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를 가다 I went to India
글쓴이/이송로
인도에는 타고르와 간디가 지나갔다. 누군가가 그랬다. "예수는 지금도 인도를 걷고 계신다."
그래서 하던 일 멈추고 인도를 가다. 오랫동안 꼭 한번 가보고 탐험해보고 싶었던 땅이 인도였다.
짧다면 짧겠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다녀오는 길이 뭘까를 생각해 보았다.
열흘 일정을 통해 그 큰 나라를 다 다녀볼 수도 없는 일이라서 엄두가 안 난다. 그러나 일단 인도로 가기로 했다.
인도로 가는 길
2019년 11월 28일부터 2019년 11월 7일까지의 일정이다.
하노이-쿠알라룸푸르-콜카타-델리-자이푸르-쿠알라룸푸르-하노이 이렇게 잡았다. 콜카타는 사전의 일정에 없었지만 갑자기 잡았다.
이번 여행이 단순한 투어가 아닌 트래블링이 되기를 희망하며 출발한다.
교통 편은 저가항공 에어 아시아를 선택했다.
나홀로 여행이다. 나는 이미 나홀로 여행에 익숙해져 있다.
짐은 7킬로그램 이내로 가방에 꾸렸다. 옷은 그때그때 빨아서 입으면 된다.
나는 두렵지 않다. 어디로 가든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으로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바보가 따로 없다. 나는 바보다. 여행하면서 이번처럼 실수가 많기는 처음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자신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로 바보짓을 했다. 사실은 인도에 가는 것은 무비자일 거라고 생각하고서 여행 떠나기 3주 전에 쿠알라룸푸르에서 자이푸르 가는 항공권을 인터넷으로 덜컥 예약했다. 자이푸르로 먼저 가고 버스로 이동해서 델리로 갈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에서야 인도비자 문제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인도의 큰 공항 6곳을 제외하고는 인터넷으로 비자신청을 따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대사관에서 제공하는 웹에 들어가서 갖은 방법으로 신청을 하려해도 자주 에라가 발생했다. 할 수 없이 뉴델리로 가는 항공권을 다시 구입했다. 저가항공이라서 환불이 안 된다고 나와 있다. 델리로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델리도착 비자를 작성해 가서 도착하자마자 제출하면 한 달 체류허가를 해 준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보다
11월 28일이 되어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하노이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쿠알라룸푸르로 일찍 도착했다. 현지시간 1시 20분에 도착하고 나니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여유를 가지고 구경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바보같이 이미 작성해 놓은 도착비자 용지를 집에 두고 왔다. 공항 내부에 있는 복사 집을 찾아서 용지 출력하고 가까운 패밀리마트 공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용지를 작성했다.
글을 쓰고 있는데 라면을 들고 온 아가씨가 맞은편 좌석에 양해를 구하면서 앉았다. 너무 친설하고 정숙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는데 이름이 낸시 이(Nancy Lee)라고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 누이가 되었다. 내 성씨가 Lee이니 말이다. 한참 얘길 나눈 후 헤어지고 나니 오후 여섯시가 되었다.
나는 정말 바보다. 출발시간을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18시 45분이면 오후 6시 45분에 출발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이 바보가 오후 내내 8시 45분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5시까지는 체크인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바보 같은 나는 이제 6시니까 저녁식사를 하고 체크인 하면 되겠지 하고 여유 있게 저녁식사를 하고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돌아와서 티켓팅하는 여성에게 여권을 주고 예약된 표를 보여주니까 비행기가 이미 출발했다고 말한다. 왜냐고 했더니 시간이 지났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너무 황당했다. 그때서야 내가 출발시간을 착각한 것을 알고 곧장 뒤돌아서 나왔다. 나를 자책하는 마음과 더불어 무엇에 홀린 기분이랄까 그런 기분이었다. 골똘히 생각해봤다. 인도를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일까! 그냥 쿠알라룸푸르 시내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일정을 다시 생각할까! 아니면 제 3국으로 가버릴까! 고심 끝에 그래도 인도로 가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힌두이즘이 전역에 퍼져있는 나라 그러면서도 남태평양 지역에 속한 여러 나라까지 퍼져있는 힌두교와 그 영향력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고 싶었고 또 마하트마 간디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맘 먹고 갈 수 있을까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힌두교가 이렇게 분포되어 있다
지금이 7시가 넘었는데 보나마나 항공료가 비쌀 것이다. 고심 끝에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이 밤에 인도로 가는 비행기가 있나 하고 살펴보았다. 그런데 뉴델리로 가는 건 없다.
그런데 인도의 뉴델리에서 동남쪽으로 1500킬로미터쯤 떨어진 콜카타로 가는 항공이 밤 11시가 넘어서 있었다. 부랴부랴 에어 아시아 매표소로 갔다. 우리 돈 12만원 정도여서 즉석해서 티켓을 구입했다. 생각지도 못한 콜카타로 가는 것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겠다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뉴델리에 예약한 호텔도 돈만 날리게 되었다. 다행히 그 호텔도 비싸지 않았다.
1만 6천원정도이니까 서운해도 할 수 없다.
외국생활하면서 배운 게 있다. 포기할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포기하자.
뭐든지 속 끓이면 나만 손해다. 외국 살면서 이런 것도 하나의 좋은 추억으로 돌리자. 어쨌든 나는 바보다. 콜카타로 날아가다
에어아시아 비행기가 밤11시 30분 시간을 잘 지켜서 출발을 해주어서 좋았다. 조금 후에 보니 뒷자석이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새우잠이지만 세 시간 정도 새우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벌써 도착이다.
콜카타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은 12시 30분이 되었다. 시차가 말레이시아보다 2시간 30분이 늦다. 도착비자 용지만 제출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입국카드 용지를 내라고 했다. 그래서 이거 안 받았다고 했더니 뒤쪽으로 가면 입국용지 쓰는 곳에 있다고 해서 갔더니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경찰이랑 환전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두리번두리번 하더니 없다고 한다. 다음 비행기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란다. 그러면 그 용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도와줄 거라고 말한다.
궁리 끝에 다른 입국자가 쓰다버린 용지를 주워서 이름 란의 글씨를 뭉개버리고 다시 써서 갔다주었더니 입국비자 승인을 해주었다. 비자비용은 내 카드로 3만 5천원 정도 결제 된 것 같다.
늦은 시간에 낯선 콜카타공항 밖으로 나와보니 택시와 호객들만 있었다. 택시를 타지 않고 여기서 의자에 앉아서 그냥 여기서 밤을 세울까 하다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택시를 타고 콜카타 시내로 들어가서 호텔을 새로 잡을까 하다가 다시 망설이고 있던 차에 버스 하나가 오는데 손님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일단 물어나 보자 하고 물어봤더니 콜카타 시내로 간다고 말한다. 50루피 내라고 한다.
종점에 도착하니 어느새 새벽 3시가 넘었다. 여기서 우선 호텔을 찾자고 하고 길을 따라가 보니 생각보다 호텔들이 즐비하게 많았다.
여기저기 몇 곳에 들려보니 외국인을 받지 않는다고 말을 했다.
여긴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지 않는 곳이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또 다른 곳을 찾아보자 하고 나왔더니 한 툭툭 운전기사가 계속 따라온다. 여기 타라는 것이다. 호텔을 잘 인내해 주겠다고 한다.
따라 갈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내가 직접 찾겠다고 하고 찾으나 바로 옆 골목 안에 작은 호텔이 보였다. 이 호텔은 외국인을 받는다고 대답을 했다. 여권과 비자를 보여 달라고 했다. 오전까지만 이용할 테니 좀 할인을 해 줄 수 있냐고 했더니 안 된다고 대답한다.
