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파랑새와솔가지란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을의
냄새를 맡아보세요 흠~~으~음~!!! 그림의 꽃이라서 향기가 없지요 그러나 제 맘의 향긋한 냄새를 즐겨주세요 ㅎㅎㅎ/저기 보이는
손가락 끝이 제 손가락이랍니다 ㅎㅎㅎ
세상과 구별된 성도 2005/10/02/주일/
(요한복음17장14-22절) 이송로목사(전주서광)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함께 있었지만 이제 하루만 있으면 그들을 세상에 남겨두시고 아버지께로 가셔야 할 입장에 있으신 예수님으로서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저절로 기도가 나오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심적인 기도 제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은 1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날 교회가 하나되고 화합하면서 나간다고 하는 것은 매력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가 성도끼리 하나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가장 염원하신 기도의 제목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늘 하나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하나는 ‘믿는 자의 연합’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와 세계 여러 나라의 교회들이 하나되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렇게나 하나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하나가 뭘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진리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오늘 17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하시는 말씀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진리’란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우리의 성령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진리로 하나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같은 진리를 사수하지 않은 ‘하나!’, ‘연합!’이라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건전한 교단이라면 여러 가지 성향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교파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소 다르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복음의 내용이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금번 총회에서 개혁교단과 우리가 연합을 했습니다. 퍽 다행이고 교회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쾌거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신학과 신앙 노선이 같다는 점에서 하나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눈여겨 보면 우리 예수님의 기도 제목이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룩’이란 말의 뜻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별한다’, ‘따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냥 우리에게 ‘성도’란 칭호가 붙은 것이 아닙니다. ‘성별된 백성’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분명히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손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든 삶의 가치기준을 결정해 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①우리는 영적으로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 장로교가 추구하는 노선은 칼빈주의 신앙 노선입니다. 칼빈주의는 그야말로 가장 성경노선에 충실했으므로 그 가치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곧 성경주의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도 거기에 동의를 합니다.
천주교가 성경에서 이탈했을 때 칼빈 선생이 나타나서 복음주의 신앙을 바르게 확립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칼빈주의 신앙에서 어긋난 신앙이라면 이단으로 간주해도 될 만큼 칼빈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사도신경의 테두리 안에서 잘 정립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강요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칼빈 선생은 그의 생애 동안 신구약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을 강론 해 나가다가 그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것이 칼빈주석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나는 이 방대한 책을 이미 읽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골격을 바르게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복음의 바른 신앙이라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을 받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칼빈선생은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원리에 입각해서 “구약은 신약으로 해석하고, 신약은 구약으로 해석하는 원리”를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잘못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진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른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과 하나될 수도 없습니다.
금번 우리 총회 안에서 가장 큰 홧 이슈로 떠오른 문제가 박윤식 이단이 서북노회라고 하는 곳에 가입하여 우리 교단에 들어온 문제였습니다.
우리 총회에서 정신 나간 몇몇 정치꾼 목사들이 그것을 용납함으로써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70년대부터 대성교회를 세워서 엄청난 이단교회로 성장이루었습니다. 이단교회들이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어왔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이것이었습니다.
처음 하와가 선악과일을 따 먹고 범죄한 것이 아니라, 마귀가 그 여자의 하체를 범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나온 자식이 가인이라고 가치면서 ‘씨앗 속임’의 교리를 만들어내서 성경 전체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번에 그 이단을 단호하게 퇴출해 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만 봐도 영적으로 잘못되면 그 인생 전체가 잘못되고 그 민족이 불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② 도덕적으로 거룩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도덕적으로 얼마나 타락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하게 살려고 할 때에 많은 고난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보십시오.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술 취함과 방탕하고 음란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음란 사치 유흥을 물결을 우리는 견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것들을 동원할 때, 돈을 많이 벌게 되니까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전시합니다. 텔레비전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상업주의의 가면이 쓰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분명히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와 다릅니다.
우리는 공부를 해도, 돈을 벌어도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인류를 위해서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너무나 거창합니까? 쉽게 생각합시다. 이웃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이웃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진리를 가지고 거룩하게 삶으로 인해서 내가 사는 주변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곧 이웃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3.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
바로 우리에게는 선교적 사명이 있기에 이 세상으로 우리를 파송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는 세상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말씀이 여기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해서, 우리가 하나되어 할 이유, 그리고 바른 진리를 좇고 거룩하게 살아야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줍니다.
바로 온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라는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 목적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8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18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날 저녁 때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이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여러분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지 않았어도 예수 믿고 난 이후로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다시 세상으로 가라!”는 파송을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이 땅에 다시 파송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정말 나도 해당되는 겁니까?
제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틀림없이 해당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자 사람들도 위함이니’....”(20절).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파송을 받았으니 만큼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일까 하는 것은 각자가 우리 각자가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몫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큰 테두리 안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문화적 사명’과 ‘선교적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적으로 도적적으로 거룩하게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닌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야 됩니다.
바로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삶이 빛과 소금의 삶으로 나타나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예수, 우리가 믿는 복음은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게 살 때에 그 가치가 더욱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아무리 심한 어두움에 덮여 있더라도 작은 초 하나가 발하는 빛을 없앨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런 가치를 지니고 살 자들이 우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도피하지도 말고, 또한 적당주의로 살아서도 안 되며, 늘 영적 싸움을 싸우되 하나님의 진리의 깃발을 들고 의의 면류관을 받아쓸 때까지 투쟁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구별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