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사랑의 띠로

좁은길을 걸으며 2020. 7. 25. 20:57

사랑의 띠로 Sợi dây của tình yêu thương

골로새서 3장 1-17절

살면서 때론 "세상이 상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또는 자기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이기고 보자는 데서 생겨지는 문제라고 봅니다.

이것은 특히 정치집단에서도 그렇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지나칠 때는 "정말 살벌하다"라고 까지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하게 보이면 잡혀먹는다." 그래서 서로 기가 죽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사랑'입니다.

다 없어도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사랑'이란 두 글자, 아니 '러브'라는 한 단어입니다. 사랑이 없는 세상은 서로를 적으로 대하게 만들고 그 어떤 행동이나 말도 밉게 보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다면 웬만한 허물이 있어도 덮어주게 되며 또 적극적인 면에서 그들의 약점을 대신 감당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눈이 먼다."라는 맞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받고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잘 못 느낄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았다면 "이리 봐도 하나님의 사랑, 저리 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장8절-

 

그런데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언제 당신이 나를 사랑했습니까?"라고 말하는 불효 막심한 자식처럼 사는 게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멀리 한 게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이렇게 산 인간들이 인간들끼리는 잘 살고 있습니까? 대답은 아주 부정적입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물고 뜯으며 전쟁하고 살인하는 세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는 이렇게 살벌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을 보십시오. 중국을 보십시오. 아니 북한을 보십시오. 일본을 보십시오. 그러면 한국은 안 그렇습니까?

'사랑'은 온 데 간데없고 '무정'과 '무자비'로 가득 찬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육신의 혈연관계도 보십시오. 부모님 생존해 계실 때는 사랑하는 척 흉내를 내다가 부모님 떠나고 나면 남보다도 못하게 사는 형제간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사는 인간들의 민낯입니다. 그러면서도 '인류 평화'를 외치는 것은 어쩌면 '가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평화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사는 인간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언제까지요? 지구의 멸망의 순간까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상수단을 간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십자가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3:1-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인류는 완악하여서 그냥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여주신 것이 외아들을 십자가에 처절하게 피 흘려 죽게 하시면서 보여주신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흉한 얼굴을 가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딸은 이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운동회가 있었습니다. 학부모들도 다 참석하여 구경을 하고 응원을 하는 날입니다. 선생님은 "학생 여러분, 이번 운동회 때는 부모님을 꼭 모시고 오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애는 "어머니는 절대로 학교에 오시면 안 돼요. 친구들이 어머니를 보면 나를 많이 놀려댈 거계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아이가 자랐을 때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딸아, 네 어미의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니?"

"왜요?"

"사실은 네가 어린 아이였을 때 내가 들에 나가서 일하다 보니 동네에서 시꺼멓게 연기가 올랐왔단다. 가만히 보니 우리 집이 타는 것 같아서 정신없이 달려봐 보니 이미 불이 활활 타올라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단다.

그러나 너를 방에 두고 나온 엄마는 너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어. 불속으로 뛰어 들어갔단다. 너를 이불에 싸서 나오면서 나는 불에 온몸이 다 화상을 입게 되었고 얼굴까지도 이렇게 못쓰게끔 망가져버렸단다."

그때서야 이 아이는 "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나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의 욕심에 눈이 가리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고 살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이 어디 있냐? 하나님이 있다면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도록 놔두겠냐?" 등 끝없이 반대쪽으로만 가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실컷 하면서도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기를 쓰고 반대하고 말도 못 꺼내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하나 '하나님의 사랑의 깨달음'입니다.

 

바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줘야 합니다.

 

 

 

2.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보여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구원'과 연결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율법과 복음을 나누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보면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율법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즉 어떻게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며 동시에 이것을 어기는 경우에는 '범법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율법의 잣대로 재보면 온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취지는 '벌주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더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도록'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가슴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법 자체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그릇'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음이니라."-로마서3:20-

율법 앞에서 의롭지 못한 인간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대안이 인간에게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죗값을 받아야 한다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의 불에 떨어져 영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에게  한 줄기 서광이 비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발한 지혜가 이것이었습니다.

