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智慧)란 무엇인가? Trí tuệ là gì? -이송로(李松魯) 씀-
목차 目次
시작하는 말
1. 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2. 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따를 때만 빛난다
3. 죄와 죄된 생활 속에서는 어리석음만 존재한다
4. 지혜를 사랑하라
5. 전도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의 산물이다
6. 지혜자가 되라
7. 지혜자와 사귀라
8. 성경을 읽으라
9. 지혜를 구하라
10. 세상적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11. 순종이 지혜다
12. 지혜가 부른다
맺는 말
시작하는 말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인생으로 살 것인가? 누구나 다 고민해 봤을 것이다. 인생이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롭게 사는 자들보다는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훨씬 많다.
왜 그럴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그냥 웃고 넘기거나 예사로 여길 일이 아니다.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지혜라는 말을 고대 철학자들도 즐겨 사용했던 것 같다. 철학자 플라톤 시대에 이 용어는 그리스어로 소피아: σοφία
(wisdom)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철학'이란 용어가 그리스어로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philosophy)이다.
'필로:φιλο'란 '사랑'을 의미하고 '소피아:σοφία'란 '지혜'이다.
그러니까 철학을 하는 이유와 목적은 "인간이 사랑과 지혜에 도달하는 삶을 향하여 끊임없이 사색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지혜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혜'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치를 빨리 깨우치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다. 지식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발전하여, 지금은 주로 사리를 분별하며 적절히 처리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위키 백과사전-라고 나와 있다.
요약하자면, "지혜란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리 또는 사물의 이치를 순발력 있게 처리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의 사전적인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늘 느끼고 생각했던 지혜에 대해서 얘기를 엮어가려고 한다.
당신은 지혜 있는 사람인가? 스스로 정직하게 대답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가끔 바보짓을 한다. 그래서 그때마다 후회를 하곤 한다. 어떤 경우에 바보짓을 하는가? 그것은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했을 때이다.
바보짓을 계속하고 살면 '어리석은 자'로 전락된다.
나 역시 지혜롭게 살고 싶어서 구약성경 잠언서를 수없이 많이 읽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 1장 1-5절-
1. 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지식과 지혜의 근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지혜는 처음부터 있었다. 우주를 보라. 이것은 인간의 고안이거나 지식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 고안되었고 만들어진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어떤 예술가도, 과학자도 이것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냥 입을 쩍 벌리고 "원더풀!"이라고 고함을 칠 뿐이다.
인간의 상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우주를 하나님은 그 지혜 빚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완벽함에 놀랄 뿐이다. 아름답고도 신비하게 설계되었으며 조화롭게 질서 있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지혜의 출처를 모르면서 "나는 지혜롭다. 나는 똑똑하고 잘 났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과연 그게 똑똑하고 잘 난 것인가 물어보고 싶다.
그냥 궤변만 늘어놓고 또한 가치 없는 것에 관심 갖고 그것들에 신경 쓰며 헛되이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가령 그러다가 인생의 종말을 맞게 된다면 얼마나 바보스러울까!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셨다. "내가 땅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이것은 욥기 38장 이야기이다.
삼라만상뿐 아니라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이 말하는 '자연현상'까지도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이다는 것이다.
가축이나 짐승들이 생존해 가는 방식까지도 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은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욥기 38장 36절-
이런 것을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도 지혜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감사하며 찬송한다.
그렇지만 인간들 중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우연히 존재하는 것, 또는 안 봤는데 누가 아냐? 나는 모른다고 하기도 한다. 세상에 어느 것도 우연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냥 우리 인간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뿐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맹인이 눈을 번쩍 떠듯이 세상의 조화와 우주의 신비를 바르게 깨달을 것이다.
반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들면 눈은 열리지 않는다. 한 마디로 바보로 살게 될 것이며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주어진 인생 동안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불행이며 그 자체로써 어리석을 뿐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우리 인간들이 보다 더 젊었을 때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서 12장 1절-고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지혜로 우주를 다스리신다.
우주 그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사건도 하나님의 지혜 밖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을 반항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마귀와 인간들이 하나님을 반항하고 살아가고 있다. 현대문명의 극치는 마치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것이 가능할 거라는 희망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나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외친다.
하나님의 '허용된 범위 안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오만하며 '하나님 행세'를 한다면 그 순간 인류는 멸망한다.
지금도 하나님은 누가 지혜로운 인생인지, 누가 어리석은 인생인지를 보고 계신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헛되어 보낼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만이 지혜 있는 인간으로 장식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인간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살았을지라도 하나님께 인정되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집 나간 탕자처럼 방황해야 한다. 그들은 '하늘의 보화'를 캐내지 못한다. 그냥 그들은 쥐엄 열매에 해당하는 '육신의 정욕의 것들'에만 집착하다가 죽는다. 만일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어리석은 인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길이가 영원한 것 아니다. 주어진 날 동안에 지혜롭게 살았느냐, 어리석게 살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영원한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을 아는 순간 지혜로운 인생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
바울은 복음을 안 후에 이런 감탄을 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이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로마서 11장 33절-
그가 복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모든 만물의 이치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열려버린 것이다.
그럴 때에 그의 입에서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세세에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1장 36절- 이런 고백과 찬송의 시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때 인간은 더 지혜로울 수 있을 것이며 더 아름다운 방향으로 사랑과 평화의 열매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거짓 지혜는 마귀가 뿌린 가라지와 같다. 참 지혜를 붙들 것인가? 아니면 거짓된 지혜를 붙들고 살 것인가?
하나님의 지혜에서부터 멀어져 버린 인간들을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부르신다. 귀를 가리고 외면하지 말라.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자체가 지혜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곧 이때이다.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 오라. 주님은 사랑의 손을 내미시며 당신을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게 와서 배워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
우리는 예수께로 나와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성경은 지혜의 책이며 복음의 지혜의 기쁜 소식이다.
지혜롭게 살고 싶은가? 참 지혜가 있는 '지혜의 샘터'로 나오라. 그리고 지혜를 마시라. 그러면 지혜로운 인생으로 바뀌게 될 것이며 행복한 인생으로 살게 될 것이다.
2. 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따를 때만이 빛난다
빛이 있는 곳에 밝음이 있고 정결함이 있고 생명이 있다. 그렇듯이 지혜가 있는 곳에 세상은 더 밝아지고 더 안정되며 신뢰가 두터워질 것이다.
지혜 없는 사람끼리 사는 곳에는 요란하고 복잡하고 떠들고 싸우고 이기적인 요소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토주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고대에 보면 어느 사회나 우상과 더불어 다신 종교를 만들어 그것을 중심으로 뭉치게 했다.
왕들도 거기에 예속되어 있어서 그를 이용한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런 곳에 거짓된 예언자가 주름을 잡고 민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서로 나누어 먹고살았다.
고대의 이집트의 왕들도 다 그런 분류에 속하였다.
하나님이 가난한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때에 가나안 족속들의 왕과 민간들을 다 죽이라고 한 이유도 가장 타락한 종교 놀음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짓된 지혜는 인간들의 마음을 피폐화시켰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서로 약탈하고 싸우고 죽이는 일을 연속해 왔다.
지혜자가 없어서 망했다.
그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일어나는 사건마다 보면 그 배경에는 어리석은 자와 지혜 있는 자로 분류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철학자들이 나타났다. 막연한 우상과 미신의 수준을 뛰어넘어 보다 더 나은 가치 추구를 시도했다.
중국 역시도 전국시대에는 유가(儒家)의 맹자(孟子)와 도가(道家)의 장자(莊子)와 같은 사상가들이 나왔다.
보다 나은 가치 추구를 위한 노력이 보다 지혜 있는 인간 삶으로 이어지기를 갈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결과로 덕치주의가 나오고 민주주의를 태동시켰다.
이런 사상은 인간 세상에 지금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고 한계가 있다.
