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있는 제자
성경/마태복음 5장1-16/ 이송로목사/2010년2월28일 주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제자가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예수님의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고 따르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참 제자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팔복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지만 알고 보면 참 제자의 삶의 태도와 그 모습을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또는 산상설교에 대해서 많이 들어왔고 암송까지 해 본 경험도 있습니다. 한 글자도 안 틀리게 암송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가르침의 진리를 따르느냐 못 따르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느 날 예수께서 큰 군중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시니 제자들이 그 앞에 나아왔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산상설교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설교는 위력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 내용은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들이 복음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첫 부분에서 "복이 있나니"라는 8번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팔복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복의 내용들은 보면 세상적인 부나 명예를 얻는 것, 또는 건강이나 권력과 인기를 누리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해 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예수님의 성품 또는 인격을 닮는 것, 이것이 제자도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이라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관심이 무엇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설교를 살펴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헬라어와 영어 성경은 "복이 있으라", "복되도다"라는 말이 앞에 나옵니다. "복이 있으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우리는 무엇이 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복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죄와 교만으로 가득찬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권에 눈이 밝은 사람들 말입니다. 이 자체로만으로도 이미 복과는 먼 마음들입니다. 당시의 유대 정치 지도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을 누리며 이미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던진 메시지는 굉장히 신선한 메시지로 들려졌습니다.
이 때 산 위에 모인 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 부자들과는 상관없고 정치군력자들과는 상관없는 노동자나 소외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 메시지가 쏙쏙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 가난'을 뜻하며 '육신적인 배부름', '세상적인 부요'와는 반대되는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날 많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적 부요와 신앙적 부요를 함께 누려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가능할까요?
육신도 즐겁게 하면서 신앙적으로도 만족을 누려보려고 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심리를 잘 아는 설교자들은 이 둘을 다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설교의 의도와는 빗나간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적 가난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영적 가난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없이는 못 산다는 것과 오직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모습으로 채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적인 욕심으로 차 있는 마음은 심령의 가난과는 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며, 예수님이 앞에 계신다 해도 예수님을 알 수 없을 것이며, 복음을 얘기해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 정치지도자들, 권력층에 속한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지 못했으며 말씀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저렇게 잔머리를 굴리며 이권을 챙기는 데에 능란했으며, 겉으로는 굉장히 의롭게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 속은 부정 부패로 찼으며, 은근히 추앙받고 대접받는 것을 즐겼으며, 교만함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진리가 들어 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이미 세상적인 것들로 그 마음이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 쪽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들이 없었지만 예수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배고픈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리며 먹이를 기다리는 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의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적 갈망이 있습니까? 세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물질, 명예, 쾌략으로 만족해 버리고 만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 없어도, 배운 것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이미 복받은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두번째의 말씀도 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애통'이라는 말을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애통'이란 '죄를 슬퍼하고, 주님 뜻대로 못 살아서 마음에 느끼는 고통'과 관계되어지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 역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고는 안 되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눈물도 흘릴 줄 모릅니다. 분노의 눈물도 있습니다만 그런 눈물 말고 다윗처럼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 말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걱정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의 죄가 생각이 나서 베드로처럼 우는 눈물이 있다면 이 자체로서 이미 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뉘우치는 커녕,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잘못을 지적해 줘도 끝까지 변명으로만 일관하려고 하는 것 역시 병든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저 주님 앞에 나오서 세리처럼 고개도 들 수 없어서 죄를 원통히 여기며 가슴을 치는 기도가 참된 회개이며 그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는 온유하며, 애통하는 자 역시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닙니다. 손해를 볼지라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며, 양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와 같이 대항하면 그 순간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에 유익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끼리도 싸우지 마십시오. 자기 신앙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고 남을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똑같이 나가지 마십시오. 양복하고 피하십시오.
모세는 완약한 백성들이 돌로 치려고 할 때에 대항하거나 겁주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버렸습니다.
