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세이
지성과 감성을 겸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란 참 단순하다. 한 예로써 머리가 영리하면 지성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이제 나이가 들다보니 그런 얄팍한 생각에 머물렀던 지난날들이 참 바보스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면 어떤 사람이 지성인란 말인가?
그냥 영리해서 공부만 잘 하면 착한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 천만 위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현대인들 알랴!
버릇없고 예절도 없는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들 이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유익이 뭘까 생각해 본다.
만일 지식과 정보를 잘 알고 자신을 도덕적 기반 위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까!
부모들은 자녀가 영리한 짓을 하면, 그것이 굉장히 대견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나도 한 때 그러했다고 자인하고 싶다.
이런 단세포적인 생각이 멀리 보면 우리 사회의 악순환의 연속성을 갖게 하는 곳이 되는 건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부모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요소들이 되고 말았다.
오늘 우리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걸 지적하면서도 인간의 속성은 자녀 성적 올리기에 올인하고 있는 분우기로 갔고 앞으로 또 그렇게 될 것 같다.
도덕성이 갖추어지는 것이 지성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도덕적인 인간이라야 인간답게 살고 사회에 기여도가 높아지고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인간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돈과 인생으로 치닫는 사회에서는 우선 고학력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 있다.
그러나 도덕적 인간이란 성인이 된 다음에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때부터 옳고 그름의 문제를 분별하게 하는 것과 예절을 지키고 양심을 속이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데서 되어지는 문제이다.
야성을 갖게 하라.
야성을 갖지 못한 인간은 어려운 환경을 뚫지 못한다. 야성이란 짐승같은 성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뛰어놀며 스스로 익혀가는 삶의 지혜를 가리키는 낱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나름대로 야성을 존중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야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야성은 모험심과 맞닿는 좋은 친구이다. 이 맛을 아는 사람들은 세상 어디에 떨어뜨려 놔도 자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책상 위에서 열 시간보다 산속에서의 한 시간의 모험이 한 개인을 강하게 만든다. 산속에서 뱀을 만나고 때로는 멧돼지같은 짐승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위험한 요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는 나이가 40세가 될 때까지 그러한 삶을 좋아했다.
그래서 장수에 살 때에는 남덕유산 전체를 길도 없는 곳을 뚫고 다니며 나물도 체취하고 또 신기한 야생화도 ...
그러면서 산속에서의 사색은 더 아름답고 풍부한 정서를 더해주기도 했다. 홀로이면 더 좋다. 이유는, 홀로일 때, 나의 인생사,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 등을 떠올리며 산속을 누비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영과 물고기 잡는 것이 나의 최고의 특기였다. 지금은 물고기가 없어서 못 잡지만, 어렸을 때에는 물이 있는 곳에 어디가 가나 물고기가 바글바글했다.
그래서 나는 족대나 망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아올렸다. 나의 기술은 과히 천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론 내 스스로가 놀라곤 했다. “물고기가 나를 보면 도망을 가지 않는다!” 이것도 신화일까?
나의 기술은 대단한 것이었다. 온 돌리 사람들도 나에게 한 별명을 붙여주었다. “송로는 ‘초새’알께!” 초새란 ‘물총새’를 가리킨다. 그 물총새는 냇가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물고기를 보면 물에 꼴아박아 물고기를 밥아먹는 새이다. 영락없이 내가 그런 사람이다. 아니 나는 물고기 소설을 쓸만큼 불고기 잡는 요령에 해박한 지식을 습득했다.
250마리의 메기...돌로 도망가는 메기 때려잡기, 물고기를 잡다가 뱀을 잡던 얘기. 빠가가 쏴도 놓지 않는 얘기, 겨울에 만수동 저수지에서 ...돌아오다가 손을 녹이며 울었던...자라집던 얘기. 최고의 자연산 장어잡아 구어먹었던 얘기
개구리와 옆집 형 얘기....
학동 뒤산에 자러 다니며 쥐잡던 얘기....
밤에 감자, 포도, 복숭아 서리했던 얘기....