골목으로 가보니 이제 힌두교 푸닥거리가 끝난 것 같이 보였다. 매일 저녁 그들은 음식을 차려놓고 신을 불러들이며 밤새 무당 푸닥거리하듯이 쟁쟁쟁 거린다.
저들의 희생제사는 결국 소이다. 이해가 되는가!!!
그런데 지금 입실하면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돈 3만원이니까 일단 지금 입실하면 24시간을 꼬박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 돈 절약하자. 24시간 여기서 머물면서 콜카타 주변을 보고 내일 새벽 3시 30분에 나가자. 그러자!" 하고서 2000루피(3만원)를 주고 들어갔다. 로컬호텔이라 방도 별로고 수건도 오래되고 때가 찌든 것을 주고 변기 물도 안 내리고 온수도 안 나왔다.
요령껏 샤워를 하고나니 긴장이 풀렸다. 너무 피곤해서 우선 쉬고 싶었다. 새벽 3시 40분에 잠에 들었다.
콜카타에서 인도여정을 시작하다
10월 29일 아침이다. 더 자고 싶었지만 일어나서 아침을 해결해야겠기에 바깥 구경을 나갔다. 아무리 봐도 내 입에 맞는 음식이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 기름에 뛰긴 음식들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베트남은 양반이다.그나마도 인도는 방글라데시보다야 낫지만 식당다운 식당이 없었다. 아침부터 차들이 빵빵대며 달리는 소리와 함께 툭툭, 자전거들이 달리며 골목 길을 누비는 모습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아침부터 소들이 흰소, 검정소, 황색소가 골목을 뚜벅뚜벅 걸어다니고 있었다. 역시 소의 나라답게 지저분한 골목길에 소가 왕같이 보였다.
저 소들에게는 주인이 없을까? 아니 다 제 주인이 있단다. 그러나 주인이 길들여서 밖으로 내보내면 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먹기도 하고 어떤 가게 주인이 먹을 것을 주면 먹고 저녁이 되면 주인이 와서 데려간다. 들에서 풀을 뜯어야 할 소가 이렇게 도심을 돌아다닌다.
배가 고파서 요기를 해야 하는데 한참 걸어가다가 보니까 저 건너편에 전병에다가 카레라이스를 찍어먹고 아침을 때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이 먹는데 나는 못 먹을쏘냐는 마음에 가서 나도 그것을 시키고 서서 먹었다. 거의 모두가 이렇게 산다. 먹고 계산을 하는데 2루피였다. 이건 너무 싸다.
대낮에 소들이 더위를 피해 고가도 밑에서 누워자고 있다
7루피라야 1000원인데. 그래도 다행히 인디안 오리지널 음식 맛이 입맛에 닿았다.
다른 음식 가게에 가서 다른 음식을 시켜먹는데 샌머리 영감님이 들어왔다.
내가 먼저 아는 체하고 손도 잡고 산진을 찍었다. 나는 이미 국제인간이 된 것 같다. 누구를 만나든 간에 쉽게 손도 잡고 농담도 하고 웃고 그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가게 물을 그냥 마실 수 없어서 사서 마셨다. 외국인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콜카타 거리에 오전 내내 다녀 봐도 외국인은 나뿐이었다. 오늘은 오직 콜카타를 여행하는 것으로 시간을 효율성 있게 보내야 한다.
콜카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택시
아차, 내가 인도 유심을 사서 끼워야 아무데서라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우선 인도유심으로 바꾸기 위해 호텔 주변 휴대폰가게를 찾았다.
아하, 자국인 경우 말고는 아무데서나 유심을 끼워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줄 알았으면 공항이나 외국인 거리로 가는건데 하며 중얼거렸다. 조금 걷다가 시클로를 탔다. 이것을 타고 시내와 관광지를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큰 도로로 다닐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포기하고 그냥 큰길을 따라 걷다보니 큰 강이 나왔다. 콜카타의 중심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갠즈스강 하류의 후글리강을 쳐다보았다.
걸으면서 낡은 버스 안에 손님을 가득 실고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갔다. 강에 떠있는 배들이 멀리 보였다. 여객선이 지나가는데 역시 매우 낡은 배에 많은 인원을 태웠다. 다리를 지나고 나서 계속 걸으면서 지금 한국에서는 상상도 인되는 1950년, 1960년대를 상기케 하는 짐꾼들이 수레에 큰 짐을 싣고 가는 모습을 본다.
소는 길에서 호강하고 사람이 죽어라고 일하는데 왜 그다지도 못살까!머리 큰 짐을 이고 가는 모습, 자전거에 큰 짐을 싣고 가는 모습들이 안타까워보였다.
굴다리를 가노라니 그냥 길거리에 누워 자는 이들이 많았다. 아직도 인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나름대로 콜카타의 문화를 샅샅이 들여다 보았다더 걷다보니 휴대폰 가게가 눈에 띄었다. 여기도 똑같은 말을 했다방법을 물어보니 센트럴 스테이션 근처의 휴대폰 가게로 가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가느냐고 했더니 바로 앞에 지나가는 버스 아무거나 타면 다 간다는 것이었다.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내려서 보다 큰 가게에 가보니 거기에서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길거리 휴대폰가게에서 한 젊은이를 만났다. 이름이 이 알람이란다. 알람시계가 떠올랐다.그가 나에게 정보를 주었다. 자기가 아는 형님이 휴대폰 가게를 하는데 외국인 등록을 하여 개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싶어서 같이 가달라고 했더니 쾌히 승낙을 했다. 시내버스를 10분 정도 갔다.
휴대폰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생각보다는 비싸다 싶었지만 800루피 주고 개통했다.
어쨌든 인도에 있는 동안 인터넷과 4G를 마음껏 쓸 수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사실 오늘날 외국에 도착했을 때 휴대폰 임시개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우선 가족이나 지인 사업체와의 연락관계가 중요할 것이고 다음은 현지의 정보들을 잘 파악해야 시간과 경비가 절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 역시 인터넷 연결이 잘 되는 편이고 구글지도를 통해서 교통 노선 등을 잘 볼 수 있어서 움직이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갠즈스강 하류의 후글리 강 아주 낡은 배에 손님을 가득채웠다.
하루가 지난 후 내 휴대폰 개통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알람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내가 델리로 가야 하는데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미 항공권을 구입했고 시간이 안 된다고 했더니 매우 아쉬워했다.
기회가 되면 우리 서로 만나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하루 더 연장해서 머무르는 것도 괜찮은 건데 하고 맘 속으로는 미련을 두었다.
콜카타의 관광지를 가다
콜카타는 그 유명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법률, 문학, 예술 등의 많은 재능을 가진 자였다.
1913년 그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간디에게 마하트마, 즉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우리 대하민국과 인연이 많은 것은 그의 짧막한 시에서 한국을 동양의 동불이 되리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유명한 인물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도 가장 못사는 지역이 되었을까!
이것 또한 기적이다.
내가 타고르의 고장에 온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제부터 한가로운 마음을 가지고 콜카타를 돌아볼까 한다.우선 메트로 스테이션의 중심지역에 가니 오른쪽으로 큰 공원 숲들이 나타났다.
인구 1400만이 밀집되어 사는 곳이니까 어디가나 사람은 많았다. 중심지인 만큼 옛동대문시장 만큼이나 자국민들로 분비었다.고층빌딩은 씻고 봐도 없었지만 5층이상 되는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한참동안 돌아보니 젊은 학생들은 거의 없고 주로 남자들이 많았다.어딜가나 중년층이 많고 남자들이 많았다. 지하도가 나타났다. 내려가보니 한개노선이 다니고 있는데 시내관광지와도 연결이 잘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타지는 않았다.
콜카타를 알려면 시내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사는 모습을 보면 음식을 먹어보고 현지인들과 부딪혀 보면 쉬울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나는 누구에게라도 다가가는 성격이기에 쉽게 접근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 말고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생활 속에서 영어를 접했던 나라라서 쉽게 눈치를 챘다. 때로는 호객꾼들의 말과 요구를 자연스럽게 따돌리며 혼자서 돌아다녔다.
