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 2006/06/04/주일/
성령강림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 목사
오늘의 교회의 생일이라고까지 불리는 역사적인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이란 예수님께서 지상에 33년 동안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미리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보혜사 성령’(요14:26)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10일 동안 간절히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강림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임재하심은 또 하나의 새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날은 구약에서부터 지켜오던 오순절(맥추절;펜타코스트)날이었습니다. 바로 이 날은 오늘과 같은 주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날에 임재하신 성령께서는 성도들 각자에게 은혜와 은사를 부어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물리적인 불이 아닌 영적인 불을 받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서 모두가 방언을 했습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서 입이 열리게 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날에 부어주신 성령은 각자 각자에게 임하셔서 그들 안에 내주(dwelling)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와는 달리 교회와 성도들 안에 거하시면서 활동하시게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특별히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이미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은사'라는 말을 뜻하는 「카리스마」는 카리조마이(선물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恩惠의 膳物(은혜의 선물)」을 줄여 「恩賜(은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가 어떤 것들인지를 알고 그 은사를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잘 사용할 수 있을 때 칭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잘 설명을 하고 있는 성경이 두 군데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입니다.
우리는 이 두 곳을 잘 종합해서 정의를 바르게 내릴 뿐만 아니라, 이 은사를 규모있게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보수교단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나 무관심으로 치닫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파 같은 곳에서 너무나 광신적으로 날뛰고, 이상한 몸짓을 하고, 심지어는 입신을 한다, 능력을 행한다, 영서를 쓴다, 투시를 한다는 등의 빗나간 행동들에 혐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중요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령받은 것으로 다 된 것이라 아니라, 늘 성령의 새로운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절).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활용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건강한 교회, 튼튼한 교회, 건실한 교회로 세워져가고 우리의 신앙 인격도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 잘 활용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리로 나가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분의 신앙인격도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일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방언한다고 믿음이 좋다고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맺을 줄 아는 곳으로 가는 사람은 분명히 신앙인격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능적인 부분을 가지고 자랑할 것이라 아니라, 열매가 있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믿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는 중요합니다. 내가 그런 은사를 안 받았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은사를 무조건 무시해서도 안 되고, 방언의 은사의 경우 내가 못 받았다고 해서 이상한 짓 한다고 오해를 해서도 안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상당한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대낮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행2:15)고 하면서 이런 일이 나타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시면 그 은사는 여러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은 9가지, 또는 17가지로 나타나지만 엄격하게 얘기해서 일만 가지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우리에게 나눠주신 분은 오직 한 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은사를 가지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나아가서는 이 사회에 유익을 끼쳐야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롬12:6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는 한 달란트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게으르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25:26)라고 책망을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은 얼마나 많은 분량의 은사를 땅에 묻어 둔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큰 교회 가서 예배만 드리고 오는 ‘악하고 게으른 종’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신앙생활의 태도가 아닙니다.
롬마서 12장을 보면 먼저 우리 자신(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말씀한 후 겸손한 자세로 ‘믿음의 분량을 따라 각자에게 나눠주신 은사’를 가지고 성실하게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롬12:4).
그렇습니다. 손이 하는 역할, 발이 하는 역할이 다르고, 입과 눈과 코가 하는 일이 다르고, 같은 손 안에서도 엄지손가락이 하는 일이 다르고 새끼손가락이 하는 일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우리 모두는 한 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지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너는 쓸 데 없다!”(고전12:21)할 지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전12:22)고 했습니다.
우리 옆 사람을 향해서 “당신은 서광교회에서 아주아주 요긴한 분이십니다!”라고 하십시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지체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들도 함께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따로따로의 존재가 아닙니다. 신경계를 통해서 사지백체가 연결되어 있는 한 조직체이듯이 우리는 모두 ‘연결된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매우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되어, 성령으로 하나되어 각자의 역할들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역할들을 잘 감당하라고 “성령을 통하여”(고전12:8) 은사를 주시고 직분과 직임을 주셨습니다.
우리 서광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목사 한 사람이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제 각각의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피상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옆 사람에게 “당신이 서광교회를 위해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보십시오.
얼른 눈에 띠는 일, 또는 얼른 생각나는 일이 당신의 은사입니다. 잘 이해가 안 가시죠? 좀 더 들어보십시오.
구두 수선하는 사람의 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만 쳐다봅니다. 미장원 하는 사람은 뭐~만 쳐다보겠습니까?
음악에 소질이 있는 분에게는 찬양대의 노래가 남달리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음악에 헌신을 하면 아주 잘할 수 있습니다. (고구마 물주는 것....).
바로 관심분야가 그분의 은사일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안내와 새신자를 관리할 일꾼이 아쉽습니다.
그러니 만큼 눈에 띠면 “내가 하자!” “내가 치우자!” “내가 섬기자!” “내 몫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은사로 헌신하십시오. 그 은사는 오늘 본문에 언급된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다 은사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좇아서 하자!”(고전14:1)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할지라도 ‘자발적으로’하고, ‘기쁨으로’하고, ‘사랑으로’ 해야만 합니다. 기껏 일하면서 남을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하면 상급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하는 일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바꾸어서 눈에 확 띠는 일만 소중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도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며, 함께 협력하면서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성도들 모두가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열심히 일합시다. 어떤 재능도 안 쓰면 무익하게 되고 맙니다. 쓰면 쓸수록 더 좋은 은사가 됩니다. 불평불만일랑 다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품어주고 감싸주면서 일하다면 가장 좋은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어갈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