인본(人本)이란 가치만으로는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이것들은 인간 이성에서 나오는 지식과 지혜의 산물일 뿐 참 지혜의 하나님을 떠나서 추구하는 인간중심주의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는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할 뿐 만물의 온전한 이치를 온전히 깨닫게 하지는 못한다. 만일 저들의 종교나 사상이 인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고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여전히 인간차별은 극심화되었고 인간의 죄의 본성을 억제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역시 세속 종교나 그 사상들은 인간을 참된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류는 계속해서 가난과 빈곤, 질병과 미개함 그리고 전쟁과 독재 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정답은 딱 하나다.
나로서는 뭐가 하나냐고 따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알았고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로새서 2장 3절-
인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로 만유를 통일케 하시는 그 능력만이 참지혜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간 스스로는 이런 진리의 빛을 가지고 있지 못한 때에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한 마디로 암흑 속에 한줄기의 빛이 강렬하게 비쳤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게 될 것은 주전 700년 전에 이사야는 미리 예언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사야 9장 2절-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지혜로 복음을 선포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장 15절-
그의 가르침에 수많은 민간인들도 놀랬다. 그리고 당시 종교가라고 자처하던 바리새 인 서기관 등의 모든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깎아내리며 비아냥대는 일들까지 생겼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한복음 1장 46절-
예수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 그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기는커녕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2장 24절-라고까지 했다.
예수는 무엇이 지혜인지를 알고 계셨다. 하루하루의 일과가 지혜 그 자체였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실 뿐만 아니라 병든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때로는 그들과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내셨다.
이것은 바라새 인들이 상상도 못 하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일을 비웃고 심지어는 죽일 생각을 하는 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입을 여셨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누가복음 7장 34,35절-
예수님은 외식하며 겉모양만 갖춘 바리새 인 서기관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바리새 인, 서기관들을 자신들이 무척 지혜 있는 사람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무엇이 지혜인지를 친히 몸으로 보여주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능력이니라." -고린도전서 1장 24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래도 그럴 것이 마귀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엄청난 비밀이었다.
마귀는 예수를 죽여버리면 승리가 자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따라와서 예수를 시험했다.
그러나 예수의 마음은 괴로웠다. 왜냐하면 오늘 밤 당장 자신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더라." -누가복음 22장 44절-
예수는 친히 우리에게 지혜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말로 대항해서 이기기 위해 고심하고 글을 작성하신 것이 아니며 담배를 피우며 사색에 잠기신 것도 아니었다.
그 영혼이 하나님께 맞닿기를 원하셨고 또한 불시험을 이겨낼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셨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마가복음 14장 36절-
바로 이것이 예수의 지혜였던 것이다. 그는 어떤 물리적인 것도 동원하시지 않으셨다. 오직 그에게는 '하나님께 맡김'이 전부였다.
그래서 종교가, 정치가, 로마 총독 그리고 군인, 나아가서는 민간인들까지 동원해서 예수를 처형시키는 일을 선동했다.
바리새 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꾀를 총동원해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의 지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 과업을 완성시키셨다. 예수께서 유월절 일주일을 앞두고 Via 행하신 일들과 또 잡히시며 처형 당하시기 전 당한 일 그리고 십자가의 길(Crucis; Via Dolorosa)을 걸어가신 한 발자국 한 발자국까지 나아가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신 말씀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구원의 완성 품'이다.
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찍히고 상하고 갈기갈기 다 찢어졌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21정 23절-
죄인된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아애만 하셨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기 때문이다." - 히브리서 9장 22절-
예수께서 친히 피흘려 죽으심으로 만인의 죄를 '구속 救贖; Redeption;Εξαγορά'하시고 구원σωτηρία을 완성하셨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한복음 19정 30절-
이 일을 세상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지혜로 구원을 이루셨다.
바로 여기서 참된 구원을 발견하고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헛된 속임수에 매달려 그들이 추종하는 종교적인 노력과 이상적인 상상과 고행의 길을 통해서 구원을 이뤄보려고 무단히도 애를 써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허사였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르거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는 꾀부림 또 떼쓰기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름대로 고상한 척하겠지만 오히려 지옥의 불쏘시개처럼 활활 타오르고 말 그런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가지고 지혜라고 하면 결국 인간을 속이는 것이 되고 오히려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장 12절-
예수만이, 예수의 이름으로만, 즉 예수 십자가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하나님의 지혜로 마련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지혜롭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그 대답 딱 하나다. "주 예수를 믿으라"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자만이 지혜 있는 활기찬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어 낸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예언자들이 기록했고 또한 사도들이 기록했다.
이 일에 대해 우리는 큰 감사와 찬송을 드릴뿐이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의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장 30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장 24절-
이렇게 명시하는 것은 인간이 풀 수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이며 영원한 주님이 되신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를 때에만 인생을 올바른 방향으로 산 것이 되며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예수를 제대로 만나 사람들은 지혜로운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길다가든지, 소문을 듣고 찾아온 민간이든지 간에 예수를 만나서 변화되고 지혜롭게 산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예수가 여리고 지방으로 오신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예수를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가 쳐다보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누가복음 19장 5절- 하셨다.
삭개오는 부랴부랴 내려와 기쁘게 예수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그는 죄가 많은 세리장이었다.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며 회개했다.
삭개와 그 집 식구들은 구원을 받았다. 만일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죄만 짓다가 망하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만나 지혜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의 인생은 빛이 났다. 오늘날 예수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기 까닭이다.
3. 죄와 죄악 된 생활 속에는 어리석음만 존재한다
유혹은 항상 달콤하다. 그러니까 유혹은 낚싯밥과 같은 것이다. 나는 카지노에 가서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다. 짐작으로 랑 수 있는 것은 "밑 가는 장사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유혹을 받는 자는 다시 빠져나오기가 무척 힘들다. 지인의 돈을 꾸거나 은행 대출을 받아서라도 '한건만 하자!'는 욕심으로 스스로를 달래 가며 도전을 하겠지만 다 날려버리고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망신을 당하게 달 될 게 뻔하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잠언 5장 3절-
그러니까 그러기 전에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된다." 이 속에도 중요한 뜻이 담겨있다.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우리 조상들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혹에 놀아나는 사람은 지혜는 달아나고 무지와 몽매가 그 마음을 포진해 버리는 암병과도 같다.
따라서 "지혜롭게 죄를 짓는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죄는 그 성질이 교활하고 추하고 악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고상하게 죄를 지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질문 또한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죄는 어리석음을 수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혜'라는 '유혹의 미끼'라는 포장지로 싸여있기 때문에 속고 살며 그 포장지만 따라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없듯이 간교가 지혜로 바뀌는 일도 없다. 지혜는 애초부터 진실의 친구이며 정의와 사도이다.
그러니만큼 지혜는 항상 '빛'이며, 동시에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간이 죄를 짓게 되는 경우 그 자체로써 이미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회개하고 다시 빛 가운데로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다는 말이다.
사람이 어리석은 일에 가담하거나 죄를 짓게 되면 '바보'로 전락된다. 거기에는 아이큐 높고 학식이 풍부하고 지위가 높고 낮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왕이라도, 판검사라도, 교수라도, 기업가라도 죄에 가담되어 있는 경우 "너는 바보야!"하고 조롱하는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할 리가 없다. 인정한다면 두렵게 될 것이고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억지라도 자기를 숨기려 할 것이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라도 뻔뻔하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연 그들에게 행복이 있을까!
죄의 종어 있는 삶이 행복할 리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 더 깊은 죄악의 수렁에 빠져드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사망의 몸에서 구해 줄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을 향해 '어리석은 자의 삶'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지혜가 없어서 속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속는 것'이 지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전략상 일부러 '속아 주는 것'은 지혜가 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배경에 '선한 일을 위한 추구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잠언 24장 5,6절-
다윗에 그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 압살롬과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 칼을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일이 되었다.