타고르 우표
콜카타가 유명한 것은 1690년부터 1773년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 수도가 되었고 그 이후 수도를 델리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에 그때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사실 콜카타 이들이 섬겼던 여신 칼리와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서뱅골주에 속한다. 서벵골주에는 인구가 9천만 명이 넘는다. 이곳 콜카타에는 인구 1천 4백 명 이상이 살고 있다. 예술과 인도의 역사를 선보이는 웅장한 박물관 빅토리아 메모리얼이라는 관광명소가 있다. 인디안 박물관도 있고 닥샤인스워 킬리 템플, 힌두교 사원 등이 있다.
나는 빅토리아 메모리얼에 갔다. 200루피를 주고 갔다. 하얀 원형 건물이 궁궐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입장료를 외국이라 해서 10배 정도를 더 불렀다, 기분이 안 좋아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인도가 영국령이 되었을 당시 이곳에 빅토리아 여왕이 살았던 중이란다. 여왕이 쓰던 물건이 있고 사진들과 함께 역사적인 설명이 담겨 있다는 말을 들었다.
콜카타의 성공회 성당
거기서 10분 정도 큰 대로 변까지 걸어서 나오니 콜카타의 최초의 영국성공회 성당이 보였다.
역시 하얀색 건물이었지만 그렇게 예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천주교처럼 우상같은 것이 없으니 좋다. 기도를 드렸다.
그때 당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리라 예측이 들었다. 5백 명 이상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 안에 관광객들이 조용히 묵상하기도 하고 한참동안 단상 쪽을 쳐다보면 묵상을 했다.
그래서 사진찍는 것도 삼갔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 16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인도를 흔들었던 무굴제국이 영국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국의 인도 침략에 의해서 1857년 무굴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곳곳에 성공회 건물과 영국이 세운 학교들이 있다,
밖으로 나오니 학생들이 있다. 인도 학생들인데 피부가 까맣지는 않았다. 두 여성이 나를 자꾸만 쳐다본다. 저들이 보기에 인도사람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쳐다보는 것 같다.
그래서 사진도 같이 찍어주었더니 너무 나 좋아한다.
이곳에 동양인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은 유럽 사람들이 관광을 오는 것 같았다.
수도에서 1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라서 교통도 원활하지 않으니까 그럴 것이다
콜카타에 좀 더 머물렀으면 좋겠지만 그냥 이 정도 만족하고자 한다.
델리로 가다
돌아오는 길에 델리 가는 항공권을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여행사에서 물어봤는데 3400루피란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1000루피가 더 싸다.
3만원 정도였다. 그래서 표를 구입했다.
일찍 자고 새벽 3시 30에 체크아웃을 했다.
갈 데가 마땅치 않았지만 조금 걷는데 까지 걷자라고 생각을 했다. 콜카타의 새벽 모습은 어떨까!
생각보다 새벽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들이 꼭두새벽부터 어디로 갈까! 밤새 뭐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 새벽 4시인데도 버스가 다닌다.
그래서 공항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쪽에 가서 전화기 충전도 할 겸 5천 주고 낮에까지 쉴 수 있는 방을 얻었다.
선풍기가 먼지가 다닥다닥 끼어있었고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그래서 잠시 잠을 청하고 인테넷 검색도 하고 성경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정오가 지나자 공항으로 갔다. 간단히 패스트 푸드에서 버거 하나를 사 먹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조금 일찍 왔나 보다. 한 시간 후에 체크 인을 한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표를 받았다.
델리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6시 10분이다. 공항 내부를 보니 큰 규모에 양탄자가 깔려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구글지도를 켜서 보니 호텔까지 가는 방법중 가장 좋은 방법은 올리Oli택시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물어보니 공항에서 나와 맞은 편 건물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가 많았다. 웹을 안 깔아서 부킹을 못하니까 도와달라고 하니까 올리택시 안내하는 종사자가 자기 휴대전화로 신청해주었는데 380랑깃이 나온다고 보여준다.
이 택시들이 작긴해도 비교적 깨끗하고 친절해서 좋았다. 호텔까지 가는 길이 콜카타하고 전혀 빅비교가 안 될 만큼 깨끗하고 빨랐다. 역시 수도라서 달랐다. 고가도로도 많아서 차들이 싱싱 달렸다.
시내에 들어오면서 보니 생각보다는 오토바이가 많았다. 물론 베트남보다야 적지만 차들 사이로 상당수의 오토바이들이 사이사이로 뚫고 지나간다. 숙소를 1킬로미터 앞두고 작은 골목을 들어서니 리어카에 물건, 과일, 채소 등을 싣고 장사하는 사람들, 오토바이, 툭툭, 자전거 등 그 사이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수많은 인파의 모습 속에 즐비하게 들어선 상인들이 장사하는 것 그리고 얄궂은 가게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고 쓰레기들이 아무데나 나궁구는 상태에서도 진행형으로 살아가는 뉴델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가운데 택시가 나의 숙소인 호텔 하리 삐오르꼬 Hari Piorko에 도착했다. 립셉션의 호텔 종업원들이 친절했다. 특별히 101호실을 주었다. 값에 비해서 좋은 방을 주었다. 벽에 고정시켜 만든 어항의 금붕어가 나를 반겨주었다.
저녁을 먹어야 하겠기에 좀 나은 식당을 찾아보니 한국식당도 있었다. 가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냥왔다. 그냥 인도 음식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국 음식 메뉴를 보니 된장국, 김치찌개가 5천원도 하는 것 같았다.
그냥 인도에서 조금 나은 집을 찾아가 봤더니 300루피를 받았다. 홀이 있고 좀 단장이 된 음식점이었다.
뉴델리에서 일정을 시작하다
푹 잤다. 11월의 시작에 새아침을 뉴델리에서 맞이했다. 아침의 뉴델리 풍경을 보며 식사를 하러 나갔다. 델리와 뉴델리는 말만 그렇지 한 도시나 다를 바가 없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깝다. 선뜻 먹고싶은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먹을만한 걸 고르니 튀긴 치킨 반마리 고추장에 요리한 음식을 시켰다. 밥과 함께 열심히 먹었다.
거리는 학교가는 학생, 직장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가게들이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요즘 인도의 날씨는 시원한 편이다. 아마 겨울옷이 팔리고 두꺼운 이불이 팔리는 것을 보면 간혹 춥게 느껴지는 날도 있는가 보다. 나도 호텔에서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있어도 아주 편안했다. 오늘은 날씨가 흐릿해서 덥지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가 여행일정을 잘 선택한 것 같기도 하다. 더울 때 다녔으면 고생을 많이 했을 테니 말이다. 성경 역대상을 들으며 기도시간을 가졌다.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인도에 와서 인도사람과 직접 접촉하고 대화를 하니 소원을 푼 기분이다.
간혹 영어발음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대화가 편한데 많은 경우에 발음이 필리핀 세부족이나 말레이시안처럼 굴러가는 경우가 많아서 눈치껏 알아들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아침식사를 호텔식당에서 했다. 일부러 식사 불포함으로 했지만 경험삼아 먹고 싶어 가보니 비교적 먹을만 했다. 280루피를 냈어도 아깝지 않았다.
식사 후에 옥상에 올라가 보니 그런대로 정원이 예뻤다. 한쪽 코너에서 두 젊은이가 기름, 당근, 콩을 넣고 밥을 짓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말을 먼저 걸어왔다.인도만 해도 남한에서 왔냐 북한에서 왔냐를 대부분이 물어본다.
