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바른신앙, 바른 열정으로

좁은길을 걸으며 2006. 10. 15. 13:22

 산수유가 익었네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많은 열매들과 풍요로움을 주셨네요.

 

           올바른 열심과 열정으로                  2006/10/15/주일

                   (로마서10장1-3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리는 남들이 열심을 내니까 나도 열정을 다해서 같이 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큰 물결의 흐름을 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가던 발걸음을 멈춰서서 “지금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극단의 표현을 쓰자면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니까 나도 지옥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니질 않습니까? 오히려 잘못된 길을 접어선 것을 알았다면 과감히 돌아서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길로 가지 마세요. 여기는 길이 아닙니다. 낭떠러지입니다. 죽는 길입니다.”라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마음에는 한 가지 큰 소원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그것이 잘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1절).

그는 그동안 이방인의 사도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입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관이 잘못던 것입니다.


바울은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구원을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유일하게도 자기 동족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도 항상 애국심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롬9:3을 보면 그는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얘기했는데, 형제들이나 골육의 친척을 아무리 위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끊어지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 만큼 자기 동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것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단적인 큰 올무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잘못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열심은 ‘잘못된 지식’에서 나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교를 신봉하는 자들은 ‘알라’를 위한 충성으로서 ‘테러’를 거침없이 저지르면서 자기들이 했노라고 자랑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살폭탄을 가지고 들어가서 적군을 죽이는 것이 소원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알라에게 가장 큰 상을 받는 순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열심히 결국 국제사회에서 끊어지지 않는 테러리스트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얻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바로 ‘행위구원론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절대로 없습니다. 인간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 데에 철저하게 실패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 또는 충성’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울도 복음을 알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이단자 취급을 하고 당연히 잡아다가 옥에 집어넣든지 처형시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을 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도 앞장을 섰으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의’로 구원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율법주의의 열심히 얼마나 바보짓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율법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의’ 또는 ‘하나님의 의’만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을 달달달 외운다고 해서 복음을 바르게 안다고 무작정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얼마든지 잘못 알 수도 있습니다. 이단자들 중에는 성경을 원어로도 꿰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지식, 잘못된 열심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 는 말씀이 있습니다. 열심히 성전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소, 양, 비둘기 파는 사람, 돈바꿔주는 사람들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돈을 쏟아버리시고, 상을 엎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열심을 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잘못된 열정이 예수를 핍박했고, 하나님나라를 가로 막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아버렸습니다.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복음이 아닌 것을 좇아가면서도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이것을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우리는 건전한 지식, 건전한 상식, 건전한 신앙 위에 서는 것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 가운데 무조건 분위기에 편승되어 숫자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를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무조건 훌륭한 분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요즘 뭐하고 계신 줄 아십니까? 잘못된 기득권층을 보호주는 설교를 하고 있고, 또 바른 민주주의 하겠다는 정부를 반대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사실 독재정권 앞에서는 쥐 소리도 못 내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오늘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단 하나,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셨기에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것이 한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입혀주시는 의(義)입니다.

 ‘복음의 의’,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거절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시기 위해서 보내주신 독생자까지도 처형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끝내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의’를 바르게 아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항상 겸손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열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기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감정을 앞세우고...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설익어서’, ‘서투른 지식으로’, ‘자기 경험이나 주워들은 조각 지식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앞장서다가 결국은 다른 사람들도 실족케 되고 자기 자신도 시험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울은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3:14).

우리 기복신앙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비주의를 배워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앙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오직 복음주의에 입각한 바른 자식을 쌓아야 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가느냐가 아니고 어디를 향해서 뛰느냐?”가 중요합니다.

박범신의 저서 [사람으로 아름답게 사는 일]이란 책에서 “때로 깊은 머무름이 있듯이, 뛰고 달릴수록 어디를 향해서 무엇을 들고 왜 뛰는지를 머물러 생각해봐야 한다. 홀로... 없다. 흐르는 물에도 때로 깊은 머무름이 있듯이, 뛰고 달릴수록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수천 마리가 무리 지어 다니는 스프링 목스라는 양을 아십니까? 그들은 가다가 풀밭을 만나 풀을 뜯어먹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앞에 있는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짓밟으며 가기 때문에 뒤에 있는 양들은 도무지 풀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뒤쪽에 있는 양들이 풀을 먹기 위해 자꾸 앞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양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자꾸 뒤에서 밉니다.

앞에 있는 양은 뒤에 있는 양이 미니까 걸음이 빨라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뛰게 됩니다. 앞에 있는 양이 뛸 때 뒤에 있는 양은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 될 텐데 양의 본능에는 집단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양은 풀도 못 먹고 앞에 가는 양을 따라 같이 뜁니다.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결국 모든 양이 초원을 달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양들이 자기들이 뛰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앞에서 뛰니까 뒤에서 뛰고 뒤에서 뛰니까 앞에서 뛸 뿐입니다. 생각 없이 달리기 때문에 어디로 뛰는지도 모릅니다. 멈출 생각도 안 합니다. 그냥 열심히 달립니다. 벼랑에 다다라서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는 벼랑인지 모르고 계속 달리기 때문에 앞의 양들은 떠밀려서 벼랑으로 떨어집니다. 뒤에 오던 양도 속도를 줄이지 못해 수천 마리가 다 몰살한다는 것입니다. 스프링 팍 영양들의 무작정 달리기와 죽음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단에서 이탈되는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곧, 막무가내 집단에 소속되어 버리고 안주하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이 영양과 같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차게 뛰는지 모릅니다. 아마 이 영양과 같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한 두려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짐승적인 본능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지 진정한 삶의 목표가 있어서 피땀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르고 열심히 살면 그만큼 어리석은 인생을 살다가 망하는 길로 갑니다. 확실하게 망합니다. 그러나 바른 지식, 바른 목표를 향해 뛰면서 거기에 열정을 바칠 줄 안다면 그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며,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목표 없이 뛰는 것은 죽음을 향해 뛰는 것입니다. 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서 누리는 쾌락이 전부인 인생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리는 오늘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라는 뚜렷한 목적의식과 더불어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거기에 열정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없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기를 잘 했습니다. 특히 복음주의 참된 신앙을 배우고 살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사로운 일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그의 의를 힘입어’, ‘그분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여 섬깁시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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