그는 지혜를 동원했다. 밤에 왕궁을 떠나 울면서 요단강을 건너 마하나임으로 피신해야 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인생을 살아온 풍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이럴 때는 그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인가를 알고 있었다.
압살롬의 계교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목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할 때 추격해 오던 요압 장군의 칼에 의해 여지없이 베임을 당해 죽게 되었다.
압살롬은 허욕을 부리다가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더러운 욕심으로 행하는 자는 항상 어리석을 뿐이다. 거기에는 '잔꾀'만 존재할 뿐이다. '잔꾀'는 지혜의 친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내었느니라." -전도사 7장 29절-
그러니까 잔꾀로 인생을 산 자들은 인류 역사에 오명을 남길 수밖에 없다. 우리 대한민국의 근간의 역사만 봐도 그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대통령 중에도, 검찰총장 중에도, 국정원장 중에도, 검사와 판사들 중에도, 의사들 중에도, 대학총장과 교수들 중에도 총망라하여 그런 자들이 각 곳에 숨어서 악을 저질러 왔다.
그러면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한 그런 삶이 지혜로운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우매자와 바보, 즉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다. 특히 고의로 악을 저지른 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 탈을 쓰고 거짓말하고 대통령을 했었던 이름 가운데 자를 '멍' 또는 '벙'이라는 글자를 넣어서 불렀다. 그러니까 죄는 넘어지는 자를 향하여 조롱하며 '이 멍아야!', '이 벙아야!'라며 비웃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서 살기를 바라신다. 이 말은 정직하게 살기를 바라신다는 뜻이 된다.
그곳에 하나님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른다. 그리고 그 정직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요셉과 모르드개 그리고 다니엘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죄와 그 죄의 유혹을 물리쳤던 경험이 있었다. 그것이 지혜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 땅의 왕들에게 존귀함을 받게 되었다.
죄의 유혹을 이긴 만큼 하나님의 보상도 컸던 것이다.
그들이 그때 그 순간을 지혜롭게 견뎌내지 못했더라면 그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그때 받은 보상보다도 역사 위에서 길이길이 빛나는 이름이 되었고 하늘에서도 큰 상을 받을 존귀한 자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가 지혜이다. 우리는 다 죄를 짓고 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기회는 '회개할 기회' 또는 '돌아올 기회'이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알고 보면 순수하게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이다.
다윗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갈취했다. 그리고 그녀가 임신을 하자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꾀를 쓰다가 오히려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보내 전사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그 우매한 행동을 '사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직설적으로 죄를 지적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히 크시다. 다윗은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당한 그 어떤 것도 달게 감수를 했다.
그래서 다윗은 더 위대하게 되었다. 반성이나 회개가 없는 자는 무지한 자이다. 그리고 훗날 어리석은 자로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하여 그 명성이 당시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명성이 높아진 후에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죄는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그는 그 지혜로 막강한 국방력을 확보하고 외국 여러 나라에게서 조공을 받아낼 정도로 국력을 신장시켰다.
솔로몬 성전과 궁전을 지어 야훼 신앙의 절정에 이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봉헌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가서 이방 여자들을 후궁으로 끌어들이게 되고 그 여자들을 통해 성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처럼 정신을 놔 버린다. 궁녀들의 청을 들어주어 이방인의 신당을 만들어주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지혜인가? 아니다. '지혜의 왕에서 바보 왕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크신 자비 때문이다. 그는 후회했다. 그리고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고는 그는 지혜서라고 불리는 잠언, 전도, 아가서를 썼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만 지혜로운 인생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돌아오라!"
"주 예수께 나오라!" 그러면 산다. 그것이 지혜다. 사람은 당신을 실망시킬 수 있어도 하나님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예수께 나오기만 그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양팔을 벌려 여러분을 안아주실 것이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시편 103편 10절-
그러니까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가 있고 그 죄를 기억조차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자신의 죄가 무겁다고 해서 자살을 선택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가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회개할 길이 있다, 빌 길이 있다.' 성경에서 에서를 어리석다고 하는 이유는 '회개할 기회를 잃었다' 점에서 그렇다.
가룟 유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예수를 판 후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 그의 피가 있다. 그 효능은 지금도 큰 효력이 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장 7절-
4. 지혜를 사랑하라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과 사람이다.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사랑'만 강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하나님 사랑'이란 수직 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기 깨문이다. 수직축이 바로 되지 못하면 수평축인 '인간사랑'은 이기적이 되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속담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우리는 수직적 관계가 바르게 될 때에만 '인류사랑'을 바르게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끈이 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지혜를 사랑하라."는 말을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지혜'를 추상명사로만 이해를 해 왔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1장에 나타난 '말씀; 로고스λόγος'가 즉,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구약성경 잠언에 나타난 그 '지혜חוכמה'가 때로는 의인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적용해도 될 중요한 말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잠언 4장에 나타나는 지혜에 관한 내용들이다.
우리가 살면서 사랑해야 할 대상과 미워해야 할 대상이 있고 때론 무관심해야 할 대상도 있다.
사사건건 오만가지 간섭을 다 하고 살아서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영역은 알고 아주 협소하다.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경우 뉴스 보도나 인터넷 정보에 나타난 정도가 전부이다.
그나마 오늘 이 시대에는 엄청난 정보들을 공유하며 어떤 사건이나 일들이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대일수록 사람이 더 지혜롭게 살 수 있는 반면 더 우맹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관심 안 둬도 되는 일에 나서서 소리를 지르며 마치 난리나 난 것처럼 세상을 시끄럽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같이 휘말려 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리석음에 미련함을 더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누구 때문에 바보같이 살았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엇이 지혜인지를 알아야 하고 죄는 미워하되 지혜를 찾아 나서야 한다.
찾는 자가 찾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가 그것을 얻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장 17절-
우리는 날마다 지혜를 찾아 나서야 하며 지혜를 신랑으로, 신부로 맞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미련한 자의 길에서 방황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잘 났다고 뽐내지 말라. 스스로 지혜 있다 자를 하나님은 꺾어버리신다.
잠언 4장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잠언 4장 5절-
지혜와 명철은 쌍둥이이다. 아니 신랑과 신부의 관계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지혜가 가는 곳에 명철이 항상 함께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정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라고 당부하고 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릴 때, 또는 어길 때 죄는 우리에게 침투작전을 쓴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이런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9편 1절-
바로 그거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둘 때 그리고 늘 묵상할 때 지혜 있게 살 수가 있다.
우리가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석은 말과 행동은 버리고 지혜와 명철로써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단장해야만 한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잠언 4장 6절-
여기서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은 '그'이다. 그는 누구일까, 무엇일까? 나는 이 지혜가 창세 전부터 있었던 지혜로 이해하기를 원한다. 의인화 돤 지혜 또는 신격화된 지혜로 둘 다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부터 있는 말씀;로고스λόγος'가 표현되고 되듯이 잠언에서 지혜를 그런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표현해 보았다.
"예수를 버리지 말라 예수가 너를 보호하리라 예수를 사랑하라 예수가 너를 지키리라."
그러니까 나의 견해는 "참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필역하고 싶다.
어쨌든 "지혜를 사랑하자!" 그러면 그 지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지혜가 당신을 보호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과 가는 길을 지켜주게 될 것이다.
이런 멋진 결과로 이어지는 삶의 자리로 이끌어 주는 것이 지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혜를 붙들어야 하고 그 지혜를 일생동안 사랑하며 속삭이며 살아가야만 한다.
바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신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그렇데 이어가야 할 것이다.
또한 그를 높여야 한다. 지혜가 아니면 우리는 어리석게 된다.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죄에 매여 죽을 인생이다." 그런데 그 지혜가 우리를 살렸다. 너무나 놀랍다. 예수는 우리를 살렸다. 그분은 우리의 지혜이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잠언 4장 8절-
그냥 놀랍기만 하다. 저절로 "영광 주께 돌려보내세."하고 찬송을 부르고 싶다.