이런 걸 보면 거리상 많이 떨어져 있어서 한국을 많이 모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둘 중 하나는 네팔에서 왔다면서 언제 고향에 돌아갈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카투만두까지 버스로 14시간 걸리니까 한번 다녀오라고 권유를 했다.
그래서 나도 거기가서 에레베스트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미래의 희망일 뿐이다.
큐텁 미나르 Qutub Minar와 레드 포트 Red Port 그리고 간디박물관에 가다
오늘은 인도의 높은 탑을 자랑하는 큐텁 미나르 Qutub Minar에 먼저 가기로 했다. 구글지도를 보니 인도에서 가장 큰 기차역이 있는 뉴델리기차역을 지나 바로 지하철이 있다는 것을 보고 쿠텁미나르Qutub Minar역으로 갔다.
여기도 툭툭이 대기하고 있다. 실강이를 하다가 50루피에 흥정을 하여 관광지 입구로 갔다.
와! 장난이 아니다. 왠 관람객들이 이렇게 많은지 정말 놀랬다.
줄을 서서 표를 사는데 또 어제 외국에게 10배를 부르면 어찌하나 싶어서 100루피를 대신 사달라고 한 청년에게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흔쾌히 승낙을 했다. 외국인이게 덤탱이를 씌우는 일을 인도, 스리랑카 등에서는 이런 행위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머리를 썼다.
인파 속의 한 사람이 되어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웅장하게 높이뻗은 70미터 쳐다봐졌다.
12세기에 세운 건축물들이 지붕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이 분산되어 서있지만 매우 조화로운 면이 있었다.
갑자기 한 경비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해서 고맙다고 하고 찍었더니 계속 찍어주었다. 아! 용돈이라도 벌겠다는 생각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 작품사진이다.하도 고마워서 100루피를 주니까 달러로 달라고 했다. 그래서 없다고 했더니 너무 적은 돈이라고 했다.하지만 더 이상 줄 수 없다고 하고 서로 기분좋게 인사를 하고 혼자서 쿠텁 미나르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이것은 이슬람이 인도 전래되면서 지은 건축물이지만 돔 형태의 건물 말고는 이슬람교의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붉은모래와 대리석 등을 사용하여 건축을 했고 나름 예쁜 모양으로 조각된 기둥들이 매력적었다. 녹슬지 않는 철기둥도 볼 수 있었고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 안에 Iman Jamin의 무덤도 볼 수 있었다. 불교나 힌두교처럼 향을 피우거나 제물을 드리거나 하는 것이 없어서 더 좋았다.
레드포트를 가기위해 제일 가까운 전철역알 케이 아슬람 밀그 메트로 스테이션R.K ASHRAM MARG METRO STATION으로 갔다. 가다가 민디역Mandi Staion에서 한번 바꿔타고 라이퀼라Lai Quila전철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서 보면 레드포트가 보인다.
호기심에 들어가봤는데 안으로 들어 가려면 표를 사야 했다.외국인알고 500루피를 내란다.
내가 이런 데에 돈 보태줄 필요가 있냐 싶어서 들어가지 않고 배경을 벗삼아 인증사진만 찍고 나왔다. 웅장한 벽 둘레를 돌아본 것으로 만족해야겠다고 생각하니 맘이 가벼웠다.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은 마하트마 간디와 관련된 장소가 아니던가!
거기서 나와서 간디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다시 전철을 타고 델리게이트역으로 갔다. 내려서 밖으로 나와 길 건너서 약 600미터쯤 걸어가면 국립간디박물관이 나온다.
입구에 간디 사진이 초라할 만큼 양쪽에 붙어있었다. 그러나 약간 미소 띤 얼굴이었다. "간디 선생님, 제가 왔소이다!"
건물 밖의 벽에는 간디의 다양한 모습의 사진과 함께 명언들이 새겨진 액자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보니 간단한 도서관이 있었다.방명록에 서명하고 도서관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책들이 있는데 찾아오는 자들도 별로 없었다. 거기서 나와 다른 홀로 가보니 간디 생전에 사용했던 실 짜는 기구(물레)와 기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른 룸으로 가니 보다 길고 긴 공간을 이용하여 간디의 생애를 역대기식으로 편집해 놓은 사진과 설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감명있게 얽어가며 시간을 좀 길게 보냈다.쉽게 찾아올 수 없는 나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간디의 한마디 한마디에 격언이 담겨있었다. 간디는 독실한 힌두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귀족처럼 자랐다. 하지만 기독교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믿는 신은 Ahimsa, Truth 참이었다. 진실하게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살고 싶어 발버둥 쳤던 그의 모습에 당시 인도인들은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남김 유명한 말이다. 내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Find it through me.(나를 통해서 찾아라)" 마하타 간디박물관의 방문과 간디 정신세계와의 만남은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My life is my message. -Mahata Gandhi-
기독교 하나님이 없는 그의 삶이었지만 그는 많은 사색을 통해서 명언을 남겼다.
인도에서의 나의 사색
잠시 가던 걸음 멈추고 사색을 해본다.
내가 인도에 가서 많이 걸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보다 2세기를 앞에 와서 인도를 걸았던 분이 있었다.
19세기 인도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보낸 훌륭한 분이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항상 인도의 3억(그 당시 인구)의 사람들을 사랑의 눈빛,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쳐다보며 살았다. 그는 수십 권의 책을 남겼다. 그의 첫번째 저서가 "인도를 걷는 예수"였다. 바로 그가 스탠리 존스Stanley Jonhes 선교사이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와 친구처럼 지냈다고 알려진다. 어느 날 그가 간디에게 모든 인도인들이 예수의 정신을 배우고 예수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을 건넸다. 간디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이런 말을 하고 싶군요. 우선 여러분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단다. 간디의 말 한마디는 오늘 크리스천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만일 한국의 크리스천들과 목사들이 예수처럼 살아간다면 지금도 전도는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세속화된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면 할 말을 잃게 된다.간디는 말했다. "자기네 종교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인도의 길을 지금도 걷고 계시지만 외면을 당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온통 힌두교와 모슬렘들만 눈이 띠니 말이다. 물론 내가 단시간 방문을 하기 때문에 이곳에 누가 예수님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아마 감람산 꼭대기에 서서 예루살렘 성전을 비라보시며 우셨던 예수님께서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며 우시고 계실 거리는 생각이 찾아들었다.
죄는 참된 진리에 연막을 친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분이지 보이지 않도록 그들 종교에 열심을 다 하게 만든다.
귀를 막아놓은 사탄의 전략이 어마나 치밀하고 무서운가를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인도의 힌두인들은 소를 우상으로 섬긴다.
소를 보면 경의를 표하며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다.
특히 암소를 더 신성시 한다. 그래서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일화들이 전설처럼 남겨져 있다.
그들은 윤회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 다음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 소라고 생각한다
죽어서 다시 환생을 할 때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면 소로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풀이 없는데 무엇을 먹고살지 하고 걱정이 되겠지만 그 주변의 누군가는 풀이나 먹이를 제공한다.
생각해 보라. 소가 똥을 싼 길바닥을 차나 오토바이나 툭툭이 뭉기고 지나가면 또 사람이 그것을 피해가거나 밟고 지나간다.소만 아니라 때로는 염소도 다리 밑에서 누워지는 것을 보았다.
소가 그동안 묵묵히 인류에게 노동력과 식물을 제공해 왔으며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점에서 평가할만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허망한 모습과 인간의 무지는 각 곳에 스며들어 있음이 한눈에 보인다. 소는 처음부터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사람의 식물로 쓰임을 받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내가 다녀갔다고 해서 흔적이 남을까마는 그래도 서명을. . .