한 눈 파는 인생
자기는 잘났다고 떠들며, 자기 과신주의에 빠져있는 현실주의적 인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온다.
과연 무엇이 정의이며 옳은 것일까? 해답이 없는 게 아니고 잘못된 이념에 노출되어 인간의 본질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20대 젊은이들 중 41%만이 자녀가 있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나는 이런 현실 앞에서 어쩌다가 이렇게 병적인 우리 사회가 되어버렸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후손을 남겨야 함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보다 큰 뜻을 저버리고 현실주의에 매다리는 근시안적인 젊은이들의 사고가 문제라는 생각이다.
난 다산주의자라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르게, 공정하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모순된 현실과 싸우면서 선한 이치에 도달해보려는 시도가 아름다운 것이어늘 어찌하여 그것을 피해가려하며 그냥 굴러 떨어지는 호박만 기대하는가?
우리는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살아왔다. 나는 그것을 원망해 본 적이 없다. 왜? 당연히 그런 것들이 인생 앞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진 풍파를 헤쳐나간 후에 따라오는 보람은 얼마나 큰지모른다. 그런데 그런 스릴을 팽개치고 꽃방석에만 앉으려는 현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젊은이들이여, 인생의 과업은 자식농사이거늘 왜 한 눈 팔고 세상을 사려하는가? 현실이 어렵다고 느껴져도 그것을 두려워말자.
흔적을 남기고 싶은 인간
세상에 왔다 가면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인간의 한 욕망인 것 같다.
나쁜 추억을 떠올리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떠올리기 싫은 추억은 지워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 인생의 앞날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베트남 여성이 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7년을 공부하고 9년 전에 돌아왔다.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프랑스에서 대학과정을 보냈기 때문에 프랑스화 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이미 베트남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베트남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나는 프랑스로 떠나기 전의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전혀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럴까?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몇 번 들었던 얘기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런 사람을 만나보긴 처음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이 생활을 꿰맞추기 위해서 가족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살아온 과거가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 그 얘기를 듣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떠올릴 수 없어서 참 좋겠다.”
그런데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은 기억 장치 속에 있는 소프트웨어가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추억, 좋은 감정만은 기억되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내 누이 진실이가 있다. 진실이는 어렸을 때 참 예뻤다. 그래서 아버지는 너무 예뻐서 “진꿍 진꿍”하시면서 안아주시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앞집에 있는 개에게 다리를 물렸다. 내가 목겼했을 때, 이미 살점이 달아나고 하얗게 뼈가 보였다.
요즘 같아서는 난리가 났을 텐데, 그 때는 보상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병원에도 안 가고 된장을 발랐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흔적은 지금 나이가 48세가 되었는데도 그대로 남아 있다. 처녀시절에 예쁜 다리 한 번 내놓고 다니고 싶은 게 아가씨들의 마음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지워버리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가지고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이런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 인류의 가슴 속에 남아야 할 흔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의 흔적이다.
그것은 우리는 상흔이라고 부를 수 있다. 5년 전 패션(The Passion)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 마음 속에 흐르는 눈물이 있었다.
바울은 예수의 진실을 확연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예수를 핍박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로 그 인생의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전한 복음을 왜곡시키는 자들을 보면서, 나아가서 그의 전한 복음의 진실에서 유혹받고 흔들리는 자들을 보면서 이 마디를 남겼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라디아서 6장 17절).
때론 나도 바울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내 몸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서 죄송했다.
하지만 항상 “이제라도 늦지 않다.”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다.
이제 나는 바울처럼 직접적으로 예수의 삶과 고통을 몸에 지니지 못한다 하지라도 예수를 위한 흔적을 가지고 싶어서 외국 땅을 밟았다.
그 곳에서 흔적을 남기고 싶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내 인생의 일부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바라기는 내 몸 속에 ‘예수의 상흔’이 남기를 희망해 본다.