그분을 높이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높아지려 하고 내가 영광을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마음을 낮추라. 그리고 무슨 일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라. 그러면 그가 당신을 높여주실 것이다.
그를 품고 입 맞추라. 그리하면 오히려 그가 우리를 영화의 관을 씌워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사랑하자. 지혜를 사랑하고 높이고 껴안고 입 맞추자.
5. 전도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의 산물이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일까!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
나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서 전도하는 그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다. 보통 사회에서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위험을 무릅써가며 구출해 준 사람을 '의인'이라 칭하고 상을 주는 제도가 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사회의 귀감으로 여겨 이런 포상제도까지 두어 동포애, 인류애를 자극시켜 준다.
물론 나도 물에 빠져 죽기 전에 있는 구출해 준 적이 3번 이상 있다. 나는 언론에 난 적도 없지만 나로 인해서 생명을 구호받게 된 그들은 지금도 나에게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남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지혜라고 말해야 옳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를 위해서 일생을 보냈다.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부름을 받아 평생을 전도하는 일에 보냈다.
왜냐하면 그는 사명도 사명이지만 영혼 구원하는 일로 인생을 보내는 것이 가장 지혜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라고까지 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순교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좌우 편에 살인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인강도로 취급하여 극형에 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죗값을 치르는 일이 되셨기에 이 사건은 너무나 귀중한 사건이 되었다.
바로 이때, 한 편 강도가 입을 예수께 욕을 했다. 역시 강도답다고나 할까, 아니면 무지몽매하다고나 할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누가복음 23장 39절-
죽을 때까지 뉘우침이란 없는 이 사람에게는 독기 설인 비방만 있을 뿐이었다. 바보 중의 바보요, 어리석은 자 중의 어리석은 자이다.
그런데 순간 다른 한 편의 강도가 입을 열더니 그 무식한 말을 뱉은 자를 향해 야단을 치면서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23장 40,41절-
정말 대단하다. 예수는 살인자가 아니며 애매하게 고통을 받고 처형까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있을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누가복음 23장 42절-
이런 센스와 지혜가 어떻게 해서 발동이 되었을까! 정말 놀랍기만 하다.
예수는 응답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장 43절-
예수는 정말 위대한 전도자이셨다.
그가 공생애 초기에 말씀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난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것을 위하여 왔노라." -마가복음 1장 38절-
그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장 20,21절-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전도하는 일이 미련한 짓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전도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수단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 전도는 지혜다. 죄악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이 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히려 죽어가는 자를 방치하거나 유기하는 것이 미련한 짓이며 무서운 죄이다.
전도는 지혜이다. 지혜자는 전도를 한다. 솔로몬은 '전도서'를 기록했다. 무엇이 참된 인생이며 지혜로운 인생인가!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사 1장 2절-
그러나 솔로몬은 그것을 말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헛된 인생의 나날 같지만 '참된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참되고 참된 인생을 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도서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남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 -전도서12장 13절-
안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큰 업적을 남기고 명성을 떨쳤을지라도 헛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따라 사는 자의 삶은 헛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간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본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 있는 인생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솔로몬은 제대로 된 전도자로서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정곡을 찔러주었다.
그러니까 전도하라. 목표를 세우고 전도하든, 그것이 아니건 간에 전도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 디모데후서 4장 2절-
전도처럼 아름다운 지혜가 없다. 지혜에는 사랑도 함께 간다. 영혼을 사랑해서 전도하지만 결국은 이것처럼 지 헤로운 일은 없다.
가족 구원을 방심하고 살지 말라. 그들을 사랑한다면 전도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다가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후회할 것이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전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 다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는 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말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 12장 3절-
6. 지혜자가 되라
솔로몬은 지혜자가 되었다. 그가 얻은 별명의 '지혜의 왕'이다. 그래서 비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솔로몬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잠언서와 전도서 그리고 아가서를 기록했다. 잠언 29장까지에서 851개의 지혜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지혜 없는 일에 빠졌었다. 세상적인 쾌락의 종이 되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남는 것은 후회뿐이었다. 그리고 남긴 것이 "너는 그렇게 살지 말라" 하고 남긴 것이 지혜서이다.
그는 온전히 깨달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장 10절-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학문으로 명성을 떨쳤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살았다면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바보!'라고 하실 것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기업을 운영하고 인류사회에 공헌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다면 그 마지막에 들려오는 소리는 '우매 한자여!'라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인류의 시조 아담보다 지혜가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담의 지식과 지혜는 모든 것의 이름을 지은 작명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요 예술가였을 것이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오늘 날로 치면 그에게 무슨 스마트폰이 필요 있을까!
그의 두뇌는 천재여서 모든 지식 정보를 함유할 뿐만 아니라 소통의 지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다루게 사용하는 데에 대한 지혜로 가득했을 것이다.
죄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여서는 오늘날과 학문연구도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교육기관이 따로 있어야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도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사랑 가득하고 지혜와 지식, 평화와 즐거움이 가득한 세상, 즉 실낙원 그대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를 배워야 지혜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모든 지혜가 충만한 상태였을 것이다.
어느 날 간교한 뱀의 유혹은 무서운 독약이 되고 말았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장 5절-
하와가 유혹을 당했다. 남편이 교육을 잘못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다.
뱀의 유혹에 귀가 솔깃해지는 순간 이미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열매'로 보이고 만 것이다.
인간에게 탐욕이 먼저 들어왔다. 결국 그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그 남편 아담에게도 먹게 했다.
이런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범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추방되었다. 그리고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도 크게 손상이 가해진 상태였을 것이다.
이 이후로 인간들은 '어리석은 길'에서 떠나지 못하고 늘 탐욕에 끌려 살아가게 되었다. 지혜롭게 되기는커녕 반대로 바보가 된 셈이다. 입만 똑똑한 바보들, 그냥 뚝심만 남은 바보들로 인생을 살아가다 보니 너무나 피곤하고 지친 몸이 되었다. 땅을 파고 경작을 해도 웬 병해충에다가 가뭄, 홍수까지 겹치면 농사를 다 망쳐야 했을 그런 인생을 가야 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의 삶은 너무나 고달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들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추위나 더위를 견딜 만큼의 환경을 변함없이 제공해 주셨다.
인간은 이런 어려움을 자신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극복해 나가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점점 더 어리석은 생활로 추락이 되고 말았다. 그 추락은 '죄악의 가득함'으로 나타났다. 세상의 타락이 가속화될 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막가는 인생', '막가는 세상'을 묵인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가 임한 것이다. 물론 그중의 의인으로 인정되는 한 가족이 있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육지에다가 배를 지으라고 하셨다. 노아는 묵묵히 순종했다. 사람들은 비웃었다. "무슨 멀쩡한 날 방주를 만들다니! 지네 좀 맛이 간 것 같아."
그러나 묵묵히 순종했다. 순종이 지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20년을 기다려 주셨지만 노아 가족 외에는 노아의 전도를 듣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홍수로 지구가 다 덮일 때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향락만을 추구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우연히 찾아든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전파일까?
어느 누가 전파했는지에 앞서서 "왜 이런 무서운 재앙이 온 세계 125개국을 휩쓸고 지나가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들은 못된 짓만을 골라가며 자행하고 있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그리고 교회들마저도 세속화의 길로 빠져들어 교회가 돈 놀음하는 것 같은 장소가 되었다.
자정 되지 못하고 세상의 경제논리에 그대로 쓸려가는 듯한 모습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그러다 보니 이단들이 교회라는 이름을 빙자해서 교회 안에 침투하여 교인을 탈취해 가고 교회까지 빼앗아가는 일들이 벌어졌다.
미국과 유럽의 상당히 많은 교회들은 거의 문을 닫고 하나님과 굿바이 선언을 한 상태로 가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크로나 바이러스 19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후속방안은 무엇일까!
우리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집 나간 탕자는 돈이 다 떨어지자 돼지 치는 집에 들어가서 신세를 지며 지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이 핑돌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 그리고 품군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거기서 벌써 일어났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염치 불고하고 가서 아버지께 부탁하여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자!"
