런 일로 안자의 중심 롱수엔Long Xuyen에 오고가는 중에 고등학생 하나를 만났다.
그 이름이 후인Huyen이다.
그녀는 내가 안장성 롱수엔에 갈 때면 꼭 친구하고 같이 와서 얼굴을 보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마음을 곱게 쓰니까 그 자체가 예쁘고 귀엽다. 영어도 잘 못 하고 한국어는 아예 모른다. 그래도 언제가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동기부여가 된다면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금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열여덟 살이다.
내가 볼 때는 가정이 아주 가난한 것 같다. 그리고 항상 소박하게 살아온 학생이었구나 생각했다.
한번은 일부러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장소로 초청을 했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내가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나름대로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나 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가 안내하는 식당으로 갔다. 한국 750원짜리 국수였다. 그리고 기꺼히 후인과 그 친구가 돈을 내겠다고 했다.
베트남 학생들이 가난하면 이렇게 산다.
현재 보통 수준이면 2000원짜리 음식을먹는다. 그러나 딸 후인은 더 가난하게 살면서 더 아껴서 쓰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 저 취직했어요."라고 한다. 형편상 대학교는 꿈도 못 꾸는 것 같다.
"어디에서 일하니?"했더니, "빈증Binh Duong에서 일해요."라고 했다. 그곳은 호치민에서 그리 멀리 않다.
아마 지인을 통해서 거기로 가서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도 구김살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그녀는 아직도 예수님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밥을 먹을 때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고 또 술과 담배를 안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빈증으로 가서 일을 한 후에는 갑자기 내가 연락을 하면 더욱 반가워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까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처음이고 해서 아는 사람들이 그리운가 싶었다.
갑자기 "아빠, 언제 여기 한번 오실거예요?" "내가 호치민에 가면 호치민에서 만나자."했더니, "아니예요. 이곳으로 오셔야 해요."
나는 무슨 뜻인지를 알았다.
메콩지역에서 살다가 거기로 갔기 때문에 아직 호치민 간은 큰 도시에 가서 어리둥절할 것이 뻔하다.
"그래, 내가 호치민 가면 너를 꼭 찾아가마."라고 했다.
한 영혼이 소중하다. 내가 쉽게 많은 사람을 접촉하고는 있지만 한 영혼을 얻는 것은 그렇게 싶지 않다.
나는 약속을 하면 지킨다. 돈 약속, 시간 약속, 구두의 약속을 잘 지킨다. 이것에서 어긋나면 벌써 인격의 문제가 금이 간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약속을 하면 지키는 것이 신조처럼 되어 있다.
후인은 내가 빨리 방문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이 했다.
나는 꼭 만나서 어떤 말을 던져줄까를 생각하며 기도했다.
드디어 내가 호치민에 출장을 했다. 그날이 2019년 12월 7일이다.
나는 그녀가 오후에 시간이 있다고 해서 약속을 오후 3시로 잡았다. 그래서 여유있게 12시에 출발해야 하겠다고 맘 먹었다.
나는 돈을 절약하기 우해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데까지 가다가 교통편이 어려운 곳에 가서 영업용 오토바이 쎄옴Xe Om을 타고 가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가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지도 상에는 30킬로미터이지만 막상가려면 2시간 이상이 소요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여유를 두고 출발을 했다.
버스가 가는 곳까지 가서 걸으면서 마땅한 식당을 찾아봤다. 불편했지만 한 순간 한 순간이 의미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오토바이를 탔다. 요즘 베트남은 그랍택시Taxi Grab가 유명하다. 12만동, 즉 6000원이 나왔다.
후인이 보내준 구글지도 대로 갔는데 주소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지역이 많기 때문에 근처로 가서 물어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매가 메시지를 통해서 길거리에 있는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지만 거기를 못 찾는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좀 더 떨어진 곳, 구글지도에 확실히 잘 나타나는 큰 건물 결혼예식장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날 수가 있었다.
생각해 보라. 후인이 얼마나 반가워 했겠는가! 사실 친부모자식 같에 상봉하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조금 초췌해 보였다. 속으로 고생을 많이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탕수수즙과 오렌지즙을 시켜서 마시면서 1시간 조금 더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랑 같이 있는데 아주 허술한 집에서 살아요."라고 했다.
"얼급은 얼마나 받니?"하자 "7백 80만동(40만원 정도) 받아요. 베트남에서는 적은 월급은 아니다.
그러나 주일도 쉬지 않고 계속 2교대를 해 가며 일을 시키는 것 같았다.
얘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또 오후 5시에 일들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옛날의 우리 한국상황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함께 저녁식사도 못 하고 우리는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사실, 제가 여기서 오래오래 일을 못할 것 같아요."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설 지나고 하노이로 오면 내가 한국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다.
보통 베트남은 명절 후에 직장을 많이 옮기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했다.
"만일 네가 하노이에 오면 아빠를 잘 따라와야 한다." "네."
후인은 아직도 어리다. 그러나 어느 날 어른이 되면 나를 만나서 생각도 꿈도 달라졌다고 할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녀의 미래를 다 알지 못 한다. 그러나 하 가지 아는것은 '한 걸음씩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나의 딸을 위해서 기도할 뿐이다.
돌아오는 중에 딸 후인이 벌써 메시지를 보낸다. "아빠, 사랑해요!"
나는 내 딸 후인에게 한국어 이름을 지어주고 또 케롤송을 녹음해서 보내주고 싶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때면 고향이 더욱 그리울 거고 또년말이라서 마음이 쓸쓸해질 수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이 작은 부분이지만 딸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의 입의 노래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을 적셔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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