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여행 가이드
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이다. 하노이이라는 말의 어원은 하내( Hà Nội /
河內)라는 말에서 왔다. 이 말을 베트남어로 하노이라고 부를 뿐이다.
물 안에 갇혀 있는 동네, 또는 시가지를 뜻한다.
홍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삼각주에 속해 있는 지역이다. 그러니까 시가지가 생기기 전에는 모래와 늪, 그리고 정글지대처럼 우거진 숲과 논밭이 있었던 곳이라도 생각하면 된다.
2010년 가을에는 1000년 도시 큰축제를 열었다. 나는 여기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하노이는 습도 높다. 지평선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특히 겨울에는 옷이 잘 마르지 않을 정도로 습도가 올라가고 영상 15도 미만으로 떨어지면 겨울 옷을 꺼내어 입고 다녀야 한다.
1975년 남북이 통일되면서 수도의 옛 명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남쪽 호치민에 비해 턱없이 빈곤했고 인구도 호치민의 1/3(340만명, 2007년까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8년 3월 말에 들어서는 하떠이성과 빈푹성 일부를 수도권으로 영입하여 3배로 수도를 키웠다.
2015년에는 750만명이 넘어섰고 현재 800만명이 넘어섰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곧 호치민 인구를 능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국가시책에 따른 외국인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대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자고 나서 눈만 떠면 달라지는 동네가 하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노이는 현재 구도시와 신도시로 크게 분류되며 다시 1개의 시사(市社, thị xã)와 10개의 군(郡, Quận) 그리고 18개의 현(縣, Huyện)으로 분류된다.
현재 하노이 사람들의 80% 이상이 북쪽 지방성에서 되시로 몰려든 사람들이다. 그래서 도시발전의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집집마다 오토바이가 2-3대가 있으며 3년 전부터는 자가용을 갖지려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고 아파트 입주자들 또한 급증하고 있는 추세이다.
하노이에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은 경남빌딩(71층)과 롯데빌딩(65층)이다.
길을 다니면서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가게는 식당과 커피점, 옷가게 그리고 미용실과 스파(Spa)이다.
그리고 10년 전과 다른 것 중에 하나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구의 급증, 고학력자 배출과 유학파들이 생겨나고, 고가 유치원 그리고 영어학원이 생겨나고 유명세 있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보내기 위해 열광하고 있다.
한국어 역시 배우려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하노이에서만 해도 1년에 30만 명 이상이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덤벼드는 형국이다.
그 이유는, 외국기업들이 빠르게 진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한국기업은 베트남에 있어서 제1위의 투자국가로 부상된지 4-5년째가 되었다.
현재 본인이 보는 하노이의 풍경은 이렇다. 스미트폰 사용과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빠른 변화를 가져오고 있고. 심지어 K-팝, 미용과 멋도 한국 수준에 육박했다고 할 정도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가게를 새롭게 단장하거나 신상품 매장을 차리는 것을 보면 화려할 정도로 메이컵이 되고 있다.
10년 전에 내가 처음 왔을 때와는 전형 다른 양상이다. 그때만 해도 어느 가게를 가나 한국의1960년 말에서 1970년대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1980년 말에서 199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며 어떤 것들에 한해서는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같이 공유하고 있다.
교통만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1980년대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망 역시 날로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아마 내년에는 하노이에 지상철도가 개통이 될 것이고 호치민에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될 것이다.
그런데 금융을 보면 재미있는 것이 아직도 예금저축 이자 년 8.0%-7.5%이다. 토지상승률은 년간 3배, 5배를 뛰는 곳도 종종 눈에 띨 정도이다.
예를들어, 5년 전 평당 300만원 하던 곳도 지금은 1500만원 이상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보면 "왜 내가 작년에 이 땅을 안 샀던가!"하고 후회한다. 그러니까 자기자본 조금만 있으면 부동산투자 해서 돈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특권층이 누리는 혜택은 크다. 이들은 아파트 10채 이상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취득세가 집 1채 가진 사람이나 10채 가진사람의 차이가 없다. 금융실명화를 통해 지하경제를 끌어올린다면 이 특권층의 사람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1990년대 초처럼 구조조정을 안 한다면 큰 위기가 몰아닥칠 수도 있다.