생각 참 잘했다. 이것이 지혜다.
인간들아. 망설이지 말라. 뭐 이상 돼지우리 옆에서 지긋지긋한 냄새를 맡아가며 거기서 머물려고 하는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외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니라" -호세아 6장 1절-
한국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살 길이다.
돌아가면 더 큰 은혜와 자비가 준비되어 있다.
이 풍성한 은혜와 자비를 맛보고 노리는 삶이 지혜이고 지혜자이다.
거기서 예수를 제대로 만나고 예수의 손을 꼭 붙고 살라. 이것이 지혜 있는 자의 행보이다.
7. 지혜자와 사귀라
"지혜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얻느니라." -잠언 13장 20절-
지혜자와 동행하면 그 지혜자의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 게 분명히 다른 뭐가 있을 것이다. 그런 자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쌓이는 게 있을 것이다. 그만큼 얻을 것이 많다는 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에 자신의 인격에 변화가 생기고 그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3년 이상 받은 제자들을 보면 눈에 띄는 게 있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닮은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베드로를 봐도 그것을 할 수 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메시지를 보라.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후서 1장 5-7절-
그는 어느새 지혜 있는 스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지혜로 행하신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어리석은 자들을 만날 때가 있다. 생각이 건전하지 못하고 한 건 해서 큰돈 만질 생각이나 하고 실속이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약속도 잘 안 지키고 또 맨날 남의 얘기만 지어내서 하고 비난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 게다가 꾸기를 좋아하고 시간만 있으면 담배를 꼴 아물고 음담패설을 즐기고 밤이 되면 술을 마시며 2차, 3차를 가고 한다면 그런 자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돈이라도 몇 푼 쥐고 있으면 졸졸 따라다니는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같이 맞장구를 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뻔하다. 해를 입게 되어 있다. 인격에 치명상을 입게 되고 돈도 시간도 다 허비하게 되고 심지어는 몸까지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나는 솔직히 교회 목사라고 다 믿지 않기로 했다. 장로라고 믿지 않기로 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어느 때까지는 나는 목사, 장로, 집사 이러면 일단 믿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아무개 목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을 느낀 적도 있었다. 아무개 전도사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아무개 목사가 이끄는 현 정부 퇴진운동을 하는 것을 봐도 그렇고, 또 나와 잘 아는 지인 목사가 대통령과 현 정부를 향해 듣기가 민방 할 정도로 비방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개 장로가 대통령 할 때도 입에 침 한 방울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며 절실히 느꼈다.
그런 자들을 지지하고 따라다니는 것이 지혜 있는 행동인가를 묻고 싶다. 사회에서까지 지탄을 받는 어리석은 자들의 말이 옳다고 확신하며 좇아다니는 것을 보며 무척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간혹 친구들과 함께할 때 너무 불편한 자리가 되고 말 때가 있다. 그 불편한 자리에 계속 있다면 마음이 불안하거나 답답할 것이다.
단체 채팅을 할 때도 보면 꼭 친구들 간의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는 것보다는 정치 이야기로 돌아가서 태극기 부대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가치관을 어필하려고 드는 경우를 보기도 하고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 세상을 잘 아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계속 글을 쓰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상한 적이 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런 자리에 함께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나 아까운 청춘이며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는 들어가서 같이 노닥거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지혜의 대열'에 낄 수 있을 만큼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 입에 나오는 말이 지혜롭지 못하다면 상대방 역시 나를 무시하거나 비웃고 비난할 수도 때문이다.
우리는 지혜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생각이 건전헤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한다. 특히, 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잠언 25장 11절-
야고보 선생은 우리에게 정중히 가르쳐 준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 -야고보서 1장 19,20절-
이렇게 할 줄 안다면 어느새 지혜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알지도 못하면서 꼭 나서서 안 데기 짓을 한다."
우리는 안데기 짓을 하면 안 된다. 먼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지혜다.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나 하려고 하면 누가 당신을 좋아하겠는가?
우매자, 즉 어리석은 자는 지금도 당신에게 "이리 오세요. 나랑 함께 놀아요!"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친구의 유혹, 또는 불량한 사람들의 유혹을 뿌리치거나 피하는 것도 지혜이다. 인정에 끌려다니면 같이 어리석은 자로 낙인이 찍힌다.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쳐라. 요셉처럼 말이다. 이집트의 종살이로 팔려간 요셉은 그 여주인에게 유혹을 당했다.
그는 과감했다.
그러나 거짓 누명까지 쓰고 감옥살이를 했다.
그렇다고 패배한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더욱 함께하셨다.
그는 총리대신으로 발탁되었다. 왕은 이같이 지혜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나봤기 때문이다.
8. 성경을 읽으라
성경의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산물이 아니다.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편 19장 7절-
성경은 완전한 책이며 영혼을 살리는 구원의 책이며 또한 지혜를 주는 책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성경을 읽어야 한다. 나는 지혜롭게 살고 싶고 지혜자가 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읽거나 듣는다.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사서삼경이나 삼국지와 비교할 책이 아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쓴 '무오한 책'이다.
따라서 완전한 지혜가 담긴 이 책을 읽고 따르는 자들은 지혜롭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맛게만 해석하여 의미를 왜곡시키는 자들은 가장 무서운 범죄자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며 가장 어리석은 자로 추락되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자들을 따르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먼저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나아가서는 진실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지혜이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이란 말씀을 "지혜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로 바꾸어 읽어 내려가면 유익이 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시편 1편 1절-
악인들은 '꾀', 즉 '잔재주와 잔꾀'를 부려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지어 내어 자기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불량한 사람이다. 세상에는 종교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 스며들어 그렇게 사는 자들이 그런 많다.
"내 맘 같은 줄 알고 믿었다가 속았구나!"라는 말로 탄식을 하며 괴로워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그런 자들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시며 시간 보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지혜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편 1,2절-
그렇다. 시편 1편에서 150편까지에서 제1편 서두에 이 말씀이 먼저 툭 튀어나오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즉 지혜 있게 살아가는 인생이 되려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주일예배 때만 교회 가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밤낮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시면, 또 그의 말씀이 없으면 쉽게 유혹을 받고 넘어지게 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넘어지게 되면 '어리석은 자로 추락'이 된다. 그러고 나서야 "또 바보짓했네!"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어리석은 자들을 좇지 말고 함께 하지도 말고 구별된 삶의 자리로 나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악인들이 배설한 고급술, 음식 그리고 여자들이 있는 곳에 꾸역꾸역 갔다가 낭패를 당한 인생들이 무지기 수이다.
지혜 있는 자들은 얼른 그런 자리를 빠져나와서 가정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는 특히 아침시간을 강조하고 싶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밤에 늦게 자들보다 아침에 빨리 일어나는 자들이 성공할 율이 높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5편 3절-
여기서 말하는 아침은 '새벽'이라고 해석해도 무관하다.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속삭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지혜이다.
과거 한국교회가 그랬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복 있는 민족이 되었다. 그렇게 독재자들이 판을 치고 국제정세가 요동을 쳤어도 20세기 후반에 기적을 이루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국민들이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일해서 그렇게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새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방방곡곡에 포진이 되었다.
바로 성경을 든 민족은 지혜 있는 백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코란을 들고 사는 이슬라미들은 다르다. 그들은 새벽이 되면 뿔나팔을 불어대며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면서 요란법석을 떤다.
그러나 그들의 손엔 코란이 들려있을 뿐이다. 성경이 아니다.
비록 그들이 그들의 종교예식에 따른 각가지 일들을 벌인다 해도 여전히 '지혜 없는 민족'으로 남아있다.
세상에는 어떤 율법주의 종교나, 신비주의 종교로는 인간을 더 무지한 자리로 빠뜨릴 뿐 지혜롭게 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는 인간의 무지에서 해방시켰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성경을 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지혜를 주신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곳에는 항상 '성령의 스승'이 함께 한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의 문, 지혜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한다. 오늘날 출판 기술이 뛰어나 성경책은 많은데 오히려 성경을 읽지 않는다.
