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에서 간간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열매 꾸지뽕입니다. 녹말과 비타민시가 덤뿍 들어있답니다.
네 눈의 들보를 빼라 2006/10/22/주일/
(마태복음7장1-7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우리는 남의 티눈은 잘 보이고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메시지를 전하시다가 갑자기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절).
아마 제자들은 어리둥절해졌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말씀이 일단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특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상호간의 문제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비판’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토론장에서 다른 사람을 주장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학문의 길에 도달하기 위해서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에 대한 참된 비평은 인간 정신의 숭고한 내용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대학 시절에 보다 더 차원 높은 학문 탐구를 고취시키기 위해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고 유신론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라는 시험 문제가 나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비판하고 연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참된 비평은 훌륭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잘 안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참된 비평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덮어놓고 나와 다른 쪽에 있는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고 헐뜯기 위해서 가하는 비판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남의 결점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자기들은 더 엉큼하고 더 큰 도둑질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작은 실수나 죄를 용납하지 않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악평을 가했습니다. 이를테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했던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 영화감독 존 휴스턴의 일화입니다.
휴스턴은 자녀들에게 친구들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 것을 당부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에 딸 안젤리카가 식탁에서 “난 반 고흐의 그림은 질색이에요,아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휴스턴이 말했습니다.
“고흐의 그림이 싫다고? 그럼 네가 알고 있는 반 고흐의 그림을 몇 점이나 가지고 있고 왜 싫은지 이유를 말 해 보거라.”
딸이 우물쭈물할 때 휴스턴은 “상대방을 자세히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입니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①비방하는 사람 자신, ②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③그리고 화제가 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을 비판하는 그 사람에게는 결국 열 배 스무 배로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절).
알고 보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비판할 수 없습니다. 아니 본문에서 말하는 ‘비판하다(크리-네테)’는 말은 ‘심판하다’라는 말로 직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는 연장선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어가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냐?”(3절).
‘티(칼포스)’는 무엇이며, ‘들보(도코스)’는 무엇입니까? ‘티’는 ‘나무의 부스러기’를 가리킵니다.
그에 비해 ‘대들보’는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큰 재목’을 가리킵니다.
‘티’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 작은 것이 눈에 들어가도 눈을 잘 뜨지 못할 정도로 따갑습니다.
그러나 ‘티’와 ‘대들보’ 차이는 ‘코끼리’와 ‘하루살이’ 차이만큼이나 큽니다. 어디 비교나 될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과장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감춰놓은 죄가 훨씬 큰 사람들이 좀 도둑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청문회 하겠다고 청문회석에 앉아 있습니다. 코끼리를 감춰놓고 하루살이 색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바로 이것이 세상나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입법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교묘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이리저리 법망을 빠져나가버립니다.
그리고 힘없고 약한 사람들만 당한다는 말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어느 날 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모세의 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5절).
우리는 그 여자를 나쁜 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 남자는 왜 안 잡아왔습니까? 알고 보면 그녀는 죄를 지었을망정 힘없는 죄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한 마디의 말씀을 아시지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 여자를 돌로 쳐라”(8절)고 하셨을 때 그들은 모두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씩 둘씩 물러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뻔뻔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별짓 다 하며 살면서도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예수님께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자칫하면 이런 위선적인 신앙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잘 믿는 척하고 거룩한 척 흉내를 내지만 그 개인의 생활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저분하고 오만부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자신도 바르게 행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약점을 파악하는데 익숙해지는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나쁜 남자들은 대부분 자기 아내에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자기는 밖에 나가서 별짓 다 하고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자기가 자기를 들여다보는 눈이 망가져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상대방의 눈에서 티를 빼어내라고 하기 전에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가 부끄러워서 그것을 먼저 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눈이고 양심마저도 마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영적 지성, 즉 하나님 나라의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지성을 갖춘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지적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악을 보고도 무조건 모르는 척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언행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에 열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면 하늘나라 시민정신을 소유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방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지적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매우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비록 내가 의롭다고 할지라도 매사를 하나하나 지적하고 비판을 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나지 않는 둥근 성격을 가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난 것이겠습니까? 둥근 것이겠습니까?
모난 돌은 정을 맞습니다. 서로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형제의 약점과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쪽이 더 잘 보입니다.
형제의 아픔과 상처가 보이고 또 그것을 내가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게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쩌면 우리 크리스챤들은 우리는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국의 철학자인 노자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연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것이 얌체 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
그러자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에 노자는 대답합니다. “강하면 부러진다. 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 센 바람이 불 때에 큰 나무는 뿌리째 뽑히지만 연약한 갈대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제자는 되물었습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집니다마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다시 노자가 대답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은 남들의 미움을 받기 쉽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모두 좋아한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태도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약2:13).
이 시각 후로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만나면 좋은 것들을 칭찬해 보십시오.
그리고 가정에 돌아가도 좋은 점을 들어서 얘기하는 습관을 길러가십시오.
하버드 대학 다음으로 유명한 대학이 있는데 어느 날 예일대학의 총장이 어느 존경받는 단과 개학의 학장에게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A와 B학점을 받은 학생들을 항상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그들은 교수가 되어서 우리 대학에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단과대학 학장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혜있는 총장은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C와 D학점을 딴 학생들에게도 온정으로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 후배들을 위한 과학관을 지을 때에 많은 돈을 헌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눈에는 ‘대들보’가 박혀 있지 않습니까?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대들보를 빼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밝히 보고 네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5절).
어쨌든 내 눈속의 들보를 빼십시오. 그리고 밝아진 눈으로 형제와 자매를 보십시오. 다 사랑스럽게 보일 뿐 보이던 티가 하나도 안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만일 티가 보인다면 “티가 박혀서 얼마나 아플까?”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 아픔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를 치료해 주시고자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대들보같이 박혀 있는 우리의 큰 허물도 다 제거해 주시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실로암 못가에서 소경이 눈을 뜬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얼마든지 우리의 영적인 눈과 사고방식은 새롭게 바뀔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 좋은 것만 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마음의 눈을 고쳐 주옵소서! 사랑의 눈동자를 주옵소서!”
그리고 고침받은 아름다운 시선으로 형제와 자매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모두가 다 사랑스럽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행복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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