국민소득을 보면 2013년 년 3000불 정도였으나 지금은 6000불시대에서 1만불 시대를 살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농촌은 그렇지 않지만 하노이시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충분히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고가 백회점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대형마트는 주말이나 명절에는 발딛을 틈 없을 정도로 분빈다.
씀씀이를 보면 나간은 사람은 엄두가 안 정도로 많은 물건이나 먹거리를 사 가는 것을 본다.
식당에 가서도 베트남사람들 먹는 것을 보면 우리 한국인들도 쉽게 쓸 수 없는 고가의 음식들을 시켜서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시골에서 온 학생들의 경우 한끼를 500원 수준에서 해결하는 학생들도 많다.
대학교를 나와서 취직을 해도 30만원 받기가 쉽지 않았지만 요즘은 35만원 수준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외국어 능력이 있으면 50만원에서 100만원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만 내가 보고 느끼는 것 하나는 한국인과는 창의성과 과학적 사고, 원시안적 생각이 훨씬 못 미친다. 그래서 어쩌면 한국인들이 주도적으로 기업과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만일 한국기업이 당장 베트남에서 떠난다면 베트남은 어떻게 될까?"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정신적인 양식과 과학적 사고가 달라지는 것 역시 시간적인 문제라고 본다.
다만 한국과의 협력동반자라는 생각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며 우리가 베트남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에는 결코 저들도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고 보면 우리 선배 기업가나 한국인 거저자들이 베트남사람들과의 인격적교류를 잘 해온 결과로 오늘의 한-배관계는 매우 튼튼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베트남사람들에게 과분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 대해 늘 감사하고 있다.
하노이 구시가지는 어쩌면 호안끼엠호수를 끼고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관광명소는 거의 구시가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시가지를 돌면서 보면 프랑스형 건물들이 눈이 띨 것이다. 사실 1887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식민통치를 받을 때 이곳에 통킹(홍강유약동쪽근교)지방의 행정청을드었기 때문이고 또 호떠이 근처는 프랑스사람들이 자기들이 저택을 많이 지어 안락을 누렸던 곳이기도 하다.
19세기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의 풍부한 자원, 인구, 중국근접 도시이기에 매우 탐을 냈다. 아직도 오페라 하우스를 비롯한 짱티엔 플라지 등 프랑스 형태의 건물과 식당들이 남아 있다. 반미Banh Mi라는 바케이트 빵이 유명한 것은 프랑스지배 때부터 생겨났다.
1. 호안끼엠 호수(Hồ Hoàn Kiếm, 還劍湖)
하노이에 살면서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이다. 이곳은 외국인의 관문이라고 불리울 만큼 하노이 여행자들이 주로 이 호수주변을 통해서 베트남 북부지방 여행을 시작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호수 주변에는 옛날에는 각종 큰 재래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며 지금은 호텔이 즐비하고 수많은 여행사들과 식당들, 상가들이 펼쳐져 있다.
나는 지방에서 온 학생들을 데리고 여기서 한국어 연습도 시키며 아름다운 교제의 광간으로 삼았왔다. 학생들을 데리고 호안께엠 호수 한바퀴를 돌고 나서 짱티엔 아스크림공장에 들러서 아이스크림 한개씩을 먹고 헤어진다.
여기서 찍은 사진도 아주 많다. 아마 일생의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100번 이상 간 것으로 기억된다.
호안께엠은 여기 사람들이 흔히 호검(Hồ Gươm,Sword Lak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칼을 돌려주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실화가 아니다. 대월국의 후 레 왕조의 태조 레러이가 용왕의 보검을 얻었단다.
이 검으로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왕조를 세웠단다.
그 뒤에 또 레러이는 호수 위에서 금빛 거북이를 만났다. "나는 용왕의 사자니라. 네가 이제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니 그 검을 다시 용왕께 돌려드리도록 해라."