잘못된 신앙이 잘못된 신념을 만들어낸다. 소를 이성 있는 인간처럼 생각한다는 자체가 어리석음이고 가증스럽다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에 다종교가 스며들어 있어서 상당히 복잡한나라가 되어있다.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보려고 모스코사원으로 간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나는 델리의 이슬람교 사원에서 이 광경을 한참동안이나 지켜보았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더니 예배시간이란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돼지고기를 먹는 자를 혐오하며 지옥 갈 자로 여긴다.그래서 어느 식당에서 돼지고기를 팔면 거기는 일체 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소고기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늘상 닭고기 위주의 식사와 생선만 먹고 살아야 한다.
채식은 더운 지방이라 대량 생산이 안 되어 먹지 않는 편이고 기름에 볶은 후 양파 썰어준 것과 고추 그리고 카레 등을 찍어먹는다.그러고 보면 우리는 사계절 채소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한국이나 베트남은 그 자체로만으로 복많은 나라라는 기분이 들었다.
뉴델리 중심가를 가다
2019.11.3. 나는 인도에 와서 거의 매일 7킬로미터 이상 걸은 것 같다. 이렇게 걸어다니면 건강에도 좋을 뿐 아니라 또 많은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많은 생각의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다.
나무와 꽃들을 쳐다보고 가게들을 들여다보고 큰 건물을 쳐다보고 또 길가는 사람들에게 눈웃음을 치거나 말을 걸기도 한다. 특히 경비 아저씨들에게도 농담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슬슬 걸어가면서 많은 것을 얻게 된다. 그리고 자동차가 싱싱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약간 공백이 생기면 쏜살같이 건너기도 하고 이 하나하나가 나의 인정 안에 들어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은 이렇게 즐기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길을 걸을 때 인도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건다. 그것은 자기들이 얻어먹을 것이 있을까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마음을 너는 충분히 이해한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그럴 수 있고 외국인에게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은 서로 나눠갖자는 게 아닐까 싶다.
다만 이들과 나이가 다른 것은 내가 베트남에 살 때에 베트남 사람들이 나를 베트남 사람인 줄로 착각을 많이 하는데 여기서는 그들과 차이가 많이 느껴져서 내가 중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으로 사람 중 하나로 보이는 것 같다.
아침 뉴델리의 코넛 플레이스를 들렸다. 거기도 인도의 중심도시이니까 그래도 고층건물과 더불어 많은 대형백화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걸어서 가보니 별로 볼 것이 없었고 맞은편에 펄럭이는 대형 인도의 태극기가 인상 깊게 들어왔다.
청년 하나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대학생아라고 하면서 주변을 안내해 주겠다고 해서 그냥 쇼핑센터나 구경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툭툭을 이용해서 가보란다.
그 청년 말대로 가봤더니 그냥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보석, 양탄, 옷감, 실크 그래서 수제공예품을 파는 곳이었다. 바가지 씌우는 곳이라는 생각에 대출 다시 돌아와서 주변 한바퀴를 돌다가 인디라 간디 네셔널 센터로 가기로 했다.
인디라 간디 내셔널센터에 가다
나는 지금 뉴델리 중심에서부터 걸어 다니고 있다
이렇게 걸어다니면서 상세하게 보는 재미도 대단히 크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렇게 하기를 좋아한다. 걷다가 보면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 때로는 골목 깊숙이 있는 가게를 다 들여다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나는 지금 이렇게 걸으면서 그러면서 계속에는 중심에서 걸어가도 될만한 인다라 간디센터와 내셔널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날씨도 서늘하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서 기분이 좋다
걷다가보니 KFC가 보였다. 아침식사를 과일로 가볍게 때웠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버거를 하나 시켜서 점심대용을 삼았다.
거기서 나와 다시 걸어서 가다가 인도차를 한번쯤은 마셔보고 싶어서 시켰더니 10루피를 받았다. 마시면서 가다가 길거리에 서넛이 앉아있는데 나를 보고 한 젊은이가 눈웃음쳤다.
걷던 걸음 멈추고 얘길 나누는데 한 늙은이가 나를 무척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이 차의 이름이 티맛살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한잔 더 들고 싶냐고 해서 수락을 했다. 차값을 지불하려고 하자 자기가 지불했다고 대답했다. 내가 지불해야 한다고 하자 당신은 특별한 손님이란다. 인도에서 대접받는 게 쉬운 나라가 아니데 말이다. 나는 감동을 먹었다. 그래서 답례로 하모니카를 불어주었다.
헤어지고 나서 지도를 보니 간디센터가 1.2 킬로미터 남았다. 때로는 걷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진다.
피곤할 때는 다리가 좀 아파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느 덧 다 왔다.
도착하자마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한 학생에게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오늘이 특별한 축제일이란다.
알고 보니 오늘 하루만 축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센터에서는 일년내내 다양한 문화행사를 펼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장면을 처음 본 나로서는 잘 왔다 싶기도 하고 뭔가 볼거리가 있을 거라는 느낌에 흥분이 되었다. 나는 이곳 인디라 간디 내셔널센터에 가서 아주 재밌는 한나절을 보내게 되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만났고 멋진 축제의 장면을 보기도 했다.
다양한 인도음식과 책들과 여러 가지 제품들을 팔기도 하며 선전하는데 이것을 보려고 몰려든 젊은이들이 아주 많았다. 어떤 곳은 종교행사를 하기도 했다. 이 날이 축제가 열리지 않았더라면 좀 심심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행복한 느낌이었다. 한쪽에서는 힌두어라 알아들을 수 없지만 토크쇼를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나도 가서 자리에 앉았다.
한참이나 보다가 다시 나와서 다른 곳을 구경했다. 내셔널센터 안으로 가보니 여러 가지 전시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인도가 가난하다는 것은 이런 곳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큰 나라에서 더 잘 꾸며서 수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나름대로 감상을 하고 밖으로 다시 나왔다.
아무튼 내셔널센터에서 전시품을 보는 즐거움보다는 학생들을 만나서 즐거움을 갖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었다.
많은 학생들이 모인 곳에 나가가니 그 학생들이 너무너무 나를 좋아하니까 나 역시 신이 났다.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며 사진도 찍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여 이들과 주고받은 대화에 금방 친해지기도 했다.
서로 어깨를 자고 웃으며 같이 한참 동안 놀아주었다. 헤어질 때도 못내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학생들이 나를 가깝게 되어 줘서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의심의 눈으로만 바라봤다면 그들과 내가 인격적인 나눔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묘지를 만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특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알고 보니 오늘은 인도의 크리스천들이 조상이나 가족묘지에 죽음을 기리는 날이다. 아침부터 골든메리꽃을 엮어서 파는 장사꾼들 입구에서부터 약 100미터 이상 장사진을 쳤다. 그때만 해도 매일 이렇게 목걸이를 만들어 파는가보다 이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오늘은 많은 참배객들이 이 꽃을 사들고 들어가서 자기 가족이나 친지 묘를 찾아 꽃을 묘위에 예쁘게 장식하고 난 후에 한참 동안 묵념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절을 올리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가족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만평이상 되는 부지에 무덤 하나에 반평도 안 되게 배당이 되었을까 싶다. 저들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하는 기념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뉴델리의 한복판에 크리스천 묘지가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기다렸던 주일이다
기다렸던 주일이 돌아왔다. 인도에서 맞는 11월 4일 첫번째 주일아침이다.어제 이미 찾아갈 교회를 정해뒀다.바이블 펠로우쉽교회인데 내 호텔에서 약 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걸어가기로 했다.교회에 도착하니 경비아저씨가 있었다. 9시에 시작한다고 일러준다. 지하층으로 가라 했다.예배당 안에는 예배준비를 위해 악기를 설치하는 서너 명의 젊은이가 있어서 잠시 기도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길거리 음식을 먹으로 갔다. 배고프면 뭐든지 맛있다.구운 전병에 소스를 찍어먹었다. 알궃게 생긴 작은 사과와 바나나 한 개를 먹었다. 칼이 없으니 껍질채 먹었다.