나 어렸을 때는 성경책을 사려면 큰 맘먹어야 살 수 있었다. '죄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검은색 표지에 종이 겉 부분에 빨간색 칠'이 입혀져 있었다.
은혜가 되는 말씀에 빨간색 색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암송하고 때로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그 말씀을 묵상하고 일할 때도, 공부할 때도 그랬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에 파묻혀서 길가에 떨어진 씨, 돌짝 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져 떨어져 아무런 결실 없이 허무하게 되게 하고 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회에 가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했어도 밖에 나오면 세상의 화려함에 쉽게 도취되어 무분별하게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서울에 살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 전철 안에서 조용히 성경책을 꺼내서 읽고 있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곤 했다.
나도 그랬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남영동 근처에서 시내버스를 탔는데 내가 성경을 꺼내어 읽고 있었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런 젊은이가 있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이래서 복을 받았다. 성경을 손에 든 민족은 반드시 흥한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성경을 읽어라. 유튜브를 열어서 성경을 들어라. 집에서 '성경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어라.
그러면 당신의 미래는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며 당신의 후손들이 주의 영광을 볼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살 때 집이 없었다. 아무 집이라도 발 뻗을 곳이 있다면 가서 잘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잘 곳이 없어서 기도실에서 계속 자고 새벽기도 팀과 합류했다.
어느 날 교회에서 한 집사님이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박길춘이라는 형과 함께 갔다.
지금은 그 집사님의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사당동 피난민촌이라는 곳의 판잣집이다. 기름종이로 입혀서 비가 오면 새고 때론 밤하늘의 별이 보일 때도 있고 겨울에는 아주 춥다.
그래도 그 집이 궁궐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 신학교를 처음 입학했을 때다. 1977년이다. 그런데 그 집에 무슨 책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배 깔고 성경책을 읽었다.
그때 읽은 성경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서 그 추운 겨울을 거뜬히 이겨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여기의 영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이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장 15절-
이왕이면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자녀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디모데는 그 외조모 로이스와 모친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았다.
결국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믿음을 통하여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아 목사가 되었다.
나 역시 내 외조모와 모친으로 인해 예수를 믿었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복 받은 사람이다.
그분들의 기도와 성경을 읽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당신이 후손들을 위해 믿음의 조상이 되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것이 지혜 있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9. 지혜를 구하라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후 하나님께 일천 마리의 번제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며 밤에 나타나셨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역대하 1장 7절-
솔로몬의 대답은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소서!" -역대하 1장 10절-
지식만 있다고 대수가 아니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능도, 지식도, 지혜도 하나님으로 나와야 한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기도하게 될 것이다.
기도가 없으면 세상에서 늘 속고 산다.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는 교활한 사람들이 많다.
법꾸라지라는 별명을 듣기도 한 검사들도 있어왔다.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나쁜 짓하며 살아온 자들이 우리 사회에도 많이 있다.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그들의 노리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법의 틈새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자들도 있다.
솔로몬은 지혜를 사용했다.
어느 산파에게 찾아가서 아기를 낳았던 두 여인 사이에 큰 분쟁이 있었다.
한 아기가 깔려 죽었기 때문이다. 한 여인이 자기 아기가 죽은 것을 보고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아기를 바꿔쳤다. 상대 편 여인이 잠에서 깨어보니 아기가 죽어 있는 것 아닌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아기는 자기가 낳은 아기가 아니었다.
이 여인은 바꿔치기 한 여인에게 "이 아기는 내 아이가 아닙니다. 당신이 바꿔쳤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시치미를 뚝 떼며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 아기는 애 아이입니다."
오늘날과 시대였으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결코 쉽지 않다. 혈액형을 알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더군다나 DNA 방식이라는 건 아예 상상에도 없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가 되자 솔로몬에게 가서 판결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솔로몬 앞에서도 서로 똑같은 말을 하며 두 여인은 절대 양보란 없었다.
"칼을 가져오너라. 이 아기를 반씩 나눠주겠다."
이러자 진짜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대답을 한다. "이 아기를 저 여자에게 주세요."
바로 이 여자에게 "이 아기를 주어라."
이것이 솔로몬의 지혜 중 가장 눈에 띄는 심벌이 되어 오늘날에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 검찰청장을 임명한 일에는 나도 동조했다. 낚싯밥인 줄 모르고 덜컥 물었다가 큰 고통과 상처를 입었다.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을 임명한 후 얼마 안 가서 후회했다.
속으로 "아, 이렇게 감촉같이 나를 속이고 온 국민을 속였구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땅을 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통곡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국가운영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의식 있는 국민들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했다. 속이려는 자에게 당해내기란 이렇게도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솔로몬과 같은 지혜자가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다.
구약성경 여호수아에 보면 여리고성을 빼앗은 후 아이를 점령했다. 이에 대한 공포를 느꼈던 기브온 사람들이 화친하러 왔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여호수아와 관료들을 속였다.
그들의 꾀에 여호수아도 넘어갔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의안이 벙벙했다.
그들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만난 주된 원인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 9장 14절- 라는 말씀이 대변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 기도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덥석 그들이 말을 믿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니 죽일 수 없어 나무 폐고 물 긷는 잡부들로 삼았다.
인생을 사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다 못해 구멍가게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간에 자기 경험과 자기 지식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라" -에베소서 6장 18절-
우리는 사사로운 일까지도 기도하고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직접 체험애 보라. 그러면 훗날이 좋은 간증 거리가 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면 기도도 하지 않고 마냥 허둥지둥 대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이라면 보나 마나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기도로, 말씀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편 12절-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의탁하는 생활을 40년 이상 해 왔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서 기도를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기도 속에서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다 보면 '하나님의 지혜의 음성'을 들려온다.
나는 '이 지혜를 붙잡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즐거운 일이고 나의 인생의 행복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길이만큼 늘 가까이 계시며 '지혜로 함께' 해 주셨다. 이것이 감사하다.
무엇이 많이 있고 없고가 아니며 누구에게 인정을 받고 못 받고도 아니며 명예가 있고 없고도 아니다.
오직 '주님의 지혜의 인도'에 감사할 따름이다.
때로는 시험과 큰 시련을 만나기도 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럴 때 그것을 피해서 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
그럴 때 자포자기할 것인가, 아니면 자살을 선택할 것인가?
사람들은 너무나 뜻밖의 충격스런 일을 만날 때 '위기의식'을 느낀다. 이럴 때 피할 수 있다면 도망이라도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의 무기가 될 수 없다.
기독교 초기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로 살아가는 그들은 너무나 많은 불이익을 받아가면서 까지 예수 믿는 신앙을 지켜야 했다.
이럴 때 그들은 어떻게 이것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예수의 동생으로 태어났던 야고보는 그들을 위로하면서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한 줄 알거든 모든 일에 꾸짖지 아니하시고 모든 일에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장 5절-
여러분 같으면 시련과 환난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막연하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란 옛사람들의 말만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자포자기를 할 것인가?
우리에게 '기도'라는 최신 무기가 있다.
10. 세상적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나는 세상적인 지혜를 인정한다. 인류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나서도 그 지혜를 활용하여 필요한 도구와 무기를 개발했다. 아니 예술을 통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런 일을 계속되고 있다.
그 자체를 가지고 이것은 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으로 판명이 될 것이다.
세상적 지혜가 다 나쁘거나 잘못된 거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들의 노력과 고로를 인정하고 때로는 고마울 때가 있다.
그것은 정치나 경제와 과학분야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예수를 모르지만 보다 훌륭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뽑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또 기도했다.
