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얘기

불교가 진리인가?

좁은길을 걸으며 2010. 1. 31. 14:54

 

 

 

 

 

불교는 진리인가?

 

사도행전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라.

 

물론 불교도들은 불교가 진리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비불교도들이나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당연히 그건 아니겠지요. 그러나 주관적인 입장보다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불교가 왜 진리가 될 수 없는지를 밝혀야 되는 게 아닐까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리는 사람의 추론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그 어떤 고안물이거나, 확신 때문에 진리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진리란 100%의 순금과 같아서 처음부터 진리 그 자체일 뿐입니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먼저 고타마 싯다르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싯다르타는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있는 카필라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브라아만의 한 귀족으로 자라다가 어느 날 바깥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기장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흘러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그는 밖으로 나와 세속을 바라보면서 ‘고(苦)’라는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길거리를 누비면서 다니는 사람들, 특히 걸인들을 보면서 사는 게 고생이며, 또 늙은이와 병든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날마다 죽어 나가는 상여를 보게 되면서부터 이것들이 모두 고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가 보는 고(苦)라는 것이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는 명제 앞에 스스로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가 있었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29세가 되던 어느 날 인간의 고(苦)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실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출가(出家)'라고 부르는데 그는 출가하여 많은 스승들을 찾아다녔으나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사색을 하다가 나름대로의 깨우침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이 욕심 때문에 온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욕심을 극복하는 것이 인간들이 풀어야 할 큰 과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현재까지도 불교인들이 좋아하는 글자 중 하나가 깨달음에 해당하는 '각覺'일 것입니다.

원불교에서도 이 용어를 좋아하는데 특히 대종사 박중빈이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을 기반으로 '대각大覺'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고뇌를 벗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귿르은 깊은 사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열반(涅槃)’,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解脫, moksha)’이라고 하고, 열반을 다른 말로는 ‘니르바나(Nirvana)’, 그리고 해탈을 모크샤(解脫, moksha)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세속에 있는 한 많은 욕심이 저절로 들어오는데 이것을 벗어버리는 순간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도달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아지경이란 "정신이 한곳에 통일되어 나(我)를 잊고 있는 경지(境地)"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무의식(無意識)의

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불교의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불자들은 '수행의 길'을 간다고 말합니다.

많은 불자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 열반의 세계로 가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승려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욕심과 고통을 벗어버리고 일종의 '빈마음의 상태'로 살고 싶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한 경전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산스크리트어: महापरिनिर्वाणसूत्र Mahaaparinibbaana Sutta)'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다그러므로 단 한순간도 같은 상태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태어난 것은 다시 소멸되고 소멸된 것은 이윽고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이 생성과 소멸의 이원적인 차원을 넘어서게 되면 거기 영원한 법열의 세계인니르바나(열반)가 있다. 즉, 니르바나로 가는 길이 있다."

위키사전에서는 대반 열반경에서 말하는 핵심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1. 부처 본체(本體)로서의 법신(法身: 진리 자체)은 상주불변(常住不變)이다.
  2. 불교 본래의 무아(無我)의 입장과는 아주 대조적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열반의 경지인 것으로 단적으로 표현한다.
  3. 일체중생(一切衆生), 즉 생명을 받은 모든 것에는 부처의 본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극악불신(極惡不信)의 한 전체(闡提)라도 성불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윤회설(輪廻說)을 주장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열반에 이르기 전까지 생과 사는 계속 반복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산스크리트 saṃsāra’는 ‘흐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윤회라는 것은 싯다르타가 주장한 설이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만 불교의 흐름 속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인류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고마타 석가모니, 즉 석가여래는 '인간의 내세'에 대한 문제를 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그가 고민햇던 것은 '감정이라는 악마'와 싸워 이기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도 최고(最古)의 문헌인 리그베다(Rigveda)가 인간 사후의 운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여기서의 관심이 이후 점차 윤회설로 발전해갔습니다. 여기서 영혼불멸설이 생겨나고 인간이 자기 행위에 따라 업보(業報)를 받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 석가모니가 추구했던 '열반'과는 점점 멀어지는 형태에서 '업보'로 바뀌어갓던 것입니다.

