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느끼는 하나님 Chúa cảm nhận bằng trái tim
에베소서 2장 1-22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아무 때나 무슨 일에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생겨먹기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인간이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조상들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전통적 관습에 의해 우상과 짝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온 과거가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우리는 예수를 알게 되었다. 또한 그분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에베소서 2장 13절-
내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 일인가?
이제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다." 우리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즉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 성령님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니라." -고린도후서 13장 5절-
따라서 우리는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계속해 가는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느 때든지, 아무 때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며 느끼고 사는가?"
어떤 이는 매 순간 하나님을 마음으로 그리며 그분의 형상을 생각하며 그분의 행하신 일을 우러러보며 베푸신 은혜에 대해 찬송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이는 한 주간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그치며 겨우 교회에 와서야 하나님을 의식하는 정도로 살아가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세상에 그냥 파묻혀서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서야 "아이고, 하나님!" 하고 부른다.
오늘 우리는 먼저 지난 날 하나님과 멀었던 우리에 대해 살펴보자.
그리고 현재 예수 믿고 살아가는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워졌는지를 알아보자.
나아가서 어떻게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으로 의식하고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1.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
하나님은 원래 우리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과 친구로 만드셨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재 속에서 살아가며 행복을 누리는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얘기다.
그러나 죄지은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말았다.
Trong quá khứ, chúng ta đã trở thành những con người xa rời Chúa.
Con người đã trở thành con người đã rời khỏi cuộc sống của Đức Chúa Trời.
그 이후 인간들은 사는 것도 두렵고 죽는 것도 무서웠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의지할 대상을 찾아냈다.
바로 그것들이 세상의 종교와 여러 가지 풍습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신, 또는 섬기는 대상은 사람이 꾸민 신, 즉 우상이나 잡신사상에서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2절-
우리도 예수를 몰랐더라면 아마 지금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을 보라. 그들의 마음 상태는 하나님을 받아들인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세상이 좋은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죄와 더불어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속성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신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벼러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로마서 1장 28절-
얼마나 고집센 인간이었기에 완고한 인간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우리는 고집센 인간을 "황소같이 고집이 세다."라고 말한다.
지금도 죄악 길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것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고집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 길들은 비뚤어졌으며,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 - 잠언 2장 15절-
바르고 정직한 길을 가르쳐 줘도 듣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얼마나 불쌍한 영혼인가를 알아야 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편 20절-
그러니까 인간은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인간이다. 우상과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야만 하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주셨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외치게 하셨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장 7절-
예수님도 오셔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하러 이땅에 왔노라" -누가복음 5장 32절-
이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 일인가!
우리에게 이 놀라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으니 말이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에 길에 시달려 이제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찬송가 273장 1절-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찬송가 531장 후렴-
2. 하나님과 가까워진 인간
그러나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니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을 벌여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점점 더 멀리 떠나갔던 우리 인간들이었는데 하나님이 가까이하시려고 먼저 일을 벌이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며 십자가 사건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 인간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 -베드로전서 1장 18-19절-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그대로 버려두었더라면 결국 멸망의 길에서 허덕이다가 '저주받은 자'가 처하는 지옥으로 가야만 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란 불가능한 상태까지 갔다. 구제불능의 인간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미 감각이 마비돼버려 불치병이라 여겼던 '한센병 Hansen's disease' 환자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희망도 없고, 게다가 하나님도 없이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런 병자들을 만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누가복음 17장 14절-
그들은 가는 도중에 다 나아버렸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시고 예수는 하신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장 1절-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특별한 고안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하나로 만들어 놓으셨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장 14절-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에베소서 2장 16절-
"우리 둘이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18절-
따라서 우리는 위의 사실로 인해 하나님과 가까워졌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이제 성령께서는 우리로 기도하게 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늘 새로운 은혜 속에서 살아가도록 항상 도우신다.
따라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가치의 삶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내가 예수 믿고서 죄사함 받아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씻겼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되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찬송가 421장 1절-
이렇게 우리는 예수의 피로 정결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고 늘 사귐이 삶을 살게 되었다.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송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늘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 논밭에서 일할 때에도 찬송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과 속삭이는 분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가게에서 일할 때에도 마음에서 기도가 나오고 찬송이 나오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비극은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무엇에겐가 쫓겨살며 시간을 딴 곳에 다 빼앗겨버린다.
학생들은 휴대폰에, 오락에, 젊은이들은 자동차에, 어른들은 좋은 것 먹으려 다니는 곳에 시간을 다 빼앗겨 버린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공간이 없다고나 할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아니 늘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살다 보면 다시 죄의 유혹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어야만 한다.
혹시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 외예 없이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죄는 우리의 원수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사야 59장 2절-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장 9절-
이제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3.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인간
우리에게 또한 성령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과 함께, 매 순간 하나님과 살아가야 할 인간이다.
이것을 아주 잘 표현해 놓은 성경구절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세가지만 잘 실천한다면 우리는 멋지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맹목적이 아닌 "하나님을 행한 우리의 삶의 공식"이다.
'항상 Always'
'쉬지 말고 Without ceasing'
'범사에 In everything'
우리의 하루하루가, 우리의 365일이 그렇게 되어진다면 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한 요청이 아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지고 가서 생각해 보면 퍼즐이 맞추어지듯이 잘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삶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In Christ Jesus'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버린 상태에서 '이미 죽은 자'였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로 와서 접붙임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의 믿음이 '그 은혜의 자양분'을 빨아들이며 쑥쑥 자라가 야 한다.
바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며 '성령 충만함'을 누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이 열매를 통해서 더 많은 영혼들을 얻게 되며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게 된다.
우리가 예수 밖에서 이방인으로 살 때에는 우리에게 이런 열매란 상상조차도 못했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로마서 6장 22절-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의 말씀을 따라서 살면 자연히 성령의 열매가 맺혀가고 충실한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런 열매는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가만히 눈여겨보라. 이런 열매는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품이 예수를 닮아갈 때 가능한 열매들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의 9가지 열매 '아름다운 성품의 열매'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당연코 이 열매들과 관련해서 '산상수훈'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살아갈 줄 안다면 우리의 성품이 예수를 닮아가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인격이 예수를 닮아서 '성품의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히 맺혀갈 것이라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큰 영광을 받으신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장 8절-
이렇게 될 때에 결국 '저절로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예수 닮음'에서 떠나 '폭력으로 세상을 뒤집으려고 덤비는 무서운 세력'으로까지 비치게 되었다. 스스로 전도의 문을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으로 전락해 보리고 만 것이다.
-맺는말-
우리는 이제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Với Chúa Giêsu 살고 예수님 안 Trong Chúa Giêsu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이에 걸맞은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서로 미워하고 물고 뜯고 하는 세속적인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화평케 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제는 자꾸 '율법 율법'하면서 남의 잘못이나 보면서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적극적인 면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죄를 짓지 않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의 허물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하며 원수도 사랑할 줄 아는 곳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다.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를 하고 안 하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가복음 23장 34절-
하나님을 느끼고 사는 마음은 바로 여기까지 나갈 수 있다.
이런 예수를 닮아서 '신의 성품 Divine nature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것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따라가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써 그 보배롭게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후서 1장 4-7절-
이것이 곧 '예수님의 닮은 꼴',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의 삶'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느끼며 살아갈 때에 당신의 삶 속에서 이런 일이 나타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인격자의 모습인가!
우리가 날마다 매 순간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속삭이며 살 때에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