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옵소서!

지금 우리의 복이 어디 있는가?

좁은길을 걸으며 2007. 9. 23. 10:05

 

 

 

                      우리의 복이 어디 있는가? 2007/09/13/주일

                                                  (갈라디아서4장12-20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제 명절이 가까워 옵니다. 추석 명절이 되어도 우리는 이 자리의 소중함을 알기에 당연히 나왔고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인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자기 교회의 성도들을 무척 사랑합니다. 그것은 목사 자신이 그렇게 의도적인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모와 같은 심정을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바울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는 매우 끈끈했습니다. “형제들아,”(12절), “나의 자녀들아.”(19절)라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 관계 속에서 목회자와 성도는 하나임을 확인하며 지내왔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같이 되기를 구한다!”(12절).

이 말씀 속에서 서로 섬겨주고 아껴주는 관계 속에서 끈끈한 영적인 교제를 이루어 왔음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9년을 배웠다면 나를 닮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닮지 않았다면 엉덩이에 뿔난 염소나 마찬가지의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초심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간혹 초심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때를 생각해 보니까....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바울을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와 나중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맨 처음 갈라디아에 갔을 때, 좀 시원찮게 생긴 모습으로 그들을 접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만도 한데 그들은 바울을 환영했습니다. 그것은 외모가 아니라,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복음의 진수 때문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더 확연히 알 수가 있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었다’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얼른 느낄 수 있는 것은 육체적으로 시력적으로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 영향으로 눈이 나빠진 것은 물론 합병증 증세가 왔고 그런 이유로 간질증세가 있어서 몸이 말할 수 없이 허약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복음과 그의 인격과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천사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같이’ 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니 만큼 그들은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행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변질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 지역을 떠나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때 그들 속에 침투한 율법주의 이단들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야 말았습니다.

성도들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향해 무능하게 대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매서운 채찍을 들고 자녀들을 야단하듯이 그들에게 책망을 가했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니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절).

바울이 시력이 약해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눈까지도 빼어주고 싶어 했던 교인들의 마음’이 변질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을 그렇게 사랑하고 따랐던 성도들이 영혼의 사냥꾼을 만나 마음들이 흔들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서광인들이여, 여러분의 복이 지금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착하다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의 치명적인 허점은 이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분별력’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착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악랄하면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교회에 큰 해를 끼치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이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볼 때 지금 우리 서광교회 성도님들은 매우 착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게 아쉬운 것은 ‘영적 분별력’의 문제입니다.

어느 날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동강령을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한 사람이 동시에 '뱀' '비둘기'같은 성품을 가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두 성품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비둘기 같이 온순한 마음만 가졌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뱀의 지성과 비둘기의 온유한 마음, 즉 차가운 지성과 따뜻한 가슴을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함이라”(16,17절).

바울 사도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열심’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한 때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가 한 순간에 돌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사람이 열심히 뜨거운 것은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 그 열정은 바른 진리(지성)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열심이라 할지라도 ‘방향성’, 즉 ‘목표’가 뚜렷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복음이 아닌 것에 생명을 거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율법주의 이단들은 가만히 들어와서 복음의 색깔을 흐려놓고 거기에 열심을 부축였습니다.

이런 자들의 대부분은 성도들을 ‘이간시켜 놓는 일’을 합니다. 아주 지능적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의 수법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의 내용이 있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누구)을 위한 열심이니?”

 

18절을 보면 바른 열심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유익과 화평을 큰 기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히 사라져버린 갈라디아교회를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바울은 곤족한 한 마디를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절).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보라볼 때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바울은 다시 그들을 참된 복음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서광교회를 사랑합니다. 바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해산의 고통’을 겪었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왜 제가 복음을 줄기차게 강조하면서 가르쳐 온지를 아십니까?

고대에 있어서 여성들의 해산의 고통이라는 것은 ‘죽음의 고통’과도 같은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고통인가요?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 닮은 사람’, 즉 ‘참된 복음의 사람’을 길러내고 양육하기가 얼마나 힘드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좋은 말 듣고 항상 오냐오냐 하는 말만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려면 때로는 호되게 야단을 쳐서라도 바르게 가르쳐야 할 책무를 가진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의 아픔이 훨씬 더 컸던 것이다. ‘해산의 수고’가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울은 성도들에게 ‘복음 진리’의 신앙으로 바르게 세워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서광인들은 율법주의적인 신앙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신비주의나 은사주의의 신앙관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금나오라 뚝딱하면 금이 나올 것 같은 기복주의 신앙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적당히 짝하고 살아가는 세속주의 신앙관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주의 신앙관을 가져고 살아야 합니다.

 

이 신앙일 때 두고두고 생각을 해봐도 보람과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처음 믿을 때 복음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지금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과 전 세계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칭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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