경제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기업을 일으키고 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인류 역사 속에서 한국이 이렇게 부상이 될 때가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한국은 이제 '지혜 있는 민족'으로 떠올랐다. 요즘의 코로나 바이러스 19문제를 대처하는 그 능력이 한국인들의 지혜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온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의 대통령이 잘하는 것도 있고, 현재의 질병관리당국에서의 관리능력이 우수성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하나님을 아는 인재들이 각 곳에 숨어있다는 얘기도 된다.
나는 이것이 더 자랑스럽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세상이 따라올 수가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역으로 만일 이 만족 속에 예수의 복음이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있는 이 나라에도 예수 믿는 한국인들이 알게 모르게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의 역할도 알게 모르게 깊숙이 스며들어 이 민족을 살리는 일에 기여가 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알고 보면 세상적인 지혜라도 이것을 어느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상호작용을 한다. 그래서 나는 세상적 지혜 역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간주하고 늘 감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따로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인류의 구원, 즉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세상 어디에 처해 있든지 간에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따라."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 국위선양을 하는 것이지만 일반의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선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사는 것이 곧 지혜요 능력이다.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크리스천들이여, 당신은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다.
한 가지 강조하고 지나가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보다 월등하기커녕 보통 수준에도 못 미치는 행동과 말을 하며 살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그러니까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교회에 가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켜 분란을 조성하고 밖에서는 사사로운 일에 세상과 담쌓고 살지는 않는지!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 '지혜 없게 살았음'을 크게 회개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Be very careful, then, how you live-not as unwise but as wise." -에베소서 5장 15절-
우리는 세상이 따라오지 못할 성경을 배우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더 지혜롭게 살아서 세상의 본보기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당부드린다. "와이즈 크리스천이 되라! Be a wise christian!"
이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복음전도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를 월등하게 하신다. 과거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던 역사가 구약성경이다.
사사기에서만 봐도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을 때는 그들의 삶은 항상 승리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조금 여유가 생기고 살기가 편해지면 다시 범죄 했다.
어리석음의 반복의 역사가 바로 사사기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왕이 없는 것만을 탓했다. 사실은 왕이 있는 것보다 '영원한 왕' 즉 '하늘의 왕'이 계시지 않은가!
그러니까 인간은 조금만 빼난하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과거를 추억하며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에 대한 추억에다가 감사한 맘을 가지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들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렸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즐거움보다 세상 유혹의 달콤한 것들이 더 빨리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지도자를 원망한다.
'하나님의 멀리함'에 그 원인이 있음에도 말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인 것을 망각하는 크리스천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나'를 돌아보며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지혜다.
세계 어느 민족도 하나님을 멀리하면 어리석게 된다. 프랑스, 유럽, 영국, 이탈리아 등이 다 그래 왔다.
이제는 한국이 그 기로에 서 있다.
영적으로 볼 때는 국가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우리 크리스천들이 정신을 못 차릴 때가 비극을 자초할 때이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전재하다.
우리가 수가 많아서도 아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인하여" 복 받았다.
그러면 그 복을 발로 차 버릴 것인가! 아니면 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 4장 6절-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큰 효력이 있다.
나는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네가 하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하나님의 지혜로 일궈온 대한민국으로 봐도 좋다.
기독교인 숫자가 많아져서 기독교인들로 인해 별별 안 좋은 일들이 다 일어나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도 이 민족 중에는 '신실한 자', 즉 의인들'이 많이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믿는다. 안 그러면 딱 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민족이다. 우리의 민족성을 자랑도 하지만 우리의 민족성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지혜로 이 민족을 이끌어 오셨다. 지금도 그 지혜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본의 아베가 쩔쩔맨다.
11. 순종이 지혜이다
우리는 알아들어야 한다. '알아들다'라는 말은 '알다. 듣다' 우리는 부모나 스승이나 지도자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마귀를 못 알아먹는 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징벌이다. 우리 인생은 망아지처럼 날뛰면 안 된다.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양심의 테두리 안에서, 또는 상식 선의 범주 안에서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오합지졸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비교적 법치주의 테두리 안에서 법을 잘 지키는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라가 이 만큼이나마 안정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통치자를 거역하고 법질서를 어긴다면 안정을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요즘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확산될 때에는 보건당국에 잘 따라주는 것만이 상책이다.
이 일을 가장 잘 한
나라가 대한민국으로 모범국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왜 주셨을까!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얼른 감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세상에는 마귀의 유혹이 있다. 그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행복하게 살라고 주신 것이 율법이다.
그러니까 법을 잘 지키면 나만 좋은 게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거라는 알아야 한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질서가 유지되고 안정되며 함께 행복을 누리자는 것이다.
세상에는 악법도 있다. 그래서 특정 다수에게 유리하게 법을 만들어 오히려 차등 의식에 빠지게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하는 법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완전한다. 세상의 모든 법이 하나님의 법에 기초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튼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신명기 5장 29절-
행복의 비결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완전한 계명이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세상의 많은 법이 존재할지라도 '십계명十誡命;עֲשֶׂרֶת הַדִּבְּרוֹת 아세레트 하디브로트' 범위 안에 있다.
저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동의한다.
십계명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뭐가 될까? '사랑'이다. 이것을 둘로 나누면 '신애神愛'와 '인애人愛'이다.
이것을 위한 공정하고 공평한 잣대로 삼으라고 주신 법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심을 틈타서 법을 법대로 사용하지 않고 인간의 욕심을 따라 교묘하게 해석하거나 고쳐서 하나님을 거슬렀다.
법은 진화되어 왔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그 시대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이 십계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 한다. 안 그러면 악법이든지, 편법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십계명;Decalogus (데칼로구스)의 위력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것을 다 지키지 못했다. 또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법의 위반자, 즉 위법자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다.
다시 말하지만 죄를 지으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 지혜에도 손상을 입는다.
그러나 다행이고 또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율법 외에' 다른 '새로운 법'을 주셨다. 이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義'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장 21절-
그러면 율법 외에 한 의가 무엇일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장 22절-
한 마디로 '믿음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법이다.
죄에 빠져 어리석게 된 모든 인류는 절망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살 길'을 열어주셨다. 이 한 줄기의 빛이 인류의 소망이 되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가 우리의 죄를 속죄했다. 다만 이 새로운 법 "예수 믿으라."에 순종하면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법에 순종하는 자는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일평생 율법의 멍에를 매고 굼벵이 도신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어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고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예수 믿으면 율법주의자로 살 때보다 율법을 훨씬 더 잘 지키게 된다.
나는 그것을 체험했고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장 16절-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는 실패해서 죄인으로 전락되었지만 예수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의인義人이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미끼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 아니 나는 이 사실을 영원한 진리로 믿는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이 로마서라는 책을 쓰다가 스스로 놀라며 감탄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장 17,18절-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인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이며 행복인 것이다.
여기에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부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순종하며 사는 일이 힘들까 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 내 힘으로 지키려고 발버둥을 칠 때는 더 깊은 죄악으로 빠져들어가는 자신을 보며 한탄을 했었는데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셨다.
'우리를 돕는 자'가 항상 옆에 계신다. 바로 그분이 '보혜사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우리는 아직도 연약하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따라서 우리를 도우시는 가장 유력한 방법을 제시하셨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5:6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장 26절-
예수가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 얼마나 놀라운 또 하나의 사건인가!
그래서 우리가 죄악을 이기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성령께 의지하고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지혜 있는 삶인지 모른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장 15-18절-
복음에 순종하라. 예수 안에 즐겁고 행복한 길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너무나 쉽다.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가 당신 안에 들어가신다.
하늘의 별을 따와라는 것도 아니고 학식이 풍부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말씀이 심히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로마서 10장 8절-
핑계하지 마라. 예수 믿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제든지 은혜의 보자 앞에 나가기만 하면 성령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여 주실 것이다.
날마다 예수 안에는 복음 진리를 붙잡고 살라.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는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도이다.
그 속에 속죄의 피가 흐르고 있고 바라보는 자는 산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진리를 믿고 날마다 찬송하고 감사하고 살면 된다.