그래서 태조는 그 검을 호수 한복판에 있는 섬에 묻었다. 그리고 이 호수의 이름을 호안끼엠(Hoàn Kiếm, 還劍)이라고 했다.
섬 한 복판에 있는 있는 탑을 거북이 탑(터틀 타워)이라고 부른다.
이 호수에는 그동안 큰 거북이가 실제로 살고 있었다. 2009년 10월 10일 프랑스로부터 돌립된지 55년, 리 왕조가 하노이를 수도로 정한지 999년만에 나타났다. 그 후 2014년 4월 3일 길이 1m, 지름 80cm의 무게 169kg의 대형거북이가 나타났는데 피부병을 앓고 있어서 석달 치료후 다시 방사했다. 그러나 2016년 1월 19일 호수의 거북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아직도 이 호수 안에서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 호수의 수심은 평균 1.2m로 그리 깊지 않다. 길이가 700m이고 너비가 250m이다. 도보로 천천히 돌면 30분이 걸린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호수에서의 가장 매력적인 것은 주변의 나무들이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시계절을 옷을 갈아입는 모습 또는 늘 가 봐도 신기하게 느껴진다. 어떤 때는 고운 단풍이 드는 나무도 있고 어떤 때는 꽃이 피는 나무들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새잎과 새순이 나올 때도 있다. 내가 가장 매력을 느꼈던 것은 새 순이 돋아나올 때의 모습이었다.
이런 건 나처럼 자주 가본 사람만이 느끼는 매력의 하나일 것이다.
호수의 물은 언제 봐도 깨끗하지 않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적조현상같은 것이 일어나서 붕어가 죽어서 뜬다.
누군가가 물어보았다. "이 호수의 물은 안 넘칩니까?" "안 넘칩니다."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데가 없는데 왜요?"
이것 또한 신비이다. 바닷물이 넘치지 않는 원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호수에서 가장 눈에 띠는 사당이 하나 있다. 빨간다리를 건너서 들어갈 수 있는 응옥선 사당(Đền Ngọc Sơn/玉山祠)이다.
입구에 한자로 쓰인 글씨들이 있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면 흥미를 가지고 해석할 수 있는 문구들이 세겨져 있다.
이 안에 문창제군(文昌帝君)을 모시는 곳인데 문창성(文昌星/북두칠성 국자머리 여섯 별자리)를 신격화해서 모시는 신당이다.
이 사당은 무당의 집이나 비슷하다. 유교나 도교 학자들이 국가 영웅인 쩐흥다오에게 헌정했는데 1865년에 확장했다.
13세기 원나라를 물리친 장군 쩐흥다오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안에는 2m의 거북이 박제가 있다. 그리고 황금거북이가 전시되어 있다.
내가 보는 호안끼엠은 이렇다. 과거의 역사보다는 호노이의 수천 개의 호수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위치적으로나 호수의 모양새나 옛도시의 풍경이 조화를 이루어 탄생한 섬이라는 점에서 유명하다.
나는 이곳에서도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호안끼엠 호숫가에서 주님은 안 응옥을 부르셨네." 등의 찬송을 부른다.
네가 여기서 하모니카를 수업이 많이 연주했던 장소로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2. 문묘 국자감(文廟-國子監 Văn Miếu-Quốc Tử Giám)
나는 종종 문묘를 간다. 베트남어로는 반미우(Văn Miếu)이다. 문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孔子)의 신위를 받드는 묘우(廟宇)를 말한다.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아시아 전반에 공자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는 다 있는 셈이다. 한국에도 서울의 성균관 반묘가 있고 강릉의 문묘가 있다.
이곳을 방문할 때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정보없이 방문한다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미를 알고 방문한다면 상당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관람이 될 것이다.
여기서 '묘(廟)'라는 말 뜻은 무덤(墓)을 뜻하는 묘가 아니라, 공자의 위패를 모시며 제사하는 사당이란 뜻에서의 묘(廟)이다.
한 마디로 이곳은 공자의 학문을 이어받은 전당으로, 공자의 베트남의 제자들을 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반묘의 안 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이 있다. 그곳은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4성(四聖)을 배향하고, 공문 10철(哲) 및 송조 6현(賢)과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동방 18현을 종향(從享) 하였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례 의식인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고 있다. 태학생(太學生)들의 사표로 삼았다.