"나의 유일한 아들을 세상에 인류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보내리라."

멸망에 처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그 열렬한 사랑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 시작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사랑이 담겨있었습니다. 그 손길에는 사랑이 묻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가시는 곳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끝없는 사랑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모습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게 합니다.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여인의 모습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하게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3년 반 동안 사랑으로 제자들을 양육해 오셨지만 배신한 자에게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시기 전 "너희도 이같이 서로 발을 씻기라." 하시면서 '사랑과 섬김'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십자가가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습니다. 

사실은 사랑이 예수를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이 십자가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 진리 속에 '거룩한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 놀라운 능력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생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아들이 피를 흘림으로써 '생명으로 대신하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대언자로 계십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죄지은 것이 많았어도 친히 그 십자가의 사실 하나로 죄를 없이할 능력을 나타내 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시며 함께 하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아니 저절로 고개를 떨구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받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이 십자가에 비밀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또한 보혈의 능력입니다.

 

 

3.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라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항상 있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13장13절-

 

이것을 알면서도 오늘날의 교회들이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와 '죄의 속성'을 가진 자들 때문입니다.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도'라 일컬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은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것을 당연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랑실천'에 앞장서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로맨틱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자기희생을 통해서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예수 처음 믿을 때 느꼈던 사랑, 가졌던 그 사랑을 지속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 처음 믿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때의 가슴에는 "산천도 초목도 다 새 것이 되었고 원수도 죄인도 친구로 변한다"라는 말입니다.

그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임하여서 강하게 역사할 때 나타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간직한 가슴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눈물이 나오는 사랑 입이다.

하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우리들끼리 '사랑의 줄로 하나로 연결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진정한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할 때는 말로는 사랑일지 모르지만 어느새 '증오와 미움'이 들어와 있고 '불평과 원망'이 들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에베소서4장2.3절- 라는 말씀을 되새기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보십시오. 다 똑똑합니다. 심지어 가짜 뉴스를 보고 와서도 자기가 모든 것을 잘 안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면 마귀가 금방 알고 틈을 탑니다. "마귀로 틈탈 기회를 주지 말라."-에베소서4장27절-

겸손하십시오. 서로를 용납하십시오. 허물을 덮어주십시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길입니다. 사사건건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는 곳에는 사랑 대신에 증오와 미움 그리고 상처와 분열만 남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허물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에 가까운 사람도 실수가 있습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실수가 적은 사람일수록 남을 미워할 확률이 높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적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짓거나 허물이 많은 사람을 보면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으로 대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너는 왜 그러냐?"는 식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슴으로 감싸주고 나면 저절로 문제가 풀립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느니라."-베드로전서4장8절, 잠언 10장12절-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위엣 것을 찾으라!"-골로새서3장1절-

이제 우리는 보다 더 높은 이상과 가치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과 절대로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의 생명', 즉 '영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지 모릅니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저절로 할렐루야 찬송이 나와야 합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골로새서3장9절-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로새서3장10절-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세상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사로운 일에 목숨 걸지 맙시다. 변론이나 다툼이 있을 때는 그 자리에 있지 마십시오. 피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쌍히 여기며 용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 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로새서3장13절-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명령)이니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거기에다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더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나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인간이 사는 데는 이것저것 중요한 요소들(필요)이 많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사랑이 있으면" 나머지는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가, 평화가, 기쁨이, 겸손이, 양보가, 희생이, 부드러움이, 온정 등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로만 떠들지 말고 "나는 정말 내 가족을 사랑하는가?"

"나는 형제들과 자매들을 사랑하느냐?"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작은 가슴의 사랑이 온 가족을 훈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를 훈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Sợi dây của tình yêu thương buộc chúng ta làm một.

사랑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될 때에만이 교회는 '천국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 교회, 가정 안에서 '사랑'을 쏙 빼버리면 '지옥 같은 교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성령이 뜨겁게 임하여서 '사랑의 화신化身'이 되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러면 내 마음에서 맺어진 '성령의 첫 번째 열매인 사랑'이 온 교회를 뜨겁게 만둘 수도 있습니다.

내 가정과 내 주변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예수의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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