이삭은 자기가 판 우물을 뭉게버리거나 탈취하려는 자들에게 그냥 양보하고 다른 곳에 우물을 팠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내려놓기를 잘 해야 합니다. 욕심부린다고 돌아오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욕심쟁이가 많은 얻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은 손해본 사람 편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온유와 겸손은 생활생활의 꽃이며 가장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언제라도 주님을 위해서 낮은 곳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손해 보십시오. 양보하고 떠나십시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란 무엇입니까? 정의를 가리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꿔가며 처신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이 거짓말과 임기웅변으로 속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있고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정의는 이것입니다. "옳은 것이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를 일관성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런 신조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의 이중 플레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정의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해야 합니다. 그분의 '하나님의 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내새워가며 자기가 옳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일수록 편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정의의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정의의 사람은 그 정의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위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정의로우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정의롭게 살랴고 하는 마음을 가질 때 복이 있는 것입니다.
"긍훌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까? 긍휼이란 말은 동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믿는 우리는 동정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정이 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우셨습니다. 그리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째 되어가는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피 한 방울 안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잘못에 대해서 매정하고 혹독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피해갑니다.
가난한 사람이 찾아오면 손해를 끼칠까봐 외면해버립니다. 그리고 귀찮게 구는 사람이라고 비아냥댑니다.
그리고서는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일이 있으면 악착같이 챙기려 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받았던 자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가두고 때린 얘기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앞에 우리는 1만 달란트가 훨씬 넘는 죄의 부채를 탕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을 정죄하고 죄를 탄로시켜서 나팔 불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조용히 주님 앞에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 말고는 감싸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자는 그 자체로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떤 사람이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일까요?
앞의 내용들과 관련시켜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내세울 수 없습니다. 찬송가에도 "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는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려고 애쓸 때에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미 오염된 마음일지라도 예수의 피에 자주 씻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도 그와같은 일을 하고 있느냐고 잔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정망 영적으로 맑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아마 구약 성경의 에녹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으로는 얼마든지 그분과 교통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소유한 그 사람은 오늘도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더러운 마음, 정욕의 마음,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완악한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십시오. 오늘 주님이 오신다 해도 예수님께 멋있게 나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을 깬 자는 마귀입니다. 화평을 도모하는 자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뱀은 처음부터 화평을 깬 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과 인간과의 화목은 뗄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아주 잘 나타납니다.
그런데 말로만 화평을 말하고 뒤에서는 화평을 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12장 18절에서 "할 수만 있으면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 수만 있으면 분위기를 깨고 다니고 화목을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가 시켜서 그랬든지 아니면, 본인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그랬든지 이런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불의와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보금만 양보하면 될 수 있는 일도 그렇게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며, 진리의 문제도 아닌데 박이 터져라고 싸움박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화평을 일삼아야 합니다. 화평을 깨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나 그런 일에 앞장을 섭니다.
그리고 자기 주장, 자기 편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더 큰 시야를 가지고 세상 불신자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이곳 저곳 다니면서 화평을 깨는 일을 하는 사람은 마귀의 종입니다.
여러분은 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우리의 영원한 피이스 메이커이십니다.
그 분을 본받아 살기를 힘쓰십시오. 그런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의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해도 맞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경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기뻐할 수 있는 신자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우리는 인생 가운데서 나의 실수와 불의 때문에 욕을 먹고 그리스도까지 욕되게 한 경우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 비리와 부조리에 가담할 수 없다. 그리스도 때문에 술취하고 방탕할 수 없다. 그리스도 때문에 남을 속일 수 없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치와 낭비에 빠질 수 없다.
이런 일들에서 빠져나와서 경건하게 살려다가 박해를 받는 신자라면 얼나마 복이 있을까요?
바로 우리 크리스천의 관심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주일에 예배 잘 드리고 십일조 하고 성가대 서고, 이것 저것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다가 박해를 받는 것이 의를 위한 박해가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선교사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위험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죽는다. 그리스도를 위해고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재산을 빼앗기고 심지어 몰매를 맞거나 집안에서 쫓겨난다면 이것이야말로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가 아닐까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되돌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몸을 도사리면서 편하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가? 한 쪽 발은 세상에 걸쳐놓고 얼마나 적당히 예수를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의를 위하여 바르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박해가 따라옵니다. 만일 당신의 신앙생활에 박해가 전혀 없다면 한 번 자신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8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자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요, 참된 시자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빛이며 소금인 것이다. 이들로 인해서 불신자들이 예수 앞으로 나오는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산상설교의 설교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생활화 하십시오. 그러면 언제든지 복된 크리스천으로서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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