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헵시바와 쁄라

좁은길을 걸으며 2006. 11. 26. 14:45

 

우리 복지관에 오셔서 3년만에 드디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된 김금자 성도를 축하합니다.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19:9).

(이 어르신은 2013년 주님 곁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정말 행복한 분입니다. 이 분을 케어했던 분들에게 상이 있을 것입니다.)

 

 

 

                헵시바와 쁄라로                   2006/11/26/주일

                        (이사야62장1-5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난 날의 삶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삶의 자리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내용들이 구약에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실 때에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라”(창15:5)고 하셨고, 사래에게도 역시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15:15)고 하셨습니다.

야곱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가 얍복강에 나루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은혜로 주신 이름이 있는데,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창32:28)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람의 이름을 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 받을 때 세례명을 줍니다만 성경에는 그렇게 한 경우가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새 이름을 부여받는 것은 자기의 옛 죄를 벗어버리고 새 삶을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종 직전에 자기 이름을 바꾸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이 나중에는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게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죽은 사람에게 새 이름을 붙어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아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이미 우리는 새이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이란 칭호 말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라는 칭호입니다. 그 이름 하나면 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밖의 것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지나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전능자시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시며

기쁨을 못 이겨 노래하시리

그가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리

 너를 평안케 하리.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전능자시라..


                    http://blog.naver.com/maranatha30/90003106731



오늘 본문 말씀 1-3절에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치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나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나타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시온’은 오늘날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을, 다른 하나는 신약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적인 면에서 볼 때 ‘시온 백성들’입니다.

황폐한 시온이 회복되듯이 마귀의 세력에 짓눌려 타락했던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돌아와 결국 그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면서 나올 것을 선언합니다.

사실 이사야는 이 부분을 매우 경쾌한 시를 읊는 시인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시온을 위하여 잠잠히 있지 않겠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않겠다.

시온의 의가 밝은 빛처럼 비출 때까지,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내가 조용히 있지 않겠다!...” 이런 식의 문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렇게 부른 노래가 700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오늘 보문에는 두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4,5절).


유다는 그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버림받은 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가장 비참할 때 언제입니까?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가 외치는 소리는 정말 힘이 있었습니다.

“너는 헵시바라.” 이 말은 “나의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로 바뀔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표현 양식입니다.

‘헵시바’라는 말은 본래 히스기야의 아내인 왕비의 이름입니다(왕하2:1).

하나님은 여러분을 평범한 여자(신부) 정도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가장 부러워하는 ‘왕비(임)’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며 기쁨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름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새 이름’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나는 헵시바다!” 이제 옆 사람을 보면서 “당신은 헵시바입니다!”


“네 땅을 쁄라라.” 이 말은 “결혼한 여자(아내)”란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결혼관계로 보십니다. 결혼하면 단순히 육체의 결합 정도가 아니라, 남편이 아내에게 들어와 있고 또 아내가 남편에게 들어와 있는 것을 확실하게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설명하기를 즐겨합니다.

4절 끝에도,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4절).

하나님은 오늘의 교회와의 관계를 이토록 소중한 관계로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마음을 쏟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정말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고 쏟고 사십니까?

아니면 언제까지 예수님으로 하여금 여러분은 짝사랑만 하시도록 외면하고 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세례받을 때 그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세례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로 빼앗겼습니까? 아니 어디로 마음이 가 있는 겁니까?

돈에 가 있습니까? 명예에 가 있습니까? 아니면 오락이나 취미, 쾌락에 가 있습니까? 아니면 먹고 마시는 것에 가 있습니까?

이런 걸 생각해 보면 지금 한국교회는 큰 일이 났습니다. 주님이 바라보실 때 과연 기뻐하시는 곳으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70-80년대의 열심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TV에 나와서 잘 웃겨주는 목사를 좋아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목사는 인기가 없고 가려운 데 잘 긁어주는 목사는 요즘 말로 ‘잘 나가는 목사’입니다. 정말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닮아갑니다. 대형마트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우쭐대며 자랑을 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헵시바’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로 다시 즐거움을 삼고, 성령님으로 우리의 행복을 삼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쁄라’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바로 결혼을 통해서 맺은 그 언약을 말입니다.

그래서 언약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거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주님의 슬픔이 되고 근심이 되는 삶만 되풀이 될 뿐 ‘바람난 고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어디를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니십니까?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시간도 없이....세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이 거하실 자리를 빼앗아 버린 것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 어디에 주님이 자리하고 계십니까? 아예 주님이 안 계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열심히 달려간다 해도 거기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고 다시 ‘헵시바’가 되고 ‘쁄라’가 되는 날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주일에 나와서 겨우 예배 한 시간 드리고 예배당 문턱만 나가면 완전히 세상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그런 생활이라면 그것은 우리 주님의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결혼할 자’들이 아니고 이미 ‘결혼한 자’입니다. 따라서 결혼한 사람은 혼자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을 때 안정감을 누리게 된다. 우리 안에 안정감은 바로 우리 신랑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지 못하면 늘 불안하고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신랑을 붙드십시오. 지금 말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크게 실망하게 마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시달리다가 왔어도 받아주시는 너그러운 남편입니다.


여러분이 언제라도 돌이키기만 하면, “너의 이름은 내가 가장 기뻐하는 이름인 헵시바(나의 기쁨)란다!” “너의 이름은 내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첫사랑 쁄라(아내)란다!” 하고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주님, 나는 지금까지 버림받은 자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번도 나를 버린 적이 없으십니다. 나의 잘못된 오해와 잘못된 신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온전히 주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멀리 했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신부(헵시바와 쁄라)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셔서 영원한 기쁨을 삼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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