뒤로 물러가지 마라. 용기 있게 믿음의 길을 가라. 이것이 지혜다.
12. 지혜가 부른다
당신은 달려가야 한다. 지혜가 소리 높여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유하다.
그러기에 왠지 마음이 끌리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이다.
"모세야! 모세야!" 하시던 하나님의 음성처럼 지혜가 우리를 매우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부른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것은 세상 철학자의 목소리도 아니다. 어떤 종교가의 목소리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특히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 아무리 불러도 귀를 닫아버리면 소용이 없다.
완악한 자는 좋은 소리에 귀를 막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한 자는 귀로 듣고 마음을 열 것이다.
찬송가의 한 대목이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율법주의자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철저하게 싫어했다. 그래서 자청해서 그런 자들을 색출해서 죽으려고 공문서까지 만들고 들고 다녔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이름이 개명하기 전이었으므로 "사울아, 사울아!"하고 부르셨다.
그는 강렬한 빛으로 인해 눈이 멀어버렸다.
만일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평생 율법주의자로 살면서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그것만이 옳은 줄 알고 따라가다 애매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고 지옥불에 떨어졌을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셨다.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그를 불쌍히 여기시며 회심하여 돌아서게 하시고 예수의 증인으로 평생을 살게 하셨다.
지혜가 부른다. 잠언 8장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지혜의 초대장'을 나를 반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가 나를 초대했다.
와! 대박! 이것이 인생의 대박이다. 어디 복권 당첨에 비할까!
내 양심을 걸고 하는 말이지만 복권 1등 당첨이랑 이 초대장 절대로 안 바꾼다.
이것은 하늘의 장자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면 엿 한 가락을 먹으려고 새 신발을 갖다 주는 어린애와 같이 어리석게 될 것이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냐?" -잠언 8장 1절-
그 지혜는 우리에게 깨우쳐주기를 원한다.
자, 들어보라.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나를 잃는 자는 자기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잠언 8장 1-36절-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의 부름'에 응해야만 한다. 이것이 지혜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우리 인생은 이 갈림길에 있을 뿐이다.
비록 좁은 길이지만 여기에 생명이 있다. 바로 예수 믿는 길이 좁은 길이며 때로는 핍박을 받아야 하고 따돌림을 받게 되고 유혹을 물리치며 가야 하기에 힘들 때도 있지만 이 길을 가는 것만이 살 길이며 천국 문에 다달을 길이다.
때가 차매 지혜, 곧 예수 그리스라는 하는 분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이 어둠 속에 허덕이며 사망의 그늘진 곳, 유대 땅에 오셨다. 만난 이들마다 예수를 보고 놀랐다.
병든 자를 고쳐주었다. 그리고 천국의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기대하셨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는 마음을 열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인류의 쉼터'가 어디인지를 친히 알려주셨다.
어디가 쉼터인가? '예수', 그분이 우리의 쉼터이다. 예수가 계신 곳이 참된 평화와 쉼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다른 데서 평화와 쉼을 얻으려고 하다가 젊음과 돈, 그리고 인생을 탕진해 버린다.
말년에 어디로 갈까!
예수 앞에 나오라. 지금 예수 앞에 나오라. 그러면 지금 당장 쉼을 얻을 것이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함 받고 맘에 기쁨 넘치어 감사 찬송하리라."
예수는 우리의 지혜이시다. 그분이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절이 있었다. 유월절, 초실절, 수장절 등을 지켰다. 그들은 명절에 잔치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먹고 마셔도 만족함을 얻지 못했다.
초막절 끝날에 예수는 이렇게 소리를 질러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복음 7장 37,38절-
예수 앞에 나가는 것이 지혜다.
당신이 현재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바로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가라. 그러면 해결해 주실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반석이시다. 사막 길을 가는 우리 인생들이 고달파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마시게 하시려고 '생수'를 준비해 두고 계신다.
예수는 죄에 지쳐있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지만 만족을 얻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따가워서 뜨거운 대낮에 물 길려고 나왔다가 예수를 만났다.
예수는 그 여자와 대화를 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장 14절-
그 여인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온 동리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다 데리고 왔다.
이와 같이 어느 누구라도 예수 앞에 나와서 예수를 만나면 그 인생이 변한다.
옛사람 그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만나서 새사람으로 살 것인가!
과연 무엇이 지혜인가?
지금 지혜가 당신을 부르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재물을 모으고 부자가 되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안일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고 싶은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에 관심이 많은가, 아니면 영원히 있을 것에 대한 관심이 많은가?
지작이 있는 자라면 당연히 '영원히 있을 것', 즉'영원한 가치의 것'에 관심을 두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의 초대에 응답하라. 조금도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머뭇거리는 순간 마귀는 우리를 영원히 미루게 만든다.
따라서 지금 응답하라. 이것이 지혜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 55장 1절-
그렇다. 영혼의 양식을 사는 일은 공짜다. 나오기만 하면 된다. 망설이면 바보다. 용기 있게 나오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이사야 55장 3절
맺는말
우리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참지혜란 단순히 이 세상에 사는 날에 국한한 건강하게 살고 문화적인 수혜와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삶에로에 이르는 것까지에 해당하는 지혜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얘기한 지혜는 구원과 영원한 삶에 이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믿고 따르며 그의 보내신 정령에 의지해서 사는 것을 기초를 두고 한 말이다.
나는 이 세상 살아가는 요령에 대해 쓸 만큼 지식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 어느 분야에서 살든지 간에 '하나님의 중심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이라는 것은 그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논하다가 그냥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참지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참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에 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만 후회 없는 인생이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아, 옳았다." 하고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수는 그 지혜에서 나온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ntanus을 통해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모두 놀라게 하셨다.
이런 놀라운 메시지는 난생처음이었다.
그동안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는 판이하게 차별화된 말씀이었기 까닭이다.
예수는 산상수훈, 즉 산상설교 결론에서 이런 말씀을 던지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태복음 7장 24,25절-
아무리 명언을 들려줬어도 중요한 것은 '실천', '순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천이 없는 삶', 즉 '불순종'하는 자는 모레 성 쌓다가 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예수는 이런 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규정하셨다.
복음과는 상관없는 일에 평생을 걸다가 갈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순종하여 예수를 닮은 삶을 살다가 갈 것인가?
지금 당신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냥 안일하게 살 수는 없다. 꿈이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듯이 말이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대신 '소망'이란 말을 더 즐겨 사용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며 또한 하늘 나라이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 Jesus' Second Coming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한 방법과 태도로써 "깨어있으라!" -마태복음 24장 42절-라고 하셨다.
그러면 깨어있는 신앙이라는 게 뭘까!
항상 복음이 신앙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선배 신앙인들은 모두 이렇게 살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서 1장 20,21절-
바로 이것이 깨어있는 신앙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에서 보듯이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미련한 여인들은 나태한 삶을 살아가는 가리킨다고 한다면 슬기로운 여인들은 의식적으로 깨어 있어서 어느 때, 어느 시에 예수가 재림하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앙을 뜻한다.
당신은 슬기로운 사람으로 살아야만 한다. 슬기와 지혜는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다.
어리석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에게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시며 외면하실 것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5장 30절-
그러나 지혜롭게 살아온 '깨어있는 자'들에겐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태복음 25장 21절-하시며 영화로운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이것으로 당신은 지혜로운 인생으로 살았는지, 아니면 어리석은 인생을 살았는지 판가름이 날 것이다.
"지혜는 가장 값비싼 보석과도 바꿀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지금 지혜를 얻고 지혜와 친구가 되고 지혜를 신랑으로 삼았다면 당신은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당신의 이 행복을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장 20절-
"마라나타! מרנא תא: maranâ thâ!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Our Lord come!" -고린도전서 16장 22절-
* 이 글은 누구의 글이나 말도 인용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다만 성경을 인용했으며 나의 신앙에 따른 가치를 정립해 보았을 뿐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해해 주시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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