 

아무튼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에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인즉, 고타마(Gotama)는 ‘매우 좋은 소’, 싯다르타(Siddhatha)는 ‘만사가 이뤄지다’는 뜻입니다. . 소원성취 출가 후에는 석가모니(샤카무니)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새로운 이름 뜻은 출신 성분과 관련하여 ‘석가’는 ‘사까족(Sakya)’을 한자 발음한 것이고, 모니도 ‘성자(聖子)를 의미하는 ’Muni’를 한역한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깨달음'으로 만족을 얻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자아가 '무아'에 이르는 것에서 가장 큰 희락을 찾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이 말을 전하고 꼭 싶습니다.

불교는 엄격하게 말해서 종교가 아닙니다. 원래 종교가 되려면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죽어서 가는 곳, 즉 내세의 문제가 정확히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원래 내세가 없습니다. 단지 ‘자기 극기’라는 것으로 모든 것이 귀결됩니다.

그러니 만큼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입니다.

 

불교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불교의 교리는 ‘무아(無我)’에 도달하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불교도 나름대로 많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단 하나 어떤 본체로서의 '법신法身'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에 상당히 근접한 곳까지 올 뻔한 중요한 이야기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진리의 발견은 아닙니다.

 

역사학적으로 살펴보자면, 석가모니는 그 당시 브라만교 카스트에 반대한 인간 평등을 주장한 지식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힌두교는 영원불멸하는 영혼인 '아트만Ātman, 산스크리트어: आत्मन्; 숨쉬다의 뜻'이 있다고 주장하여 죽은 이후에도 이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카르마에 따라 윤회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인간이 죽어도 그 업(業)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육도 윤회설六道輪廻說'을주장하기에이르렀습니다.

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아트만Ātman, 산스크리트어: आत्मन्'에 반대하여 '안-아트만', 즉 무아를 주장하였다.

무아는 윤회하는 영혼은 없으니 '나'라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어서, 무아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난 현세의 깨달음을 중시하게 된다.

이것으로써 불교는 아트만의 윤회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반대하고, 현세의 계급에 상관없이 수행을 함으로써 여성이나 천민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하했습니다

 

그 이후 불교는 중국을 거치면서 수많은 무속신의 종교와 혼합적인 사상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불교 사찰의 입구에서부터 우리는 보게 됩니다. 서천왕 이라고 불리우는 것 말입니다.

물론 불교신도들의 눈에는 이것이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자체로서 얄궃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천왕(四天王)은 불교의 육욕천(六欲天) 중 첫 번째 하늘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새 귀신 얘기가 등장했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지국천(持國天), 광목천(廣目天), 증장천(增長天), 다문천(多聞天, 또는 대비다문천(大悲多聞天))의 네 개의 하늘이 있으며, 각각의 하늘은 천왕이 다스린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원래의 석가모니가 말하는 불교였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동양의 거의 모든 종교들이 그렇듯이 불교에서 행하는 의식들이 중국토속문화와 교류하면서 무속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상을 만들고, 온 각 가지의 불상형태를 만들어 그 앞에 절하거나 숭배하거나 경을 읽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시주를 하며 밥을 얻으러 다니고 또 집집에 다니며 기복을 빌어주는 일과 주적을 써 주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원불교는 "현재의 불교는 타락했다. 원래의 불교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마틴 루터처럼 말입니다.

 

자, 이제부터 기독교가 왜 진리인가를 말하겠습니다.

길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가됵교는 유일신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이 여호와라 일컫는 하나님인데, 우주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만물과 온 인류를 만드신 분입니다. 인간만은 특별한 창조를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모양을 닮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사귐을 갖고 살아야 할 인간은 마귀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최초언약을 어긴 인간은 죄악에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편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는 죄에 빠져 하나님과 사귐이 끊겼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인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했고 그 자손들에게 언약을 세웠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 언약을 세웠습니다.

10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지켜서 온전케 될 인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분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인류를 죄에서 건져주시는 구속Redeption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살리라."는 '기쁜소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내세의 문제까지도 단백하게 해결해 주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이 사실은 당신이 믿든지 안 믿든지 '진리' 자체로써 영원한 효는이 있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한 것은 불교를 반박하는 가장 좋은 답입니다.

