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고 감사하라
시편 136편
시편 136편은 '감사(Thanks)'라는 말이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인간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자녀라면 마땅히 부모의 은혜를 기억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감사의 생활화가 되지 못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걱정을 앞세우거나 원망이나 화부터 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될 일도 꼬이게 되고 삶의 악순환이 반복될 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생각할 때 특별한 일이 있어야만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살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부모님의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만하고 살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한시도 자녀에게서 마음이 떠나본 적이 없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특별하게 잘해 준 것만 기억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성숙한 신자가 되고 성숙한 신자가 된다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시가 창조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또 출애굽과 가난한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에 대한 감사 그리고 의식주를 해결케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늘 우리 자신의 지내온 과정을 돌아보며 감사할 것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하나 세어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된다면 이것처럼 행복한 인생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은 개인이든, 국가이건 간에 거기에 걸맞는 사랑과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개인적으로 가난하거나 천한 신분을 가지고 살았거나 아니면 장애인으로 또는 질병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죄로 인한 질병과 기근과 가난, 전쟁과 갈등의 연속으로 서로 미워하고 착취하고 거짓말하게 만듭니다.
빈부의 편차, 이념적 갈등, 국가간의 이해관계 등이 얽혀서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 적대관계에 놓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은 평생 좌절을 겪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감사는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불만과 불평과 원망의 연속이 거듭될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 처해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알고 구속주이신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상황은 반드시 역전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터져 나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지켜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1. 하나님께 감사하라
오늘 시편 본문에서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2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인간들이 찾고 있는 수없이 많은 신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잡신 숭배와 미신을 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신', 즉 '뛰어난 신', '으뜸가는 신'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신이시며 '유일하신 신', 오늘 우리가 부르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분이 절대자이시며 우주를 다스리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왕이시며 주가 되심을 확실히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분께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십니다.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실만한 능력과 자격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오늘 날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시대 내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방 우상과 거짓된 신들에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냥 보시지 않으시고 징계하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훈련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면 가나안 땅을 밟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없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광야생활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가르쳐 주셨는데 참된 예배와 감사의 대상이 누구신가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물론 절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사'가 없는 희생과 절기는 상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문제는 그분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분은 본성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 GOD is good"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선이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절대적인 선이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저 사람은 참 좋은(착한=착한) 사람이야!"라고 합니다.
그런 말 들을 때 누구나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선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본성에 있어서 한없이 착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erd"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비교적 착한 분이 아니라 지고의 선을 가지신 착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지고의 선을 가지고 우리에게 '인자하심 Lovingkindness'로 다가오셨습니다. 이 말을 번역하면 '사랑과 친절'이란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 원문의 헤세드חסד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총재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느꼈습니다. 아니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신도, 우상도 인간에게 헤세드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을 섬기고 절하는 인간들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은덕'이란 씁니다만 허상일 뿐입니다.
원불교에서 '천지은', '법은', 부모은, 동포은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들 나름대로 마사의 이치를 추론하여 만든 '은혜론'일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참 신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냥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끼리끼리 잘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이 누구신가를 알고 먼저 그분께 감사하는 삶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대주재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원자이시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영원한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헤세드', 즉 '아가페'를 보여주신 큰 사랑, 즉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신 사랑으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켜 가면서까지도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저절로 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2. 기억하고 감사하라
못된 인간이란 누구일까요? 인륜적인 차원에서는 '지 아비도 몰라는 보는 놈'이라는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편 '은혜를 배신한 놈'이란 말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들 모두가 그 모양 그 꼴이 되었었던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몰라보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배신적인 행동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아닌 이집트의 바로 왕 밑에서 주도록 고생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고, 죽겠다. 아이고 하나님!..."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가련하고도 답답한 인생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자'였습니다.