불교가 국교의 위치를 지켜오던 시기인 베트남 리(Lý) 왕조 시대, 리탄똥(Lý Thánh Tông) 왕은 1070년 공자를 모시고동시에 황태자의 학습을 위한 장소로 문묘 를 세웠다. 중국 산동산 취푸의 문묘를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는 베트남인들의 건축지혜가 담겨져 있다. 여러 세대를 걸쳐서 섬세하게 가로 세로의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룬 집과 교육의 장소, 그 건물들의 지붕을 보노라면 베트남 탄롱의 건축양식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
1076년 리(Lý) 왕조는 문묘 옆에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국자감(Quốc Tử Giám) 학교를 설립하였다.
애초부터 문묘는 유교 창시자를 모시기 위한 곳뿐만 아니라 국가, 왕조를 위한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의 장소이자, 과거급제의 시험장소이기도 하다.
반묘 입구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거북이 등에 세워진 비석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1442-1779년까지 약 337년 동안에 걸쳐 과거고시에 합격한 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신기하게도 중국 성씨, 한국 성씨를 닮은 이름들이 많이 나온다. 그 후에도 베트남 유교의 발전과 함께 문묘는 점차 중시되어 갔고 규모를 넓혀갔다.
후 시대인 쩐(Trần) 왕조는 국자감의 명칭을 국가학술연구기관(Quốc Học Viện)이라고 변경했고 왕족 자제뿐만 아니라 백성 중 출중한 인물들까지 양성해 냈다.
김치(Kim Chi)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제가 오늘 졸업사진 찍으니까 빨리오세요."
탕롱(Thăng Long) 문묘 입구 쪽에는 반쯔엉(Văn Chương) 호수가 있다.
한 가운데에는 낌쩌우(Kim Châu) 육지를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치 감상을 위해 낌쩌우(Kim Châu) 위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단다.
건축을 살펴보면, 겉에는 벽돌담이 둘러 쌓여있고, 내부는 기능에 따라 5곳으로 나뉘어진 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장소는 레막(Lê Mạc)왕조시대 (1442-1779) 인물들의 82개 묘비가 놓여진 묘지와 공자를 모시는 곳이다.
이곳은 '천년대학', 또는 '베트남의 최초의 대학'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따라서 북쪽 대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그들과 어울려서 사진을 찍었다.
여러 분도 시기를 잘 맞춰서 방문한다면 대학생들이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쓰고 사지을 찍는 모습을 목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람들은 한자를 모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애착을 두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만큼 역사 속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약 1000년을 중국에 의해 지배를 받아온 역사 속에서 안 좋은 기억들이 많았다. 최근에도 베트남 영해에 있는 섬을 탐욕하고 국경을 침공한 일이 있었기 대무에 더욱 그렇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을 알아야 중국을 이길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을 알려면 중국어를 공부해야 한다."
한국과 베트남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정신은 유교를 간과할 수 없다. 특히 효와 예절문제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인과 베트남인들은 성향이 비슷하고 손님을 대접하기를 좋아하고 기본 예의를 갖추는 것을 좋아한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정신문화와 그 성향이 비슷해서 베트남사람들과 5분만 얘기를 나눈다면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바로 두 나라 사이의 친밀함이다.따라서 외교나 기업이나 사업진출에 있어서도 서로 거부감없이 접근하고 다로 윈윈할 수 있는 것들도 다 알고 보면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1484년 레탄똥(Lê Thánh Tông) 왕이 탕롱(Thăng Long) 문묘에 묘비를 세우라는 지시에 따라 턴년쭝(Thân Nhân Trung)이라는 대신은 다음과 같은 명문장을 남겼다. “덕과 재주는 국가의 원기이다. 왕성한 원기는 번영하는 국가의 세력이고, 쇠약한 원기는 비천하고 약한 국가의 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이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고 국가의 원기를 육성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3. 바딘광장Quảng trường Ba Đình
바딘 역시 구시가지이다. 이곳은 베트남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오떠이 호수와 근접해 있다.이곳은 과거 프랑스가 지배할 당시 식민지 정부 청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프랑스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따라서 그 지금도 일부 그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현재 베트남 공산당 본부 청사, 국회의사당, 주석궁, 외무부 청사 등 정부와 당 주요기관들이 여기에 있다. 롯데센터 하노이도 이곳에서 가깝다.