9시가 되어 교회당으로 들어가니 젊은 보컬팀 4명이 앞에서 찬양을 인도했다.영어 찬양을 5곡정도 했는데 구속Redemption이란 찬양이 심금을 울렸다. 이후 미국 목사님이 나와서 성찬식을 했다 떡과 포도즙을 동시에 나눠주니까 시간이 짧게 걸렸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라는 제목을 가지고 창세기와 로마서 요한계시록을 살펴가며 설교를 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했다. 우리 인간 속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류는 완전한 창조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모양과 모습을 닮게 지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인류가 죄에 빠졌을 하나님의 형상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 후로 상실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을 상실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가 죄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셨다고 하며 이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힘있게 살아가야 할 것을 당부했다.
설교의 결론부분에서 50년 전 마하트마 간디선생이 예수님을 위대한 현인이라고 말하며 기독교에 접근했으나 끝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 그냥 위대한 성인의 한사람으로 남았다고 했다. 그는 예수도 아니며 크리스천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허물이 많았으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순간 우리가 간디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교가 끝나자 찬양이나 축도 없이 예배가 끝났다. 전통적인 예배형식에서 탈피한 모습으로 비춰졌다. 나오면서 목사와 인사를 했다.
자이푸르 가는 기차를 타다
오늘 밤 10시 30분에 자이푸르에 가야하니까 정오에 체크아웃을 했다. 어디서 좀 쉬어야 하는데 뉴델리나 델리나 커피숍 하나가 제대로 없다.
베트남만 같으면 사방천지가 카피숍인데 말이다. 일단 구도시인 델리 쪽으로 가서 구경도 하면서 걷기로 오늘은 7킬로미터를 걸은 것 같다.가방이 7킬그램인데도 장시간 걸으니 어깨가 아팠다.
구도시의 델리역은 나름 예뻤다. 그런데 어찌나 여행객들이 많은지 옛날 한국의 명절에 대합실이 미어터지게 분볐던 것처럼 손님이 많았다. 뉴델리역도 가봐서 알지만 거기도 만찬가지다. 대부분 고향가거나 다시 도시로 나오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시간이 많이 나아서 발뻗고 누울 곳만 보이면 누비져 자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또한 짐보따리들이 어찌나 크고 많은지 어떤 이들은 여행용 가방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어떤이들 마대자루에 물건을 넣어 끙끙대며 역전으로 향했다.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델리역 위치만 확인해두고 다시 나와서 커피숍이나 맥도널드 같은 곳을 찾기로 했다.구글지도에 보니 2킬로미터 이상 걸어가야 할 것 같다. 겨우 맥도널드를 찾았다. 큰 버거와 감자칩 그리고 콜라를 시켰다. 280루피 우리돈 4천원 정도이다.
화장실도 없는 맥도널드가게, 충전기 꽂을 데가 없어서 부탁하니 그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참 한심한 나라이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또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델리역으로 되돌아왔다.화장실에 가는 것도 불편할 때가 많다. 야외화장실이 있어서 가보면 청소를 안한 상태로 몇년이고 방치된 상태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난다.
그래도 볼 일은 봐야 하니까 이용을 했다. 이들은 이런게 일상일테니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보였다.
일반손님의 대합실에는 말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분비니까 나는 귀빈들이 애용하는 매표소 한적한 곳을 찾아서 읹아 있었다.
두사간을 더 앉아있다보니 이제 탑승시간이 50분쯤 남았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5번 플렛홈으로 가서 기다렸다.
막상 시간이 되어 열차가 오니까 사람들이 서로 앞에 타려고우르르 몰려든다. 나는 내 열차칸을 찾기가 어려워서 이 사람에게 물어서 찾아들어 갔다.앞에 달려있는 칸들은 1등석이라다.
좀 허술했어도 침대가 있어서 자면서 갈 사가 있었다. 방 하나에 여섯명이 타는 2등석이었다. 5등석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하는데 완전히 짐짝처럼 사람들이 탔다.
와, 옛날 한국의 비둘기호가 연상이 되었다. 나는 편히 잠을 청했다.다행히 잠퍼 옷을 가지고 갔는데 잘 입었다. 생각보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기 때문이다. 어느 역이리고 말해 주는 안내방송도 없었다. 다행히도 구글지도를 통해서 자이푸르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려서 보니 5시 40분이었다. 시간이 거의 한시간 연착되었다. 이제 숙소로 가려고 뚝뚝 기사에게 호텔 이름을 대며 얼마냐고 물으니 250루피란다.
역에서 5.5킬로미터이니까 너무 비싸다는 생각에 안 간다고 했더니 200루피를 불렀다. 그래도 안된다고 말하고 100루피에 갈테면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내가 이미 국제인간이 되어 가격을 깎을 때는 확실하게 깎는 기질이 있다. 호텔 입구에서 내렸는데 예약해둔 호텔이 아니었다. 물어물어 겨우 찾았다. 예약했던 호텔 이름이 아닌 간판이 붙어있어서 헤맸다.
사실을 델리에서 출발 전 아고다를 통해서 가장 싼 호텔을 예약했다. 우리 돈으로 8750원이다. 새벽에 도착했으니까 오전 동안 눈만 붙이고 일어나서 좀 니은 다른 호텔을 찾을 속셈이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지난번 2. 3만원 주고 잤던 숙소보다 나았다. 그래서 이곳을 떠날 때까지 이 호텔에 머물기로 맘 먹고 연장했다.
세계에서 열번째 안에 드는 영화관을 가다
세계 열 번째 안에 드는 영화관을 가다오늘이 11월 5일이다. 핑크도시로 알려진 자이푸르에서 사흘간 보낼 예정이다.제일 가까운 곳 라지 만미르Raj Manmir 영화관에 갔다. 나는 되도록 2,3 킬로미터의 거리는 걸어서 다녔다. 12시 30분에 시작한단다. 370루피에 표를 샀는데 다이아몬드석이란다. 시간여유가 있어서 맥도날드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자이푸른 오히려 델리보다 깨끗하고 자가용도 많고 안 그러면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간이 가의 다 되어 영화관에 벌써 관람객들이 바글바글했다 .인도에서 최고, 세계에서 10위 안에 드는 멋진 영화관이라서 이 고장 명품 관광명소가 되어있었다.
나도 호기심에 빼어놓을 수 없어서 꼭 관람해 보기로 했다
.안에 들어가서 학생들 3명과 사진을 찍고 금방 친해졌다. 종교가 뭐냐고 했더니 모두 힌두교란다. 일단 접고 들어가서 얘기를 해야겠는데 영화관람 시작시간이 되어 뒤로 미루고 영화를 봤다.
인도의 최고의 무비스타들이 출현한 영화였는데 정말 시작이 웅장했고 내용, 화질 그리고 음향과 분위기까지 끝내주게 좋았다.
말을 못 알아들어도 대략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힌두어이고 자막이 없어도 내용의 흐름을 얼른 파악해낼 수가 있었다 . 인도 영화의 최상의 맛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만난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사서 같이 먹고싶었다. 영화관 안의 음식이나 과자류를 골라라고 하니까 2500루피어치를 골랐다. 인도에 와서 이런 돈을 쓰는 건 처음이었지만 얄미워도 어떻게 하나!겁도 없는 애들이었다.
인도 애들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도 없이 마구잡이로 음식을 시켰다.
보통 50루피, 보통은 50루피 이하로 한 끼니를 이어가는 이들인데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건 그렇고 지이푸르는 좀 더 여유있게 돌이가는 분워기이다. 현대차동차, 옐지전자도 들어와 있었다. 핑크시티를 돌아보다오늘 18세기 왕궁의 옛터전을 가보기로 했다.