당장 배부르게 먹고 잘 입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 속박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구원자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절망의 한숨만 푹푹 나왔습니다.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들을 낳으면 하수에 던져야 하는 지경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예비하셨습니다. 바로 왕의 공주의 손에서 자라서 큰 지도력을 익히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순순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선하신 전략으로 바로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백성에게 애정을 가지고 이렇게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 자손은 사 대(四代)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창세기15:16-
하나님은 선사할뿐만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약속하신 것을 정확한 때에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것은 은혜일 뿐입니다. 무슨 그들의 노력이 있었던 걸까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주셨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안 것이 대단한 공력이나 되는 것처럼 날뛰지 말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와~!' 그냥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로 온 데 간 데 없고 그냥 자기 잘났다고 떠들고 날뛰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책 보면 다 나오는 지식, 인터넷에서 찾으면 다 찾을 수 있는 정보... 이런 걸 가지고 다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맛보고 경험한 이후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르게 배웠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만 시켜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넌 후 그 상막하고 뜨거운 뙤약볕 속에서도 타 죽지 않고 주리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 믿은 후에는 고난이 없습니까? 더 많은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리라!" 이 기대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이 무엇인 줄 알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까지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켜야 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고 또한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이미 그와 같은 제사나 절기 등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통해서,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구속,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사는 것이 우리 복음주의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일예배에 나와서 그 구속함의 은혜를 노래하면서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주일예배는 것이고 또 교회의 무슨 절기나 행사가 있어서 참여한다 할지라도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야인 합니다.
인간이 모인 곳에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다가는 자칫 시험에 걸려들고 당을 짓는 곳으로 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뭉쳐진 곳에는 항상 '아름다운 하나'의 역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하나 됨'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나가면 인간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끼리끼리 뭉쳐서 수근수근하며 지극히 육신적인 생각으로 치달아서 결국 분열과 논쟁과 싸움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온 데 간데 없고 감사는 어디로 사라지고 미움과 분노가 그들의 가슴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십자가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하나님,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 사랑', '그 자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오늘의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에 붙들려 사는 사람의 입에는 원망 불평, 미움과 다툼의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는 입술에는 찬송이 있고 칭찬이 있고 화목이 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성령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이며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게 될 것입니다.
3.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스라엘 민족은 식량해결이 쉽지 않은 터전에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가보면 그 상황을 절실하게 보고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감사가 있습니다. 빵 한 조작만 놓고도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25절-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 있습니다. 매일 일상에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지나가는 사람을 얼굴을 봐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집안에만 갇혀 있었을 때 "야, 사람이 그립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답니다.
사람이 사람 구경을 하고 사는 것 감사해야 합니다. 집안에서 서로 얼굴 보고 식사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하루에 열 번을 보면 열번 다 "소중한 당신입니다."를 외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모두 다 사랑의 대상이지 미워할 대상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민족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 어느 것 하나만 없어도 "못 살겠다!", "답답하다!" "아이고 죽겠다!"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휴대폰만 집에다 두고 밖에 나가도 불안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망각하고 살 때도 많습니다. 손톱이 길면 손톱깎기만 없어도 답답합니다.
요즘 같은 더위에는 에어컨 없으면 어떻게 살까요? 에어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누구나 다 같이 누리는 혜택이니까 그냥 지나칠지 모르지만 먹는 것 하나하나, 보는 것 하나하나, 또 좋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것까지도 감사하기로 합시다.
감사할 이유를 세어 보기로 한다면 감사할 것은 만 가지가 넘고 백만 가지가 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거나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감사 대신 찾아드는 '원수 같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끼면 분위기를 망치게 됩니다.
감사할 조건을 멀리서 찾을 것 아니라 주변에서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냥 화장실을 가다가 못에 이마를 받았는데 피가 주르륵 쏟아졌더랍니다.
그 수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마를 다쳐서 망정이지 눈구멍을 쑤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떤 분 남편을 너무 일찍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슬펐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합니다. "그동안 28년을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대처나 생각해 보니까 그 기도가 옳더라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슬픔, 악감정도, 불편한 환경도 모두 감사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3:17-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패턴 인생으로!' 나아갑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인생인데 그저 좀 모자란 것, 좀 불편한 것, 좀 힘든 것, 좀 손해 보는 것, 좀 억울했던 것에 매달려서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조금만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차고도 넘치는 감사 속에서 살아도 부족할 판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곳에 더 많이 감사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이 밤에도 감사하고 자리에 누울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호흡을 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또 생각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또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음이 감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시다.
감사는 수증기 같아서 감사하는 곳에 다시 은혜의 단비가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에는 감과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야 합니다. 감삼 감사 감사.... 끊없이 말입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과일을 내듯이 말입니다.
감사하고 감사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본문이며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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