관광명소로 꼽힌 호치민 묘소와 탄롱황성, 국립미술관 등이 있다.
반딘광장이 세워진 것은 남태평양전쟁의 원흉이었던 일본이 1945년 9월 2일 손들고 나갔을 때 호치민은 이 광장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던 장소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바딘광장의 길이는 320m이고 폭은 100m이며 240개로 나뉜 잔듸밭을 조성하였다.
1969년 호치민이 사망하자 이 광장과 마주하여 호치민 영묘를 만들었다. 1975년 9월 2일 완공, 3층건물, 높이 21.6m이다.
영묘 앞에 있는 금성홍기 아래에는 "호치민주석은 인민의 마음에 영원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딘광장 오른 쪽에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왼쪽에는 "호치민 주석 당신의 뜻을 영원히 따르겠습니다."라는 글씨가 씌여져 있다.
호치민 영묘 안에 들어가려면 평일 오전 9시 30분까지는 가야 한다. 오전 7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만 개방하고 문을 닫는다. 줄이 너무 길어서 오래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개방을 안 하는 날도 많으니까 정보를 잘 알고 가는 것이 좋다.
관람객들은 매우 엄숙하게 한 줄로 서서 미이라로 된 호치민 주석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전세계 정치 지도자 중 11명만 미이라로 보존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이다. 들어가기 전에 상식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짧은 치마나 반바지 차림은 안 된다.
한 바퀴 돌아서 뒷쪽으로 나가면 회치민 집무실과 정원이 나온다. 그리고 계속 가면 호치민 박물관이 나온다.
사실 호치민 주석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서 시신을 그냥 태워서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달라고 했단다. 그러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
가끔씩 시간대에 잘 맞으면 경호병사들의 근무교대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참 매력이 있다. 흰복장에 걸어가는 모습과 근무교대하며 서로 인사하고 인수인계하고 돌아가는 장면이 볼거길가 된다.
어떤 경우에 포착을 잘 하면 사진도 같이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바딘광장을 따라서 왼편으로 가면 호치민 관저와 그 앞의 예쁘고 작은 호수를 구경할 수가 있다. 베트남인에게는 무료이지만 외국인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값이 저렴하니까 부담은 안 가져도 된다.
이곳을 지나서 호치민 관저 쪽을 향할 때 바로 눈앞에 보이는 황색건물이 바로 주석궁이다. 이곳은 식민지 지배시절 총독부로 쓰인 건물이다.
실제로 호치민이 주석이 되고서 이 주석궁에 살지 않고 초라하다 할 만큼의 작은 관정에서 집무를 보며 생활했다.
호치민은 이곳에서 10년간 집무를 했다.
그의 소박한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작고 소박한 집무실을 들어다 볼 수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민족의 자주독립만을 위해서 보냈다. 검소한 삶이 귀감이 되었기에 오늘 날 세계의 영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베트남인들 가슴 속에는 영원히 박호, 즉 큰아버지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그가 통일이 되기 전 6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독립의 초석을 마련하고 떠났던 까닭에 영웅이 된 것이다.
거기서 나와서 영묘 뒤쪽에 있는 호치민 박물관을 구경할 필요가 있다. 호치민 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지은 기념박물관이다.
이곳에는 호치민의 일대기가 담겨있기도 하다. 그 일대기는 응예안Nghe An성의 빈Vin시티에서 조금 가면 고향집에 가서 보면 더 실감이 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호치민주석이 혁명운동을 할 때 사용했던 기구들,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처음갔을 때보다 자료들이 더 보충이 되어 꼭 가서 보고나올 것을 권장하고 싶다.
