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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 넓은 마음

좁은길을 걸으며 2005. 10. 16. 23:06

 

늦가을에 나팔꽃 보는 재미도 크네요  그래도 가을이 더 좋으시죠?ㅎㅎㅎ 갈대의 순정이란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열린 마음, 넓은 마음               2005/10/16/주일/

                       (고린도후서5장11-13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 옳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그르다는 식의 사고를 가지기 쉽습니다.

사실 우물 안 개구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열린 마음(open mind)’을 갖고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우리 사회는 그동안 남북한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분단국가로 있기 때문에 지금도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극단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배운 사람들일수록 자기 잣대를 만들어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보면 사회지도층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잣대로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차마 눈꼴사나워서 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자기들이 죄인 취급을 했던 세리, 이방인, 가난하고 병든 자, 심지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여자들,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하고 상대를 하니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엔 누구의 마음이 더 넓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너그럽기가 한량없이 넓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참으로 맘이 넓어!(He's get a big heart truly!)”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참 속이 좁아. 좀생이야!”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듣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태평양 같이 넓어야 합니다.

바다는 언제든지 육지에서 흘러온 물을 다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그리고 오만가지 불순물이 섞여서 흘러들어 와도 다 소화해 낼 힘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조선이 침몰해서 기름띠를 이루어도 바다는 놀라거나 바닷물 전체가 오염되지는 않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바다는 육지에서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있습니

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속이 좁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 나 자신이 예수를 잘못 믿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5:44)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분은 수많은 원수도 죄인도 다 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예수님과 같이 못할까요?


한심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찬양이 있습니다.

[오늘 나는]이라는 제목의 찬양 생각이 나신지요?

1.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맘을 주님께 맡긴채로


2.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고린도교회는 한 때 다툼과 분쟁이 많았던 교회로 꼽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들이 갈라지게 되었고 자기들과 반대 편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아버리게 되는 현상까지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시비를 가리다 보니 이 쪽이나 저 쪽이나 모두 속들이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착한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도 바울이 먼저 보낸 편지를 받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쯤에 와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특별히 당부를 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1-13절).


바울 사도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보면 서로 당을 짓고 말썽을 일으킨 교인들을 향해서 금방이라도 쫓아가서 혼내 줄 것처럼 얘기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4:21).

자식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때로는 부모의 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단히 화가 나서 “이번에는 너 그대로 안 둘 거야! 지금이 몇 번째야!”하시지만, 부모의 마음이란 자녀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근본적으로 ‘용납하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이미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온유’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교인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12절).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감옥은 ‘자기(ego)’라는 마음속의 감옥입니다.

여기서 나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밝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텐데.... 그 에고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사물과 사람을 그릇되게 보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에고에서 못벗어나면 스스로 자기 입지를 좁혀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바울은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말합니다.  “너희도 활짝 열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도 나와 같이 포용력을 가지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을 넓혀야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넓히다’는 말은 ‘플라튀노’입니다. 이 말은 ‘넓게 만들다(to make broad)’는 수동형입니다.

한 마디로 “너희 끼리 맘 터놓고 지내려고 애써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맘 닫아놓고 살면 그것처럼 불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 사람의 특징은 뭐든지 ‘빨리빨리’입니다. 땅덩이가 좁아서 그런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한 마디로 마음의 여유가 없고 조급합니다.

저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느낀 것인데 유독 한국 사람만 인상을 씁니다.

외국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나라처럼 심각하게 인상 쓰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출근하다가 차가 사고 났다고 싸우는 민족은 우리 민족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너무나 좋다, 나쁘다라는 식으로 양극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당 야당의 경우도 서로 반목하고 으르렁거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빠빠니라는 사람은 “오늘날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옹졸한 마음이 예수를 믿어도 쉽게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여기 목사는 여러분들을 향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이 열기만 하면 저는 대환영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향해서 열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역시 항상 대문을 열어놓고 문밖에서 서서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까?

[돌아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계시지만 사람들 스스로가 괜히 울었다 웃었다, 붙었다 떨어졌다, 좋아했다 싫어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변덕을 부리며 삽니다.

우리는 내가 내 안에서 좁아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고, 이웃을 오해하고, 교우들을 오해하고, 주의 종을 오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맘을 열고 솔직히 대화를 하면 다 풀릴 것을 가지고.... 스스로 옹졸해져 있으면서...완전히 자기중심적으로 변하여 갈등하고 불화하고 미워하고 심지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인간이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문제들에 부딪힙니다.

문제들을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어떤 자세로 대처하며 지혜롭게 풀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 선생님은 갈라디아교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잘못을 바로잡아 주려다 오히려 형제우애에 앙금이 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 사람을 바르게 잡아주려 했다가 엉뚱한 데로 튕겨져 나가버리는 경우 얼마나 큰 손실이며 아픔인지 모릅니다.

때문에 잘못을 잡아 주는데 있어서는 신중함이 필요 합니다.

이렇게 잘못을 지적해 주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우선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의 은총과 더불어 시행되어야 그 바른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과격하게 몰아붙이기 보다는, 그 이전에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온유한 마음, 사랑으로 품어주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그 영혼이 마귀에게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혼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야단부터 하거나 미워하는 맘 가지고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온유한 심령’을 가지고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을 할 때에 그 일이 바르게 해결됩니다.

그래야만 상대의 자존심도 보호를 받고 속히 회복이 되고 건강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곧 형제우애의 꽃을 피워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향해서 마음을 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열었습니까?

여러분끼리도 서로 열고 지내십시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마음을 열자!”입니다.

내 마음에는 빗장을 질러두고 있으면서 상대편이 맘 열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옆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살아온 환경과 문화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인정해 주고 이해하고 들면 모든 문제는 잘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