석가모니나 그 어떤 종교가나 사상가도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생명이다."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와서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진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주 예수"가 답이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는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끝없는 이야기로 전개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결론을 지으려고 합니다.

 

참고로

불경 나마다경(38:8)에 보면 다음과 같은 석가모니의 예언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何時爺蘇來 吾道無油之燈也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

언젠가 이땅에 참 깨달음이 오면, 내도는 기름없는 등이 된다.

 

이것은 실제로 불경에 있는 내용으로, 석가가 입멸하기 전 한 설법에 나오는 말입니다.

 

성철승려는 고행과 수행에 있어서 한국 불교계의 큰 분이셨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는것 같습니다.

성철승려의 열반송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 일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彌天罪業過須彌 (미천죄업과수미) -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신보다 더 크다.

活陷阿鼻恨萬端 (활함아비한만단) -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갈래나된다.

一輪吐紅掛碧山 (일륜토홍괘벽산) - 한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또 성철 승려는 운명전 석가는 큰 도적이라는 시를 남겼다.

 

석가는 원래 큰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西天(서천)에 속이고 東土(동토)에 기만하였네. 도적이여 도적이여 !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여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한마디 말이 끊어지니 일천성의 소리가 사라지고 한 칼을 휘두르니 만리에 송장이 즐비하다.

알든지 모르든지 상신실명을 면치 못하리니 말해보라 이 무슨 도리인가?

작약꽃에 보살의 얼굴이 열리고 종녀잎에 夜叉의 머리가 나타난다.

목위의 무쇠간은 무게가 일곱근이요, 발밑의 지옥은 괴로움이 끝없도다.

석가와 미타는 뜨거운 구리 쇳물을 마시고 가섬과 아난은 무쇠를 먹는다.

몸을 날려 백옥 난간을 쳐부수고 손을 휘둘러 황금 줄을 끊어버린다.

산이 우뚝우뚝 솟음이여 물은 느릿느릿 흐르며 잣나무 빽빽함이여 바람이 씽씽분다.

사나운 용이 힘차게 나니 푸른 바다가 넓고 사자가 고함지르니 조각달이 높이 솟았네.

알겠느냐 1 2 3 4 5 6 7 이여,  두견새 우는 곳에 꽃이 어지럽게 흩어졌네.

 

그의 유언 -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시에 찾게 되었다.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위의 시는 성철 승려의 운명전 시사저널 담당기자가 취재해 온 것이라 합니다.

 

만대장경에서 참으로 신가한 것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팔만대장경 라마다경 38:8 석가모니 가라사대何時耶蘇來 吾道之無油燈也(하시야소래 오도지무유등야)(어찌하, 때시, 어조사야, 깨어날소, 올래 나오, 길도, 갈지, 없을무, 기름유, 등잔등, 어조사야)이것을 해석하면언젠가 예수(야소)오시면 나의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다.*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예수를 耶蘇(야소)라 쓰고 있습니다.(구한말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를 야소교라 불렀습니다.)

 

팔만대장경 라마다경 38:8절에서 '석가'는 앞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것을 알고(주전 500백년 전, 석가의 생존시기는 BC 463∼BC 383년 설과 BC 563∼BC 483년 설이 있다.)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석가'는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 중 한사람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선지자가 아니라, 그가 인간의 방법으로 참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노력의 무가치함 속에서 하나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석가모니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현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보는 겁니다.

불교는 흘러오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신화, 무속종교, 샤마니즘, 그리고 우주론에 혼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불상을 놓고 절하거나 또는 부적 등을 써주거나 시주를 하러 다니는 것은 원래 불교의 정신과는 이격된 것들입니다. 오늘날 불교는 전래과정 속에서 싯다르타의 참 뜻에서 많이 멀어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아마 오늘날 순수 불교의 정신을 고수하는 종파는 찾아보기가 드물 정도입니다.

아무튼 순수불교라 할지라도 그곳에 구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기독교만이 인간의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빙자한 많은 이단들은 이 진리에서 이탈하게 하려는 무서운 적으로 등장해 왔습니다.

오직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복음주의 신앙에서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바르게 해결해 주는 키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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