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예수를 따를 수 없는 사람

좁은길을 걸으며 2010. 3. 7. 10:53

 

수많은 부다들/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찾아다니지만 

 

 

예수를 따를 수 없었던 사람

 

성경/마가복음10장 17-31절/이송로목사

 

 

리가 전도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떤 이는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부모의 제사를 모셔야 하니까, 어떤 이는 남편이나 부모가 반대하니까, 어떤 이는 돈 좀 벌어놓고 예수 앞에 나오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술 끊고, 담배 끊고 나오겠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것이 그렇게 될까요?

제가 농촌에서 개척교회를 했을 때 허리가 휘어진 팔순의 노모 집사님이 교회를 나오시는데 아들을 전도하기 하기 위해서 많은 설득을 하고 애정과 친절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모의 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딱 3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나가겠습니다.”

나는 꼭꼭 약속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 후 3년이 지났는데 “이제 약속을 지키셔야죠.” 했더니 “조금만 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20년이 되어갑니다만 지금도 그 아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57-62절에서 우리에게 실례를 보여주셨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자청해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의 원하는 바를 칭찬하시기보다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예수)는 머리 둘 곳도 없도다”고 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낭만적인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시사해 줍니다. 사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에는 고생도 있고 핍박과 희생이 따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라고 사정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잔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에나 결심이 섰을 때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아직 죽을 날이 한참 남았는데 그 때까지 가면 이미 딴 맘으로 돌아서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주여, 내가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간청을 합니다. 만일 그것을 허락하면 어떻게 될까요? 가족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 빤한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 먹은 맘하고 집에 갔을 때의 맘하고 같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인간의 속성을 아신 주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뭔가 붙들고 안 놔주는 것이 있나 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속성을 아시고 속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따르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영혼이 잘 되는 것은 물론 범사가 잘 되고 자자손손 복을 받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축면에서 볼 때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날까봐 마귀는 절대로 놔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를 갖다 붙이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알고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여기 나와 있는 여러분들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물론 이것이 여러분의 공로는 아니지만 결심하고 여기에 나와 앉아 계시다는 한 가지만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의 선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늘 본문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길에 나가셨습니다. 한 청년이 달려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꿇어 앉아 이렇게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이 취한 매너를 보면 칭찬을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청년의 외모를 보지 않으셨습니다.그 마음 속 깊은 곳에 들어 있는 것들, 즉 예수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와 그 인생을 한 눈에 파악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청년의 태도를 본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매우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면에 들어 있는 더러운 욕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인간도 예수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도덕적인 선이나 착함을 내세운다면 그건 실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100% 계명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100% 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예수님만 100% 선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한 선입니다. 이런 인간의 속성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청년에게 십계명 중 인륜의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랬더니 그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의기양양하고 떳떳했으면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서 한 말이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청년의 입장이라면 그같이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범인은  그 어느 계명도 “다 지켰다”고 대답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우리가 그 청년에 비한다면 우리는 쥐구멍을 찾아야 할 정도입니다. 그 청년은 나름대로 철저히 율법을 지켜왔던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죄인이라고 해서 전혀 위축될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하나를 더 추가하셨습니다. 이 청년의 관심은 ‘영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여야”라는 질문은 ‘율법의 요구’인 ‘행위의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주의교육을 철저히 받았고,또 그와 같이 살아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행위 구원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구원과 영생의 문제를 그 각도에서만 생각해 온 것이 분명합니다.

이 청년은 율법의 진정성을 깨닫지는 못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내가 이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이미 타락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도덕적인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예수를 잘못 바라본 것입니다. ‘선한 선생님’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가 우리 죄인들을 위한 ‘구주(Savior)’라는 것을 안 됩니다.

도덕적으로 구원 얻을 것처럼 다가 선 청년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를 추가하셨습니다.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그 청년이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하시는 말씀이며,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는 가치는 이 세상 그 어떤 보화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만일 이 청년이 이것까지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아시스의 성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이런 말씀에 도전을 받고 실천해 본 사람 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이럴 수 있다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계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라는 분이 ‘나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늘의 보화’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진리의 깨달음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인식들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바르게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를 위해서는 그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애정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따를 수 없는 핑계거리를 찾아내셨습니다.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알고 보면 그 청년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재물’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세에 대한 관심’이 동시에 있었던 청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온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어떠했습니까?

“그 사람(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렇습니다. 이 청년에겐 예수를 따르는 일보다 ‘재물’이 우상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한 미련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나 이 청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케이스에 걸려 있습니다.

“교회 나가면 돈 갖다 바쳐라”고 할까봐 교회 못 나간다는 사람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요. 교회다 말고 “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알고 보면 다 핑계입니다.

이 청년이 돌아간 뒤에 예수께서는 주변을 둘러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게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그렇습니다. 오늘 날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교회에 나오지만 예수께서 “네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런 말씀 앞에 제자들은 다 놀랐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께서는 덧붙여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그렇습니다. 부자가 못 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자가 구원 얻을 확률이 낮습니다. 부자는 재물이 우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청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깊이깊이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근거렸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계속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도 구원을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재물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며 제자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언제라도 주님을 위해서 이 세상 재물도, 명예도, 아니 목숨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구원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힘차게 외쳐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게로부터!”

이 청년은 예수님께 접근하는 방식이 틀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를 내세워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는 사람들이 율법주의, 도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수 앞에 접근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실격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언제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할 자들은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 드릴 수 있을 때 구원은 그에게 임합니다. 바로 이런 회개할 마음을 성령 하나님은 각자에게 주십니다.

 

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의로 인해서 구원을 얻을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자가의 의를 내세워 다른 사람을 정죄해도 안 됩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 잣대로 남을 판단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자는 그 속에 남을 미워하는 죄, 또는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해도  시간이 없어서 할 얘기 다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 이에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자는 “내가 따르겠습니다.”하고 예수 앞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과 결심을 주신 하나님께 거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말하고 실제로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자가 된다면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인가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율법주의가 아닌 복음주의자로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헌신을 드릴 수 있을 때 하늘의 보화와 상이 있을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나아가는 자들은 이와같이 아름다운 헌신 속에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성령으로 행하는 자에는 이와같은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주님께 헌신된 자들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 자들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성도들 가정에 늘 함께하길 주 예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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