우리 인생이란 상처로만 얼룩진 아니다. 내가 보람 있고 유익한 일을 찾아서 그것을 했을 때는 좋은 기념비처럼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희생이 따른다. 물질과 시간, 그리고 몸의 고생과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한다. 그렇지 않고 맺혀지는 열매란 없다.
몸에 벤 생활인 걸 뭐
이것은 습관의 문제이다. 나는 외국 생황을 벌써 12년째 하고 있다. 적은 세월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긴 세월도 아니다.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항상 마음은 고향에 있다.
그러다고 내가 외국인된 것도 아니다. 어딜 가나 저들은 나를 자국민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그들이 입은 옷을 입는다고 해서 내가 그 민독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한국이다. 나는 아직도 한국요리를 친히 만들어서 먹는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나는 외국에 살아도 역시 한국에서 12년 동안 베인 습관과 문화, 그리고 스이프 스타일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배워서 그들과 함께 지낸다고 해서 내 발음의 색깔은 한국인 스타일을 면치 못한다. 내가 아무리 그들과 함께 딩굴며 동질성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저들이 나를 자국민으로 생각해 주는 건 아니다.
역시 나는 한국인이다. 가령 베트남 속에 몸을 담고 그 현장을 뛰어다닐지라도 나는 한국인이다. 이것은 내 의식과 골수에 깊이 박혔있는 진실한 자아이다.
다만 나는 베트남사람들의 눈높이를 의식해서 거기에 맞춰서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만큼 몸에 벤 것은 쉽게 바꿀 수 없다. 어쩜 몸에 벤 것이 더 좋은 것들이 많다. 다만 몸에 벤 나쁜 생활 습관이 문제인 것이다.
담배를 피우던 사람은 쉽게 담배를 귾지 못한다. 3년 안에 다시 피우면 다시 흡연자가 된다. 그만큼 몸에 벤 습관은 무섭기도 하다.
나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댄 적이 없다. 이런 말을 했더니 “정말 그러냐?”고 다들 놀란다.
아마 평생 한 번도 그렇게 안 해본 남자라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나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활에 근접하지 못해봤기 때문에 유혹을 느껴보지도 못 했다.
나는 화투를 쳐 본 경험이 있다. 그때가 열여섯 살이었다. 나는 석 달간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화투놀이를 했다.
동전 따먹기였지만, 이것이 나도 모르게 무서운 습관이 되고 있었다. 몸에 벤 습관이 정말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물론 동네 형들에게 배운 화투놀이였지만,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두려움마저 생겼다. 그만큼 마약 같은 것이 카지노, 카드놀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일 그 시기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 놀음으로 병들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예수님을 안 뒤로 나는 미련도 두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났다.
몸에 벤 좋은 생활 습관도 있겠지만 몸에 베이면 안 되는 무서운 습관들도 있다.
나는 지금 몸에 벤 생활로 인해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것이 나의 평생의 질 좋은 인생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 좋은 습관이 되었다.
좋은 습관이 몸에 베이면 영웅이 될 수 있지만 나쁜 습관이 몸에 베이면 퍠인이 죌 수도 있다.
그러나 폐인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 것 역시 죽기보다 더 힘든 과정이 있어야 한다. 온 가족의 협력과 도움으로, 아니면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이도 있다.
어쨋든 좋은 습관이 몸에 베이도록 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가족 사회를 위해서 모두 좋은 것이다
내가 술과 담배를 안 하는 것을 지켜 온 결과는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큰 효과가 있음을 본다.
속이 없어야 안 늙는다
옛 어른들의 말이 옳다. 이런 말은 산 경험을 획득한 지혜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너무 속 든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뜻일까?
철든면 빨리 족는다는 말도 있다.
나는 20대들 속에서 나의 나이를 잊어버릴 때가 많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체질이고 20대들에게 딱 어울리는 나의 행동과 포즈가 제격인 것 같다.
그래서 나의 하는 일이 20대 사역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펜을 놓으면 밖에서 20대 팬들을 만나는 것이 나의 일과이다. 그만큼 나는 철이 안 들었다.
