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의 장애물-나 2007/08/12/주일
(고린도전서9장24-27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우리 인생길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고 장애의 요인들이 있습니다. 발을 잘못 딛게 되면 발목이 잘려 나가버린다는 발목지뢰와도 같은 장애물들이 우리 인생의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은 거의 언제든지 내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유혹들은 쉽게 떨쳐버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 원인을 내부에서 찾지 않고 항상 밖에서 찾습니다.
그 까닭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연속적인 실패 위에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 신자 모두가 믿음의 경주자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코치가 아니라 경주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감독이나 코치 역할만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경꾼으로 전락해 있든지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 믿고 거듭난 순간 믿음의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선수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경주는 그 본질에 있어서 세상 경기와는 다르지만, 성격적으로는 공통적인 점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주의 목표는 이기는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선수는 최대의 목표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상은 출전한 사람 모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 한 사람에게 최고의 영예가 주어집니다.
오늘 크리스챤들에게 당부합니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24절).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을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최선을 보시고 1등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세상 경기와 믿음의 경기와의 차이입니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상대 평가제이지만, 하나님은 항상 절대평가를 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25절).
중요한 것은 절제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절제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바로 ‘자기와의 싸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 고린도사람들은 3년마다 열리는 고린도지협(Isthmian) 경기가 있었습니다. 이 경기는 올림픽 경기보다 더 인기가 높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경기에 출전하려면 ‘모든 일에 절제’가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가고 싶은데 다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나고, 하고 싶은 다 하고서는 결코 우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절).
이 땅에서 받는 면류관, 즉 명예는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알고 보면 ‘썩을 면류관’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도 악전고투 하는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바라보는 우리 신자들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게 만듭니다.
바울은 고린도지협 경기를 생각하면서 바로 자신이 복음 전도를 하고 있는 모습에다가 적용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26절).
바울은 자신이 하는 일과 가는 길의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 먼저이고 열심은 그 다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잘못된 일에 빠져서 열정을 퍼붓는 사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보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내가 열심히 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해 뛰느냐 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이냐 입니다.
그런데 막연한 열심을 가지고 헛된 일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바울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았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자신이 달려야 할 방향을 알고 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권투 선수는 자신의 주먹을 어떤 방향으로 날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열정을 쏟아 붓고 사력을 다한다면 우승의 영광을 안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여기에 내 인생 전부를 걸어도 좋습니다.
정말 구원의 확신이 있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에 받을 상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저 안일한 자세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도 한 가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점에 있어서 아주 조심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
기껏 좋은 일 하고 내가 버림을 당한다면이라는 전제 아래서 그는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많은 영혼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목회자로 헌신하고 선교사까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마음은 늘 허전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어느 선교대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려고 했습니다.
순간 어느 분이 가까이 와서 “아무게 목사님, 반갑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목사님께 은혜를 받고 이렇게 선교사된 아무개입니다. 나는 목사님의 은혜를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큰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간증을 듣는 동안 그 목사님은 진심으로 회개하게 되었고 성령의 새로운 임재를 강렬하게 체험하게 된 후로 지난 날의 모든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한바터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을 뻔 했습니다.
왜 바울 사도마저도 이런 고민을 했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도 목회를 하면서 이 말씀 앞에 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껏 은혜를 끼쳐놓고 나는 얼마든지 나 자신의 연약함에 빠져서 죄의 종이 되어 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에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 하면서 최대의 적은 항상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치다’는 말은 ‘유스타시우스’라는 말인데, ‘눈 주변을 때리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악한 정욕과도 싸워야 했고, 명예욕, 물질욕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그 언제라도 청렴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혹사 시키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의 종이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도 할 짓 다 하고 안갈 데 갈 데 다 다니면서 과연 면류관을 받아쓸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나 자신에게 대해서는 엄격하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적이요, 장애물은 제 삼자가 아닙니다. 바로 ‘나’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에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복종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는 ’둘라고고‘입니다. 이 말은 ’노예상태로 이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욱 더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다. “나는 영원한 주님의 종입니다!” 온전히 옛사람은 죽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면류관을 받을 자격에서 탈락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힘이 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로다”(시편119:165).
우리는 상 받기 위해서 수도승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가르침(복음)을 내 자신부터 철저히 따르고 늘 성령께 의지해서 사는 모습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상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각 후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걸어 온 나의 인생길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나를 쳐서 복종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롬6:11-13에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義)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 시각 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철저하게 복종시켜 그분께 온전히 드려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오직 성령께 우리 자신을 의탁합시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내 안에 적이 무엇인지, 무엇이 주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인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내가 만든 것은 내가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 해도 성령께서 나 안에 있는 장애물을 치워주실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회개하고 순종을 드릴 때에 장애물은 저절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말씀하옵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우리의 복이 어디 있는가? (0) | 2007.09.23 |
---|---|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사람 (0) | 2007.08.26 |
메타세콰이어길을 달리다 (0) | 2007.08.05 |
바벨탑 이야기 (0) | 2007.08.05 |
서로에게 유익한 말을 하라 (0) | 2007.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