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극복하는 신앙 2005/08/14/주일/
(느헤미야2장11-20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우리의 인생 길에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장애물을 피해갈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지혜를 구하여 극복해 나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게 되기도 합니다.
크리스챤은 장애물을 피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해 가려고 하면 더 큰 난관에 부딪힐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것과 맞서서 돌파하고 나갈 때에 진정한 승리가 있고 또 믿음의 성숙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이 당한 문제를 자기 개인의 문제로 여기고 그 엄청난 장애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간 아름다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주전 420년경, 즉 포로기 이후에 활동했던 구약의 선지자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유다 사람으로서 바벨론이 자기 나라를 침략해 왔을 때 포로로 끌려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세계는 격변기를 거쳤는데, 천하를 호령하던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페르시아(바사) 제국이 세계무대에 가장 힘 있는 나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방 땅에서 신임을 받아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산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을 따르는 관원으로 발탁되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생활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조국에 애국심으로 가득 차서 늘 고국의 소식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시대에 자기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오묘하고 귀한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이렇게까지 된 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역사를 볼 줄 아는 통찰력과 앞을 내다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살았던 지각(知覺)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 의식(意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의식 있는 사람은 인생을 비굴하게 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시대와 민족의 역사 앞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충성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조국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졌고 그 성문들이 불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때부터 슬픔에 잠겨 여러 날 동안 울고 또 울면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문제를 자기 개인의 문제처럼 크게 생각하면서 “제 아버지 집과 저 역시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1:6) 그러면서 낱낱이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주의 종인 제 기도를 꼭 들어주십시오! .... 페르시야 왕이 저를 돕게 해 주십시오!”(1:11)
그 이후 느헤미야는 왕이 포도주를 달라고 해서 왕 앞에 서게 되었는데, 왕이 전과는 달리 슬픔 가득 찬 느헤미야의 모습을 보고서, “어찌하여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2:2)고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용기를 내어 자기 고국의 소식을 그대로 왕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고?”(2:4)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서 이렇게 간청을 드렸습니다.
“왕이시여, 괜찮으시다면, ...제 조상이 묻혀있는 유다의 그 성으로 보내주시십오! 제가 그 성을 다시 세우고 싶습니다!”(2:5).
왕은 흔쾌히 느헤미야의 소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2:8).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는 이것을 간증거리로 삼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또는 우리가 어떤 사업을 벌임에 있어서 가능성 있어 보이는 것만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느헤미야의 모험정신은 대단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상상 자체를 못한 것에 도전한 셈입니다.
남들은 ‘왜 무모한 짓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하지만 그것이 결코 무모한 짓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 길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나라에서 주는 봉급만 가지고도 배 두들겨 가면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민족의 문제를 생각하면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민족을 보십시오. 과거에 애국지사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걸핏하면 국적을 포기하고 돈을 몽땅 빼돌려서 외국으로 달아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교육비가 많이 들어서 자녀교육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하려고 할 때 사업장 차리는 데 드는 비용과 인건비가 비싼 나라가 되어 있어 구조적인 모순이 많습니다.
사실 기업하는 사람들이 맘 놓고 기업하기가 매우 불리한 조건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을 피해서 외국으로 도망가야 합니까?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민족이 당한 현실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께 소원을 드리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도 움직이시고, 필요한 모든 것까지도, 법적인 보장까지도 확인시켜 주며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해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닥사스다 왕에게 성벽재건을 허락 받아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가슴속에는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이뤄내야 하겠다는 부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하는 일 앞에는 여전히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 즉 방해꾼들의 음모와 훼방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호른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이 복원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흥왕하게 되는 것이 몹시 싫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서 귀국했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해있었습니다.
느헤미야 역시도 이들의 소행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을 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런 방해꾼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 나름대로 기밀 유지와 비상한 전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지 사흘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자기가 온 목적을 말하지 아니하고 시가지를 탐방하기 위해 밤에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성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성전이 파괴된 것은 물론 성벽이 다 무너져 내려져 있었고 성문이 불에 타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 궁리하고 연구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코가 빠져서 성전을 다시 세우고 성벽을 다시 건축할 생각조차도 못했습니다. 그저 살의와 좌절감에 빠져서 포기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감히 엄두조차도 못 내던 일을 자신이 앞장을 서서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느헤미야에게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꿈이 있고 의식이 있는 사람은 그 일을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며칠 동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후에 아무런 소망도 없이 낙심 가운데 있던 백성들에게 소망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 즉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했더니”(18절). 페르시아에서 고국의 소식을 들을 때로부터 지금까지 되어진 일을 자상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하는 일제히 하는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18절) 하면서 모두 힘을 내어 선한 일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됨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두가 힘이 얻게 되고, 모두가 한 마음, 한 뜻, 한 행동이 되어 열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온 결과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모두 힘을 내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열심을 품고 시작하려던 일을 가리켜서 본문 18절에서는 ‘선한 일(good work)’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밝은 빛에 항상 활동하며 선한 사업에 힘쓰겠나?
자유 얻으려면 주의 뜻을 좋고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주 내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이 선한 일에 모든 백성들은 “모두 힘을 내어”(18절)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당부한 그 한 마디는,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17절)라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과거는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늘 우상숭배와 부도덕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급기야는 포로로 끌려가서 이방 민족 가운데서 엄청난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방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환갑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그 수모는 잊혀지지가 않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해 낼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일본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겨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식을 힘입어서 그들을 능가해야만 합니다.
일본은 아직도 그 침략자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생떼를 쓰고 교과서를 왜곡하는 것만 보아도 그 진의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수치를 받지 말자!” 이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있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만 힘들면 지도자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끼리 물고 뜯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나만 살겠다고 해외로 도피하거나 호화판 인생을 살아서도 안 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기에 앞서 느헤미야처럼 조심스럽게 상황을 판단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목사와 성도가 힘을 합해서 나간다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 한사람이라도 교회의 어려운 일을 보면서 가슴 아파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제부터는 구경꾼의 위치에서 돌아서서 아픈 가슴을 부등켜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찾아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결심하십시오. 느헤미야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황폐한 모습으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면 세상의 많은 불신자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만 세워놓고, 교회당만 넓혀 놓고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치를 받게 될 것이고, 하나님에게는 심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일에 뒤따랐던 방해 공작은 무엇이었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예측했던 대로 그들의 선한 역사 앞에 장애물 놓여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재건된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산발랏과 도비야였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이 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경과 반대와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계속하려는 결단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한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항상 방해가 되는 것은 산발랏과 도비야처럼 무슨 일에나 반대하는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물을 바라보고 겁을 낼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혜요, 능력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외부의 세력을 향하여 이렇게 반박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라!”
이것이 우리의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꿈꾸고 살아갑니까?
의식있는 신자로서 아름다운 목표를 가지고 거기에 도전할 생각으로 충만해져 있습니까?
그런데 그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여러분 앞에 어떤 장애물이 가로 놓여 있습니까?
기도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물만 의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인류의 모든 장애물을 능히 극복하신 십자가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바로 그 주님이 이 일을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아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