하와마하이와 성공회 성당을 가다
툭툭을 타려고 흥정했는데 100루피를 단라고 했다. 과감하게 30루피를 준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한다. 50루피,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60루피에 흥정하고 우선 호텔에서 가까운 하와마하이를 방문했다.
입장은 10시부터 한다. 외국인 입장료가 200루피 라고 해서 200루피를 주고 들어갔다.와, 주변 거리들이 고풍있고 아름다운 곳에 하와마하이 건물들을 세워 날미다 음악을 즐기며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지은 궁녀들의 집이다. 위로 올라가서 보면 벽에 작은창들이 달려 있다.
지금도 궁녀들의 악기 연주가 들리는듯 하다.
그렇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궁녀들을 배려해서 지은 의미있는 양식의 건믈이었다.
다시 걸어서 또 다시 3분을 걸으니까 시타팰리스라고 부르는 왕궁이 눈에 들어 왔다.
역시 자이푸르의 심볼이 될만한 건물이라 그런지 외국인들이 많이 왔다. 물론 한국인은 없다. 아마 어쩌다 다녀 간 사람들이 있긴 하겠지! 700루피를 주고 들어갔다. 우리돈12000원다.안으로 들어가니 인도 풍의 옛 궁전과 그 터가 있었다.
갑자기 베트남 중부의 후에의 왕궁터가 생각이 났다. 여기는 건축의 양식이 인두 풍이며 중국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1200년부터 고대 페르시아와 교류하며 주고받았던 흔적들이 있다. 역대 욍들의 사진을 전시한 곳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직원 한명 오더니 티켓을 보자고 하더니 보여줬다. 사진을 찍었으니까 따라오라고 하더니 사진 찌으면 벌금 500루피를 내란다. 나는 몰랐다고 했더니 휴대폰을 압수하고서 500루비를 내란다.
나는 못내겠다. 지우면 될게 아니냐고 했더니 기어코 벌금을 내란다. 그래서 휴대폰카메라 주면 지우겠다.옥신각신 하다가 내가 큰소리로 "나는 벌금 못낸다." " 빨리 내 카메라 줘!" 하고 소리쳤다. 순간 나이 많은 직원 달려왔다. 그때서야 내 폰을 주었다. 그들 보는데서 다 지우고 내가 몰라서 그랬다고 하고 미안하다 하고 나왔다.
알고보니 '사진촬영금지 Photography prohibited'라는 말이 붙어있었다. 보통은 Nophotography라는 말인데 여기는 용어가 달랐다. 'Prohibited '라는 단어를 공부했다.
업보를 믿다 보면 운명론에 빠진다
예를 들어, 전생에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현세에 부자로 살고 귀족으로 태어난다는 말을 하며 윤회를 믿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도에 와서 주요도시 3곳을 다니면서 각 지역의 특징도 알게 되고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감이 잡혔다.
밑도 끝도 없는 나라이기에 어디서부터 정치적인 새로운 가닥을 잡아가서 쇄신이나 개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부자들은 별 걱정이 없을 수 있지만 가난에 찌들려 겨우 끼니만 명명하며 살거나 그것도 없어서 길에서 손 내미는 사람이 많다.
어떻게 보면 나라나 사회에 기대할게 없으니까 막연히 종교심에 기대하며 버티고 살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힌두교인들은 베다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의 부자들은 전생의 업보를 잘 쌓았기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가난하게 살며 고생하는 자들이 그 고난을 잘 이기면 다음 생애에서 부자가 된다고 믿는다.
이런 허왕된 이론에 속아 사는 이들에게 있어서 꿈과 희망은 무엇인가? "글쎄요!" 라고 밖에는 대답이 없는 그들이 아닐까! 역사상 훌륭한 지도자도 많았던 나라가 왜 이러지 하겠지만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문을 읽으면서 제물을 바치는 힌두교인들 머리 속에서 창조적 지성, 과학적 사고나 새로운 신념이 떠오를까!이슬람교인들 역시 율법적 사고에 갇혀서 오직 그것에게만 매달리며 거기에 운명을 걸고 있는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내 눈에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인데 마귀는 그 세력을 떨치며 인도인들을 놓아주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큰 불행이며 안타까운 일인가! 내가 돌아본 인도는 어디를 가나 종교의식에 찌든 모습이 보였다.
한국이나 베트남과는 사뭇 달랐다. 만일 이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깨어난다면 새로운 문예부흥을 일으키는 큰 나라가 될텐데 말이다.
그런 저녁이 잠재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깊은 잠고 있는 나라로 보여진다.
간디가 다종교를 포용하는 것만 했지 무지와 무능에서 깨우쳐주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파워가 나타날 수 없는 단순한 힌두교인이었을 뿐이다.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오늘 밤 인도를 떠나야 한다.
인도를 위해서 더욱 기도가 간절해진다.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했다. "주여, 인도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들은 자기들의 종교에 대해 철저한 전통에 젖어서 절대로 나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한다. 강한 신념을 갖는 건 좋으나 잘못된 신념, 거짓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것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게 큰 맹점이다.
자신들의 부모가 가진 종교는 자녀들이 그대로 되물림 한다. 그래서 그들은 테어날 때부터 그들 부모의 DNA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까지 알려져 있다.
인도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 나라에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음을 예상케 하는 말로 들려진다.
성령으로 독생자를 잉태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이런 나라에도 복음이 먹혀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까 결단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은 인도들에게도 일반은총의 선물을 날마다 주시기에 웃음이 있고 평화를 논의하며 세계 속에 우뚝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13억이 넘는 이 나라가 영적인 바람이 분다면 세계를 리더할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체력 좋은 사람, 지식 있는 사람, 각종 예술적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많다. 그런데 누가 가서 이들을 깊은 잠에서 깨울까!
세계에서 3번째 많은 종교인구가 힌두교이니 말이다. 인구의 80%가 힌두교이고 15% 가량이 이슬람교이다.
간디는 이슬람과 화해를 시도했다가 힌두교 수구세력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그때가 1948년 1월26일이었다. 물론 그를 총으로 쏜 나트람 고드세는 사형을 당했다.
어쨌든 간디는 비폭력주의자이다. 그래서 인도와 파키스탄 또는 방글라데시와 화해 무드를 만들어 내고 하나 됨을 꿈꾸었다.
그렇게 되면 인도는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암살한 고드세는 비폭력으로는 힌두교인들이 이슬람교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짓밟히고 죽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배가 고파서 마땅히 먹을 만한 것이 있을까 해서 계속 걷다가 처음 본 귀리밥에다가 양념을 쳐주는 음식을 먹었다.
먹다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누가 밤에 싸놓은 똥이 있지 않는가! 더러운 생각을 떨치려고 애쓰며 그걸 다 먹었다. 물을 사 먹으려 해도 살 수 있는 곳이 보이질 않았다.인도에 점방에서 과자는 팔아도 물은 안 갖다놓는다.
옛날 한국도 그랬었다. 오늘 아침에도 이래 저래 7킬로미터 이상 걸었다. 걷다가 대학교, 초등학교, 유치원도 보았다.인도의 가게들은 보통 10시가 되어야 문을 면다.
알요일에는 보통 문을 열지 않는다. 걷다가 자이나교 사원Bhattarak Ji Ki Jani Nasiyan을 보았다.넓은 공원의 깨끗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이들은 영혼의 해탈을 주장하고 윤회사상을 부정한다.
자이나교는 고타마 붓다와 동시대인이었던 바르다마나(Vardhamana)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그럴듯한 논리가 인간의 관심을 끌고 영혼을 사로잡는다. 이들의 주장은 해탈은 영혼이 완전지를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영혼의 본래 상태는 완전한 믿음, 완전한 지식, 완전한 능력, 완전한 기쁨이지만, 해탈하지 못한 영혼은 무지와 격정을 원인으로 하여 형성된 카르마가 영혼과 결합되어 있어서 이러한 본래 상태가 가려져 있는 상태이다.
