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예배와 헌신 Worship and Sacrifice

좁은길을 걸으며 2020. 5. 16. 13:23

참된 예배는 헌신이다 
로마서 12장 1-2절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배가 무엇인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예배란 무엇인지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교회와 예배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교회의 기능 중에 첫번째가 예배모임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회막 또는 성전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바로 예배였다. 거기에는 희생제사가 필히 수반되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이갈 길이 있다것 자체가 엄청난 특귄이었다. 
거기에는 제사장이 있었고 소,양,염소 등의 희생제물이 있었고 제사행위가 있었다. 짐승의 죽음을 통하여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아것은 나타날 구속, 즉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이며 그림자였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즉 단번의 희생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은 '은혜의 보좌'라는 개념의 교회에서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방식은 자연스럽게 종결되었다. '제사의식'에서 '신약의 예배'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신약성경 히브리서에서 잘 뒷바침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인, 야만인 등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특권이 부여되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와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게 되는 아름다은 은혜의 해가 열리게 되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웅장한 예배당이나, 위엄을 지니고 가운을 입은 멋있는 목사나, 빵빵한 오캐스티라를 갖춘 그런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두 세사람이 모였다 할지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이 교회이며 거기서 드려지는 하나님의 경외가 진정한 예배이다. 
그러니까 예배의 본질은 예수의 피로 하나 된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거나 강론하는 그곳에서 찾아야 한다.

 

 

 


장소는 상관이 없다. 다가의 다락방이 교회가 되었고, 흩어져서는 어느 가정에 모이면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되었고 그곳에서 시와 찬미의 신령한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빵을 나누었다. 
기독교 박해가 심해졌을 때는 토굴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오늘날도 기독교 박해가 심한 곳에서는 비밀의 장소인 지하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바로 이곳에 성령의 은혜가 임하고 또한 형제자매의 사랑의 넘치는 모습은 얼마든지 목격되고 있다. 
그들의 소원은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였다.

 

 


그러니까 예배라고 하는 것은, 죄인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을 기리며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와 찬송과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예배이다. 
빠라서 예배란,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서 드리는 공식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다. 
예수님처럼 삶 전쳬가 하나님께 드리지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인 것이다. 주일에 딸꿍 한시간 교회에서 예배드렸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다. 
올바른 예배란, 공식적인 예배 후에 '예배의 연정 선상'에서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도록 살아가야 한다. 
사실 로마서 12장 1-2절은 '삶의 예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스리고 악한 시대 속에서 세속에 물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서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이며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희생이며 온전한 예배라는 것이다.

 

1. 우리는 예배자(Worshipers)이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 
예배없는 삶은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된 인간이며 하나님의 지으신 백성이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나아가서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믿는다면 예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려고 우리를 지으셨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바르게 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외쳤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 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시96:1-3).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음에 대해 감사하며 활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서야 한다. 
이무 것도 필요없다. 그냥 나를 그분께 꾸미없이 보여드리고 그분께 "나를 받으소서!" 하는 태도로 나아가면 된다. 
예배할 때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왕을 왕으로, 구원자를 구원자로 인정해 드리며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줄 안다면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들 높이리라."(시91:14). 
하나님께 나아가 나의 사랑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 예배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감사와 찬송으로 말이다. 
오늘 나는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2. 예배와 말씀 
오늘의 개혁교회에서는 예배의 가장 큰 비중을 '말씀의 강론'에 둔다.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성경 강론을 통해서 '바른 예배자'로 서게 만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에도 백번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원래 예배란 설교에 모든 비중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져 왔던 생활과 생각은 "예배드리려고 교회간다"는 말과 "하나님 말씀들으려고 교회에 간다"는 말이 거의 일치되어 왔다.

이 말이 서로 모순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초대교회의 모임에서는 시와 찬미가 있었다. 모일 때마다 성찬예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의 나눔이 있었다.

특히 성령의 은사 중 방언, 예언 등이 교회의 파장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리고 복음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이 이었다.