그러나 속들기로 말하면 나는 열일곱 살에 이미 속이 꽉 찼다. 그래서 나는 왠만한 일에는 싸우고 타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이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아내의 말도 듣지 않는다.
속 있는 남편이라면 어디 그럴 수가 있겠는가!
안 늙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현대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운동도 좋고 식이요법도 좋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낙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 속이 없는듯하면서도 고상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연구해봐야 한다.
내가 바로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인정이다
착함 뒤에는 어리숙함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외국 생활을 하면서 특히 그 민족을 챙긴다. 교통비를 주기도 하고, 밥을 사먹이기도 하고 때러는 장학금을 준다.
나에게 돈이 많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정말 내 생활이 쪼들린다. 특별히 어느 단체가 밀어줘서 나온 것도 아닌데, 한 달 한 달 하루하루가 늘 돈 걱정일 대가 많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한다.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은 악의가 없고 착해야 한다. 착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을 믿는다.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어갈 때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로 평가로 평가될 것이다.
한국 사람은 착하다. 이 말 한 마디가 항상 아름답게 들린다.
한국 사람은 선을 베풀기를 좋아한다. 이런 예들은 세계 각 곳에 사는 한국인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사업을 벌이거나 기업을 하는 경우에 주변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생각을 먼저 갖는 것이 한국인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가슴은 따뜻하다. 그 따뜻한 가슴에 자연스럽게 스며 든 아름다운 마음을 토해내는 것이 한국인의 정신이다.
그래서 나는 실용주의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중도 실용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당선이 되었다.
나는 그 때 굉장히 씁쓸함을 느꼈다. 결국 그는 부자정책이라는 것을 써서 국민들에게 욕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그렇게 했을 때 한국 기독교 전체에 먹칠을 했다.
미국이 실용주의 노선을 밟으면서부터 미국의 위상은 추락되기 시작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청도도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더라면 오늘날 세계 민족들과의 갈등이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책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의 위상이 높은 것은 그나마 조상들이 물려줬던 청도도 정신이 근간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착한 민족성을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세계인들에게 아름다운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착함 뒤에는 어리숙함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은 자칫 다른 사람에게 이용을 당한다. 착한 하나로 돈을 꾸어줬다가 못 받는 것도 일쑤다. 그런데 어떤 때는 착한 마음 하나로 보증을 서 줬다가 큰 낭패를 보기도 한다. 속이는 사람이 정말 나쁘다. 그러나 속지 않는 것도 지혜다. 그런데 어디 그렇게만 되는가!
나는 내가 생각해 봐도 착한 본성이 많다. 그래서 돈 약속, 시간 약속에 철저하다. 그런데 시간 안 지키고 돈 제 때 안 갚는 사람을 볼 때 짜증을 느낄 때가 많다.
다시는 저 사람과 상대를 안 한다고 했다가도 또 다름에 믿어주는 형이다. 그러나 역시 믿는 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만큼 나에게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다.
착한 백일홍이라는 드라마를 실감나게 본 적이 있다. 백일홍이라는 여성은 정말 착하다. 당장 고소해서 감방에 보내도 시원찮은 자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걸 보면 정말 착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그런 일이 한 두 번도 아니고 수십 차례 악덕 기업가와 장남기라는 자에게 당하고도 그것을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선량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어쩔 땐, 백일홍이라는 여성이 답답하게 보이고 짜증스러울 때도 있다." 왜 그렇게 당하고만 살지!" 하고 얄미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착해서 늘 당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럴 땐 좀 강하게 좀 나가라 하고 충고를 하고 싶을 때가 있을 정도다.
이 드라마에서 보는 것은 착함의 이면에는 그대도 악행하는 자보다 어리석게 보이는 착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이는 자기들끼리 의리있고 착한 사람들인 것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안무치라는 말이 있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부재자 투표를 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머리 없는 사람에게는 표를 안 준다.
그래서 문재인을 찍었다. 그런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한 마디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된 거다. 그게 너무 싫어서 내 마음 속에서 대통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독살스런 여자라는 생각까지 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찍은 자들은 기뻐서 날뛰고 좋아했다.