결국 근심의 원인이 되는 카르마에서 벗어나야 해탈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이들 역시 창조주와의 인격적인 관계는 없고 자기해탈의 또 하나의 경지를 꿈꾼다.
이렇게 헛된 것을 붙잡고 일생 매달리고 사는 인간들에게 우리 크리스천들이 할 일이 너무 많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데 무관심 또는 선교사 쏠림현상 등이 큰 문제로 대두되어 있는 것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저들의 운명론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지는 않기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 아파해 본다.
숙소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려고 하는데 직원이 오늘 새벽 5시에 체크아웃인데 패널티를 내라고 말한다. 친절함이란 반푼어치도 없고 대뜸 하는 말이 그거였다.
호텔 문을 이 자물쇠로 잠그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냐 나는 오늘 오전까지 예약했다. 근거를 보여달란다.그래서 일단 가방 챙겨서 나온 후에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메일에 예약완료된 근거를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두 말 안하고 가란다. 인도란 나라가 그렇다.
잃는 것은 적고 얻는 것은 많다
비다야다르 나가르Vidhyadhar Nagar에 갔다. 자이푸르국제공항에서 약 5킬로미터 이상 떨어져있다. 밤늦게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려면 공항에서 가까운 곳 싼 호텔에 머물다가 출발하면 좋을 것 같아서이다.
툭툭을 타고서 그 호텔에 갔는데 호텔 직원이 외국인 숙박은 거절한다고 했다. 아니 안 된다면 왜 아고다회사와 협력체결을 했냐고 했더니 그것은 아고다 회사에 직접전화해서 해결하란다.
만년 젓가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해결할 문제이다. 너희가 협약해놓고 딴 소리 하지 말라고 했더니 아무튼 이 호텔은 안 된다면서 계속 거절했다.내가 로밍도 안 해서 직접 전화할 수 없으니까 너희가 얘기하라고 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예약번호를 불러 준다.
그리고 나를 바꾸어 주길래 여보세요 영어로 하니까 아무 말이 없다. 더 이상 얘기할 문제가 아니다 싶어 밖으로 나와서는 아고다회사에 환불 요청 이메일을 보냈다.
어쨌든 외국에서 생길 수 있는 일들이라 생각하고 체념을 했다.
또 바보짓을 했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이 지역 풍토를 알아보자는 생각에 지역인들 사이에서 길거리 차를 시켜서 마셨다. 5루피를 줬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했다. 거기서 과일도 까먹고 하다보니 한 시간 정도 흐른 것 같다.일어서서 길 건너 편으로 걷다가 아주 가난한 아이들을 보고선 아까 사서 먹고 남았던 과일을 다섯 명의 애들에게 나눠주니 매우 좋아했다. 계속 걷다가 보니 패스트푸드 음식점이 보였다. 문을 열고 보니까 충전기를 꽂는 시설이 있었다. 음식을 시켜 먹으며 충전을 시켰다.
여기서도 한 시간 이상을 머물렀다.
거기서 나와서 보니까 아직도 비행기 탈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아까 그 애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갔다. 아이들이 돈을 달라는데 돈이 없다고 하고 가방에 있던 빵을 꺼내서 주려고 했더니 서로 손을 내민다. 할아버지가 나누어 주겠다고 해서 주었더니 냄새부터 맡아본다. 혹시 부식이 됐을까봐 염려하여 그런 것이었다.
천막집을 앞으로 가니까 그 아이들의 엄마는 밀가루 반죽을 해서 전병을 굽고 있었다.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는데 모두들 좋아했다. 그들과 잠시 놀아주고 나니 저쪽에 남자들이 많은 곳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못 갈게 뭐가 있나 하고 젊은이들 일곱 명의 손을 잡아주고 한참동안 함께 해 주었다. 영어를 전혀 못하니까 눈치껏 의사소통을 하면서 하모니카를 불어주니까 폰에 녹음을 시키며 좋아했다. 그러고 다시 악수를 하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두 시간 기다리면 체크인을 하고 여유 있게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돌아올 때는 제법 똑똑하게 행동하며 실수 없이 쿠알라룸푸르를 거쳐서 다시 하노이로 볼아올 수 있었다.
하노이에 도착하니 내 고향집에 온 것 같았다. 하노이의 집까지 돌아오니 11월 7일 오후 5시였다.
인도를 다녀와서
인도를 열흘 간 다녀왔다. 또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도 전역을 다녀보고 싶다. 이렇게 하려면 한 달 이상은 소요될 것 같다.
인도는 29개의 행정자치주와 9개의 연방지로 로 나눠져 있다. 한 도시나 농촌에서 이틀 이상 머무르지 않고 돈다면 여러 거점 도시를 방문할 수 있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도인들은 사람을 보면 시비를 걸지만 남자에게는 해를 끼치려 하지 않는다. 내가 1996년 예루살렘에서 마주 바라다 보이는 올리브산에 갔을 때 산너머 마을이 보이길래 갔다가 모슬렘 애들에게 맞아 죽을 뻔 했다.
그런데 인도사람들은 그런 영우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사프하게 접근하고 묵직하면서도 미소를 주며 얘기를 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호기심을 갖고 듣으려고 한다.
나에게 주신 재능을 활용해서 접근하면 일단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 본다. 인도는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계층, 다양한 종교가 뒤섞어져 있는 나라이니 만큼 생활모습도 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다.그래서 보고 느낄게 많다. 그런데 이들에게 던져줄 희망은 무엇인가?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
국가와 국가끼리 외교관계로 풀 수 있는 것은 경제나 학술교류 등이 있겠지만 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여 은은하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이번 인도에 갔을 때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만나는 학생들 어른과 어린이들 손잡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에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눈여겨봐야 할 대상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줄 기회가 있다면 그들은 마음을 열 것이다.
인간의 속성은 다 마찬가지이다.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깔고 시작하면 아무 것도 될 일은 없다. 나는 인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아직 갖지는 못한다. 나는 베트남이 좋아서 베트남에 몸담고 있다. 베트남에서 해야 할 이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인도와 차이나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이고 베트남을 거점으로 해서 신남방정책의 주요나라 중 하나가 인도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의 역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싶었다.
작년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해서 인도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다음으로 인도를 강국으로 끌어올리고 싶다고 했을 때 인도의 모리 총리의 칭송을 받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기란 현실적으로 볼 때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할지 아련하기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구약의 스가랴의 외침에 희망을 건다.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나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4장6절-
우리나라와는 문화적인 색채가 너무 다르다. 음식도, 의식구조도, 발전상황도, 국가운영체제도, 천연자원이나 역사의식도 생활양식 전반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 오히려 이들은 영국이나 중동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았고 또 부자들은 유럽풍의 생활모습을 지니고 살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슬기는 어떤 환경과, 어떤 문화, 어떤 상황에서도 돌파구를 마련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 이것에다가 하나님의 지혜가와 능력이 함께 한다면 인도의 고질적인 높은 장벽도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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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누군가는 인도를 더 깊이 연구하고 분석하여 그들에게 접근하여 파고들 수 있는 고귀한 전략을 펼쳐가야 하리라고 본다. 비록 제 3지대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가서 예수정신에 입각하여 함께 부딪히고 살게 되면 그들의 신앙적 DNA도 바꿔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적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도를 사랑하고 인도를 포용하고 인도를 품고 기도하자.
인도인을 파고드는 지혜 있는 자가 누굴까!
이렇게 아직도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고 있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선사한다.
인도로 가는 길은 천천히 구르고 있는 수레바퀴 같아서 멀고 요연하게 보이지만 언젠가는 역사의 종착역에 도착할 때가 올 것이다.
"사랑 앞에 무너지게 하라" -이송로-
2019.11.10.
이송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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