20분 정도이면 다 보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 입구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아주 작은 절이 하나 있다. 못꼿사원Chùa Một Cột, 또는 일주사一柱塔, 즉 한기둥사원이라고 불린다. 큰 기둥(직경1.25m) 위에다가 절을 세웠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베트남사람들은 연꽃을 좋아한다. 이 절이 연꽃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한다.1049년 리왕조 창시자 리 태종이이 만들었단다.
1954녀에 크게 훼손이 되었다가 복원되었다.
4. 하아로 형무소9(Nhà tù Hỏa Lò ;호아로 수용소)
이곳 호아로수용소는 베트남인들에게 뼈아픈 역사가 스며져 있는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서대문형무소와 같은 곳이라 하겠다. 프랑스가 지배할 때는 프랑스에 저항하는 정치범을 수용했지만 그 이후 베트남 전쟁시에는 미군을 감금하는 수용소로 쓰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프랑스와 베트남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정리해 보겠다.
프랑스인의 최초의 베트남 접촉은 16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회 신부알렉산드르 로드(Alexandre de Rhodes) 베트남에 머물며 베트남어 교리문답을 만들고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는 1650년 약 10만 명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그가 베트남에 주교 파견을 원했다. "이들이 성사없이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노력 끝에 카톨릭 선교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로 1777년 베트남이 남북대립으로 환란기에 있을 때에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한 프랑스는 선교사들을 발판삼아 베트남으로 진출해 왔다.
처음 베트남 응우옌 푹 아인이 위기에 몰리자 프랑스선교사 피노드 비엔을 통해서 도움을 청한 것이 훗날 화근이 되었다.
프랑스는 남북이 통일되는 일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베트남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은근슬쩍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결국 베트남을 장악하고 식민지배를 시작했다.그때가 1850년의 일이었다. 처음엔 다낭일부, 비엔화성, 호치민을 침략하고 그 후에 통킹만으로 침략하여 하노이. 하이증, 남딘 등으로 세력을 키워갔다.
1862년엔 사이공조약을 맺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지배 아래 묶어두었다. 그리고 소금, 알콜, 아편 등을 착취해 갔다. 그러자 의식있는 사람들이 이에 항거하자 비밀경찰 두어 투옥시키고 사형을 시켰다.
이로 인해 베트남은 많은 것들을 수탈 당하고 도시에 전통문화를 파괴와 함께 프랑스문화를 강요당했다.
이때 생겨난 것이 바로 하노이 포로수용소이다. 호아로수용소라고 부른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
호아로(Hỏa Lò, 火爐)라는 이름은 흔히 ‘불타는 용광로’(火爐), 또한 ‘화로’(火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름은 호아로 거리(phố Hỏa Lò)라는 거리명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이 거리에서 ‘목재난로’와 ‘석탄난로’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몰려 있어서 호아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수용소는 1886년~1889년부터 1898년~1901년까지 프랑스인들에 의해 하노이에 건설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다. 프랑스인들은 이 형무소를 ‘마이손 센트랄르’(Maison Centrale), 말 그대로 ‘가운뎃 집’이라고 불렀는데, 프랑스는 이곳에 강력범과 장기수들을 구금였다. 이 형무소은 하노이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특히 이곳엔 고문과 처형의 대상이 되는 베트남 수감자, 독립정신에 찬동하는 정치범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1913년 개조를 거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460명에서 6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6년에는 730명의 수감자를 수용하면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 숫자는 1922년에 895명, 1933년에는 1430명까지 치솟았다. 1954년경에는 2,000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했다. 수감자들은 인간 이하의 상태에 쳐해 있었고, 식민지 착취와 프랑스인들을 향한 베트남인들의 괴로움의 상징이 되었다.