그러나 인 것은 인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 아닌가!
필리핀 데려온 내 수양 아들, 딸 부부가 박근혜가 여자인데 한국에서 여자대통령이 나왔다고 막무간에 좋아했다.
내가 동의할 수 없어서 "너희들은 모르니까 그렇지! 그렇지만 그녀는 부정선거 해서 대통령이 되었고 독재자의 딸이야! 두고 봐, 그녀는 대통령 임기 끝까지 채우기 어려울 거야!"
사람은 인정이 있고 따뜻한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대해 줄 줄 아는 양심과 기본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사회 분위기가 좋아지고 서로 인정있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양심 폐기처분 하고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고 다른 사람 속여서 무엇을 차지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그만큼 어두운 사회가 되고 약자나 가난한 자들이 힘들게 살 수밖에 업는 분위기로 치닫는 것이다.
도전정신을 키워라
인간에게 부여된 속성 가운데 하나는 도전성이다. 이건 신학적인 용어에도 없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언어에 대해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 인간에 모험정신과 더불어 도전성이 부여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도 하다.
이간은 오늘날 이것을 과학기술 혁신에 적용했다. 그래서 원터치 방식의 스마트폰, 그리고 자동차의 풀 오션 기능까지 만들어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런 것들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신상품 기술이겠는가!
누군가는 무한 도전이라는 말로 모든 가능성에 도전했다. 대기업들은 머리 좋은 사람들을 공용해서 이런 도전들을 시도해서 성공하여 글로벌시대의 리더 그룹을 이루었다.
인간은 무한 도전을 시도할만한 지능을 보유하고 있다. 까치가 집을 지을 재로가 없어서 철사도막을 물어다가 집을 지었다는 말을 들으면 참 신기하다고 느껴졌다.
인간 외의 다른 동물들에게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결국 이 정도의 변화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진화론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진화한 게 아니고, 짐승도 진화한 게 아니다. 가령 천 년 전의 인간이 여기에 온다해도 어릴 때부터 오늘날의 학습을 받는다면, 현대문화에 100% 적응한다고 믿는다.
우리 인간은 다시 원시사회로 돌아간다 해도 지는 자체가 떨어질 이유가 없는 것이며, 못 살아 갈 이유도 없다.
단지 인간에게 부여되지 않는 것들의 몇 가지 기능 때문에 제한을 받고 사는 것이지만, 인간의 도전성에는 인공위성을 띄워 지상의 모든 정보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편리를 도모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 오기까지는 수많은 괴학적 시도들과 희생과 용기와 투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6년 첼린지호를 발사했을 때, 공중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큰 상처들을 겪으면서 시도되는 것들이 오늘의 과학의 산물이며, 또한 그 혜택이다.
그러나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 이젠 생명에로의 도전의 문이 열렸다. 그것은 줄기세포의 연구에 따른 생명 산업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닥쳐온 큰 불행을 막아줄 수도 있는 중요한 산업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든지 윤리적인 허점을 들어낼 수 있는 산업이기 때문에 가장 두려워한다.
이런 도전이 윤리성까지 지혜롭게 극복해 나갈 때, 인간들은 그 혜택과 더불어 복지를 누리게 될 것이다.
만일 인간이 그 도전성을 잘못 활용한다면 이것으로 인한 재앙은 아무도 예측할 수 무서운 일로 치닫을 수도 있다. 원자력발전소 산업이 한꺼번에 전력수효 증가를 감당해 나가는 엄청난 기술혁신 산업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대지진으로 쓰나미가 강타했을 때,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에서 폭발하는 엄청난 일을 보면서 지구촌은 바싹 긴장이 되었었다.
이 때 우리는 생각했다. 인간이 도전해서 이루어 놓은 이런 혁신 상품이 오히려 지구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성경에 나온 바벨탑 얘기는 먼 옛날의 얘기가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무한도전의 포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지식의 한계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휴머니즘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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