그러나 성찬예식이 약화된 큰 원인은 로마교회의 의식중심의 교회 때문에 개혁자들은 말씀중심의 교회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부시대 이후로는 성경계시의 완성에 따라 교회 안에서의 방언이나 예언들이 거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66권 성경계시로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개혁시대 이후로는 '말씀의 강론'을 예언의 말씀 또는 계시의 말씀으로 인식해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성령과 진리'의 예배, 즉 예수님의 가르침에 준한 예배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오늘 날 교회 안에서의 '말씀의 강론이나 가르침'은 성경의 바른 해석에 따른 '시대의 바른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바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단적인 해석이나 시대의 바른 예언적 기능을 못한다면 이것 또한 문제가 있다. 거기에는 성령도, 진리도 없다.

특히 목사들에게는 성경의 해석과 설교의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특권을 오용 또는 남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진 세상에서 현대교인들은 '목자없는 양' 또는 '거짓교사의 가르침'의 혼돈에 빠져서 불행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지 못하고 시대의 예언적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지 못한 교회 안에서 온전한 공적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또는 세상 속에서 올바른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올바른 예배를 드렸을 때에 그 확신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닐까! 성령과 진리는 늘 함께 가기 때문이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진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스승이 되셔서 길을 인도하신다.

목사 개인의 사견이 아닌 시대적 요청에 따른 하나님의 뜻을 말씀의 바른 해석을 통해서 전하는 목사가 아쉽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셨으니 만큼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3. 일상의 예배자로 살라

우리가 교리를 아는 것 중요하다. 또 그 교리를 묵상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교리는 "진리에 대하여", 즉 하나님에 대하여, 삼위일체에 대하여, 창조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예수와 십자가 그리고 부활과 다시 오심에 대하여, 교회와 정례에 대하여, 이단의 분별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등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교리를 배워 이 새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성경은 이야기 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의 경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 한다.

아브라함이나 믿음의 선배들처럼 의롭게 살아가는 방식이 무엇일까!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좇이서 살면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계시면서 또한 배운 말씀을 통해서 "의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장8절)고 하셨다.

성령께서 지금도 늘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읽고 즏고 배운 말씀이 생각나도록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가치에 따라서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생활의 예배라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 모였을 때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는 것이다.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 속에서 까지, 아니 꿈과 비전까지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제물로 살아가라느 것이다.

하나님은 흠과 티가 있는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그러니 만큼 성별된 삶을 통한 희생제물, 즉 이런 제사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너는 세상에서 거룩한 삶, 즉 구별된 삶을 통해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시다. 우리도 영적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상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이렇게 하려면 조건이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롬12:2)는 것이다.

이 세대는 어떠한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세대이다. 특히 무신론자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윤리적으로 문란하고, 거짓과 사기와 공갈이 판치는 세대이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 같이 거짓된 삶을 살고 술취하고 방탕하고 음란을 일삼는다면 '거룩한 가치'는 무너지게 되고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버린 삶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법조인들이 세속에 물들어서 행했던 일들이 오늘 한국교회 전체를 욕먹게 만들었고 또 교회마저도 그런 자들을 두둔하는 꼴이 되었을 때 전도의 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로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12:2)

기독교인들이 분별력을 갖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진리의 표준이 성경이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어디에 팽겨쳐버리고 비진리와 적당히 타협하고 분별력을 상실한체 살아가고 있는가!

세상에 가서 무슨 사업가가 되든지 공무원이 되든지 아니면 농업인이 되든지 간에 너무나 자명한 것은 "무엇인 선한 것이냐? 무엇이 옳은 것이냐? 무엇이 죄냐?"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분별력을 상실한 자들은 죄에게 진 자요, 악에 물든 자로 전락해 ㅂ리고 만다.

이런 식의 기도교인이라면 이미 영적예배에서 실패한 자이다.

 

 

 

그러나 박해를 받아도 올바른 분별력에 따른 가치를 가지고 산다면 일시적으로는 어려움도 있고 애매한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반드시 진리로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멋진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 때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독교인으로서 살게 되는 것이며 미래의 대한민국, 미래의 세상을 더 밝게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시며 이런 기독교인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마당 뜰만 밟고 희생제물만 가지고 나오던 죄악된 이스라엘을 향해 "지겹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제 회개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기주의적인 삶의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의 피는 지금도 효과가 있다. 그 피에 온 몸을 담궈라. 그리고 죄씻음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굳게 서라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형기를 내품어라.

이것이 나와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영적예배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산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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