도시 중심에 형무소를 배치한 것은 초창기적 특성의 일부였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거리의 행상들은 감옥 창문을 통해 외부 서신을 전달하고, 벽 너머로 담배와 아편을 던졌다. 감방에서는 서신과 봉투를 반대 방향인 거리 쪽으로 던졌다. 수용소 내에서는 의사소통과 생각들이 교환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공산주의 북베트남 내의 많은 지도자급 인사들이 이곳 마이손 센트랄르에서 시간을 보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배와 1954년 제네바 회담에 따라, 프랑스군은 하노이를 철수했고, 수용소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 당국의 관리 하에 놓였다.이후 이곳은 혁명 사상과 활동을 위한 교육 센터의 역할을 하였으며, 그렇게 프랑스군 철수 이후에도 북베트남에게는 역사적 중대성을 가지는 곳으로 유지되었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 중, 호아로에 수용된 최초의 미국인은 1964년 8월 5일 총상을 입고 붙잡힌 에러벳 알바레즈 (Everett Alvarez Jr.) 중위였다. 처음부터 미군 포로는 열악한 식사와 비위생적인 환경 같은 비참한 상황을 감내했다. 수용소 단지는 미국 포로들에 의해 유명한 호텔 체인 힐튼 호텔을 조소적으로 참조한 ‘하노이 힐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작명을 한 최초의 미군 포로 집단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일치가 있지만, 공군 F8D 조종사였던 밥 슈메이커가 공군 중위 로버트 필(Robert Peel)의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물통 손잡이에 “하노이 힐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새겨둔 최초의 인물이었다.
미군 유명인 수감자
존 매케인 : 미국 해군 조종사, 포로생활 5년 반, 미국 애리조나 상원 의원 (R- AZ) 및 2008 공화당 대선 후보로 가장 유명한 베트남전 참전 포로
제임스 스톡데일: 미 해군 파일럿, 명예 훈장 수상자, 1992 부통령 후보. 그와 로렌스는 미국 최고위급 해군 포로였다.
윌리엄 P. 로렌스, 해군 조종사, 해군 참모총장과 미국 해군 사관학교 교장
로빈슨 리즈너, USAF 전투기 조종사, 1965년에서 1973년까지의 포로. 중령은 포로로 선임 포로였고,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서 지휘 계통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워드 러틀리지, 미 해군 조종사, 7년 반을 포로 생활, 〈In the Presence of Mine Enemies: 1965–1973 – A Prisoner of War〉 아내와 공동
존 L. 보어링 : 미 공군 파일럿, 포로생활 6년 반, 소장으로 은퇴
찰스 G. 보이드 : USAF 조종사, 포로 생활 7년, 4성 장군으로 진급하고 은퇴한 유일한 베트남 시대 포로.
조지 토머스 코커, 미국 해군 조종사
버드 데이, 미 공군 조종사, 명예 훈장와 공군 십자장 수상자, 정치활동가, 매케인과 감방 동료였다.
제레미아 덴튼, 미국 해군 조종사, 상원 의원 ( R - AL )
레온 F. "리" 엘리스, USAF 전투 조종사, 동기부여 강연자 및 저자
노먼 C. 개디스, USAF 조종사, 포로생활 7년, 준장으로 은퇴
로렌스 N. 가리노, 공군 장교, 《3개의 전쟁 참전용사》의 저자
더그 헵달 : 수감자의 모든 이름, 개인정보와 날짜를 암기하는 놀이를 한 어리석은 수감자
샘 존슨, USAF 전투기 조종사, 미국 텍사스 하원 의원
랜스 시잔, USAF 전투기 조종사, 명예 훈장 수상자.
제리 A. 싱글턴, USAF 헬리콥터 조종사, 중령, 은성훈장 수상자.
조셉 키틴저 : USAF 조종사, 낙하산 다이빙 기록 보유자
5. 하노이 군사역사박물관(하노이 전쟁박물관 ;Bảo tàng lịch sử quân sự Hà Nội)
내가 태어난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 바로 하노이 군사역사박물관이다. 그러니까 이때가 1956년 7월 17일이다. 금년 2019년은 이 박물관 건립 63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베트남은 올해로 인민군 창설 75주년이 되었다.
이곳에 4 개의 국보를 포함하여 수만 개의 유물을 전시하고 보관하고 있다 : (MiG-21 항공기 번호 4324; MiG-21 항공기 번호 5121, 결정 맵) 호치민 캠페인; T-54B 탱크 번호 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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